인하우스에서 디자이너로 일을 하다 보면 다른 부서로부터 가끔, 종종, ”디자인이 가장 중요한게 아니에요."라는 말을 들을 때가 있다. 그 순간 내 안에서 반응 1과 2가 동시에 꿈틀거린다.
반응 1.
맞다 인정한다.
디자인이라는 일이 언제나 다른 종류의 업무들보다 상위에 있을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된다.
대부분의 경우 디자인은 그 자체로 돋보이는 것이 아니라 담아내는 것과 조화를 이루어야 하기 때문이다.
상대방의 입장을 조금 더 생각해서 디자이너가 디자인을 할 때 고려하는 것이 단순히 보기 좋게 만드는 것이 전부라는 인식으로 인해 이런 말을 하는구나 하고 생각한다.
디자인 서비스만을 제공하는 전문 회사가 아닌 여러 종류의 부서로 구성된 복합 회사에서는 한정된 자원을 여러 부서에서 나눠서 사용해야 한다.
판매 수익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결과물의 편리한 사용을 위해서, 또는 유지관리를 용이하게 하기 위해서 디자인 보다 중요한 것들이 더 많을 수 있다.
그중에서도 회사가 추구하는 방향과 대표자의 성향에 따라, 프로젝트의 목적에 따라, 때로는 시장 상황에 따라 필연적으로 조금 더 중요한 것과 조금 덜 중요한 것이 나눠진다.
이 모든 것들을 바탕으로 회사가 원하는 결과를 달성하기 위한 과정에서 개별 부서는 각자의 역할에 최선을 다해야 하고, 서로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것이 디자인이 될 수도 있고, 조금 덜 중요한 것이 디자인이 될 수도 있다.
동시에 디자이너는 회사의 상황에 따라 디자인에 어느 정도까지 힘을 줘야 하는지 누구보다 먼저 말할 수 있어야 한다.
회사의 사업과 그 사업이 속해 있는 산업의 방향이 어디를 향하는지 그 바다 위에 띄울 배 한 척을 어떤 방향으로 보내야 할지를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결과물로써의 디자인에 힘을 주지 않는 것이 어쩌면 디자이너에겐 아쉬울 수도 있지만 전체를 놓고 봤을 때 디자인이 돋보이지 않음으로써 성공적인 결과를 얻게 되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내가 하는 마케팅이나 디자인이 생각보다 큰 의미가 없다는 걸 알아채야 돼요. 그걸 알아채야 첫 발을 떼는 거예요. 거기까지 가고 나면 이 일에서 뭐가 중요한지를 알게 돼요. 내가 하는 일 말고 진짜 중요한 게 있는데 그 진짜가 뭐지? 그때 회사를 끌고 가는 분한테 얘기를 해야죠. 생각해 보니 디자인이 중요한 게 아니고, 이게 중요한 것 같은데 이것을 더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 디자인을 조금 덜 하는 게 나을 것 같아요. 그런 얘기를 할 수 있을 정도가 돼야 해요. 그러면 다음에 무슨 일을 하면 그 사람한테 디자인 안 시켜요. 우리 회사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물어보게 돼있어요.'
유튜브 최성운의 사고실험 채널에서 조수용 씨의 인터뷰 중 한 부분이다.
반응 2.
이 인간이 선을 넘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디자인이 가장 중요한 게 아니에요 라는 말을 들을 때면 불쾌하다.
당연한 것이 디자인 부서를 만들어 놓고(잡 일 처리반을 만든 것도 아니고) 디자이너에게 디자인 일을 요청하면서 근데 당신이 지금 하는 일이 중요한 건 아니다 라는 말을 면전에서 할 수 있다니 매우 몰 상식하고 무례한 행동이다.
대한민국에서 최소 필수 교육과정까지 졸업하고 사회생활 하는 사람들이라면 이미 도덕 시간에 배웠을 것이다.
존중받고 싶으면 먼저 상대방을 존중해야 한다고.
자신이 하는 일을 타인으로부터 존중받고 싶으면, 상대방이 하는 일을 깎아내릴 것이 아니라 존중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디자인이 가장 중요한 게 아니에요라고 말하기보다 함께 일 하는 너와 내가 그리고 우리 회사가 이 시점에서 추구해야 하는 비전이 어떠하니 잘 맞춰보자고 협업과 공동의 목표에 대해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내가 추구하는 것과 극단의 상황을 대치하다 보니 역설적으로 내가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깨닫게 되었다.
(좋아하는 것을 함께 추구하며 확신을 얻고 더 발전적인 방향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면 더 좋았겠지만.)
회사의 우선순위에서 디자인이 밀려날 때 스스로 얼마나 아쉬워하는지, 디자인에 힘을 좀 빼야 했지만 회사가 원하는 결과를 얻었을 때 얼마나 기분이 애매모호 한지.
나는 디자인을 중요하게 생각하는구나. 디자인을 기깔나게 잘해서 돈 벌어먹고 살고 싶구나 하고.
어쩌면 출발점에서부터 이미 알고 있었지만 빙빙 둘러 스스로를 테스트해 본 건지도 모르겠다. (가 아니라 이미 분명히 알고 있었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스텝이 꼬였을뿐.)
이런 상황에 불쾌감을 느끼고 극단적이라고 까지 느껴진 이유는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고 있다는 뜻일 것이다.
극과 극이 마주한 곳에서 비춰 보인건 다른 이들의 가치와 생각을 이해하고 받아주려 노력한 동안 돌아보지 않았던 나의 모습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