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과소평가된 디자인 스킬

by seojunwoo

출근길에 지나치는 지하상가에서 발견한 어느 옷가게의 의류 디스플레이.

대단한 장식도 화려한 조명도 없지만 정면을 향해 나란히 줄지어 있는 바지들이 인상 깊다.

급한 와중에 발길을 잠깐 멈추고 가게를 들여다보았다.


가게 내부를 보면 바지뿐만 아니라 티셔츠와 같은 상의들도 같이 판매하는 가게임을 알 수 있지만, 밖에서 보이는 가게 전면에는 한눈에도 엄청난 수의 바지들이 앞을 바라보며 걸려 있어 왠지 모를 압도적인 인상을 준다. 매장 내부까지 자세히 관찰해 보면 모든 상품들의 정면이 잘 보이도록 진열해 두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모두 다 같이 한쪽 방향을 바라보고 있는 바지들의 향연이라니…

이것이 지하상가 패션 리테일의 파사드 디자인 전략인가…?


가게의 정면에서 마주 보이는 장면은 마치 뮤지컬이 끝난 무대 위의 모습과도 같다.

뮤지컬의 마지막 장면까지 모든 연출을 끝마치고 출연했던 배우들이 전부 무대 위로 올라와 객석을 바라보며 서서 인사를 하는 듯한 모습. 바지들이 서로서로 손을 마주 잡고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할 것만 같은 느낌.




무엇인가 정리를 한다는 것은 계속해서 사용하는 물건들을 더 편하게 사용하고 관리하기 위해서, 또는 진열하는 물건을 더 잘 보이도록 하기 위해서와 같이 의도와 목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행동이다. 의도와 목적을 결정하고 결정된 이유에 부합하도록 물건을 분류해야 한다. 물건이 분류됨과 동시에 적절한 위치로 옮겨지면 정리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리를 잘한다는 것은 짧은 순간에 논리적인 사고와 판단, 그리고 실행까지 동시에 해야 하는 고차원의 스킬인 것이다.


정리라는 기본 행동에 더 잘 보여주기 위해서라는 의도가 더해지면 디스플레이 혹은 비주얼 머천다이징이 되고, 정리라는 기본 행동에 사용, 관리하기 편하기 위해서라는 의도가 더해지면 수납이 된다. 이와 같이 목적의 종류와 기대하는 결과물에 따라 정리는 단순 노동의 차원을 넘어선 새로운 스킬이 된다.


정리 + 의도(더 잘 보이기 위해서) = 디스플레이
정리 + 의도(사용, 관리하기 편하기 위해서) = 수납



디스플레이를 잘하기 위해서도, 수납을 잘하기 위해서도 정리가 기본이 되어야 한다.

디자인을 하는 데 있어도 마찬가지다. 의도와 목적은 콘셉트가 되고, 실행은 시각적인 결과물로 드러난다.

무엇을 더 잘 보여주고 싶은지, 무엇을 감추어야 하는지, 왜 이래야만 하는지 등등. 이 모든 과정들이 의도를 기반으로 잘 정리되어야지만 설득력 있는 디자인 결과물이 탄생할 수 있다.


그래서, 그러므로, 정리는 디자인의 출발이자 기본이다.


아직 주변 가게들은 문을 열지도 않은 시간. 가게 사장님으로 보이는 아저씨가 스팀다리미로 옷걸이에 걸려 있는 바지 한 벌을 무심하게 다리고 있다. 어쩌면 주인아저씨는 자신이 판매하고 있는 옷들의 멀끔한 앞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가장 효율적인 디스플레이라고 생각하시는 듯하다.

거창한 디스플레이 전략이나 장식을 사용하기 이전의 단계, 디자인이라는 행위가 부수적인 것으로 여겨질 만큼 가장 근본적인 단계에 먼저 집중하고 있는 것이다.

얼마 뒤 다림질이 끝나 멋들어지게 각이 잡힌 바지는 다시 행거로 돌아간다.


출근길 나는 그 가게 앞에서 가장 과소평가된 디자인 스킬의 흔적을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학교나 학원에서도 알려주지 않는 -어쩌면 기본보다 근본에 가까운, 스킬보다 성향에 가까운- 가장 기본적인 스킬.

그 기본 스킬의 중요성을 알아채고 정점을 찍은 고수의 손길이 강력한 이미지가 되어 나의 발걸음을 붙잡았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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