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 속에 감춰둔 마음 : 국보 3회차 후기(4)
필기를 할 수 없는 상황에서 떠오른 생각을, 계속 주무르는 채로 다른 무엇에 집중하기가 정말 어렵잖아요?
그래서 전 세 번째 국보를 보며... 결국 노트를 꺼내고 맙니다ㅎ
그렇게 휘갈겨 쓴 메모들을 가지고(심지어 촘촘히 쓴다고 글자까지 겹쳐져서,, 제법 가독성이 아수라장이었지만)
찬찬히 초고를 짰어요. 그리곤 매일 아침, 살을 조금씩 보태어 가는 방식으로 글을 쓰고 있답니다.
하나의 영화를 세 번 정도 집중해 긴긴 호흡으로 읽고 나니, 가장 크게 바뀐 건 주변 인물들에 대한 제 마음이었어요. 주인공들에 대한 생각이 아니라.
주인공의 곁에 머문 사람들은 (물론 모든 사람들의 만남이 그렇겠지만) 그를 만나기 전과 후의 삶이 크게 바뀌어요. 그래서 변한 그들의 마음색이랄지, 흐름, 깊이 같은 것들을 촘촘히 기록해보고 싶었어요.
주인공을 가장 가까이서 바라보며, 그의 생에 깊이 관여하고 휘말리며 생긴 요철 같은 것들.
그 생채기들을 어떻게 다루어냈나? 기꺼이 모든 걸 받아들였나? 끝내 무시하지 못하고 관계를 청산했는가에 대해 생각해보려 합니다.
타케노(이전글『어둠 속에서 필기하는 수상한 사람...』참조)와 하루에, 후지코마, 아야노, 아키코에 관하여
13) 식물 속에 감춰둔 마음
:: 하루에_영원한 사랑
:: 후지코마_내 모든 것을 당신에게
13-1
세 번을 보고 나서야 알아차린 식물들이 있었다.
처음으로 미야코좌에 설 수 있게 된 키쿠오에게 도착한 꽃바구니. 하루에가 보낸 그 마음 안에 하얀 캄파뉼라만 있는 게 아니었다.
핑크색 카네이션도 함께였는데, 그 꽃말은 모성애와 감사 그리고 영원한 사랑이었다.
이걸 알게 되고, 며칠째 ‘영원한 사랑’에 대해 생각한다.
가장 먼저 떠올린 건 영원과 사랑을 분리해야 한다는 것ㅎ
‘어떤 상태가 끝없이 이어짐 또는 시간을 초월하여 변하지 아니함’
‘보편적인 진리처럼 그 의미나 타당성이 시간을 초월하는 것’
어떤 마음은 정말 영원할 수 있다고 믿는다. 한 번 태어난 마음이 끝을 모르고 이어지기도 하니까. 인간의 시간으로 영원은 죽을 때까지의 찰나라고도 정의할 수 있으니. 그렇게 따지면 영원한 사랑도 있음 직하다.
‘다른 사람을 애틋하게 그리워하고 열렬히 좋아하는 마음 또는 그런 관계나 사람’
‘다른 사람을 아끼고 위하며 소중히 여기는 마음 또는 그런 마음을 베푸는 일’
‘어떤 대상을 매우 좋아해서 아끼고 즐기는 마음’
하루에가 키쿠오에게 품었던 마음은 몇 번째 사랑이었을까? 아마 가장 가까운 형태는 두 번째이지 않을까?
영화 속에 등장하는 인물 중 키쿠오의 시작과 끝에 언제나 자리를 지키는 하루에로 묘사되고 있으니.
우리가 일반적으로 떠올리는 영원한 사랑과 억만년의 거리가 있을지 몰라도, 하루에가 지키고자 하는 키쿠오와 그 사랑은 선명하게 꽃 속에 자리하고 있었다.
13-2
또다시 못 보던 꽃을 발견했다.
부상을 입게 된 슌의 아버지, 한지로가 자신의 대역으로 아들이 아닌 키쿠오를 선택한다. 그 부담감에 파들파들 떨며 대기실에서 준비하는 키쿠오를 보여주는 장면이 있었다. 그곳에 보랏빛 국화 꽃바구니가 앵글에 잡히는데,,,,
그 꽃말이 무려 “내 모든 것을 당신에게” ㄷㄷ
(물론 이건 보라 국화의 꽃말이고_메이비 소국/ 극 중에 등장하는 국화의 품종은 대국이라 의미가 다를 수 있겠으나... 제가 반한 의미로 설명하고 말겠어요///
그전에 보라 대국 꽃말을 짚자면, 변치 않는 사랑, 깊은 애정+신비로운 아름다움과 평화, 변하지 않는 절개, 고상함, 정절, 순결 등의 고귀한 감정을 품고 있다고 합니다만, 전 “내 모든 것을 당신에게"로... 진행시킴!)
이렇게 파괴력이 엄청난 의미를 담은 국화가 또 어디에 나오는지 아시나요..?
슈메이를 앞둔 키쿠오가 이브 퍼레이드 같은 걸 할 때... 아빠를 보고 반가웠던 아야노가 행렬을 쫒으며 계속 아빠를 부르거든요?ㅠ
너무 놀란 후지코마가 달려가, 아야노를 안아 들고 키쿠오에게서 멀어지며 등을 돌리는데....
그때 기모노 오비에.... 보랏빛 국화가 두 송이 챱챱... 그려져 있더라고요...
여기서... 억장 무너짐ㅠㅠㅠㅠㅠㅠ
아야노가 등장하는 시점에서 후지코마와 키쿠오는 눈도 제대로 맞추지 않고, 그 어떤 대화도 주고받질 않아요... 그래서 처음엔 후지코마가 키쿠오를 원망하고 있을 거라 생각했거든요? 자신도 딸도 매몰차게 저버리고 자신의 꿈만을 위하는 사람이니까.
그렇지만 두 번, 세 번을 거치고 나니, 후지코마는 참 그윽하고 따스하게 그저 키쿠오를 품어주고 있단 생각이 들었어요. 어떠한 형태로든 그에게 돌아올 집을 만들어주고 싶었달까?
맨 처음 만났을 때부터 후지코마는 키쿠오의 두 번째, 세 번째 사람이어도 상관이 없다고 말했고, 그가 일본 최고의 배우가 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으니까요. 그래서 오늘의 이 상황도, 과거에 이미 예상했고 받아들일 각오까지 굳혔던 거라고 생각해요.
그렇지 않았다면 이토록 의연하고 강인하게 돌아서지 못했겠죠? 이제 보니 후지코마.. 정말 그릇이 대장부 같고... 적장의 목을 베어올 기개를 가진 장군 같아요... 넘 멋짐
13-3
키쿠오가 악마와 거래한 뒤 앵글에 잡히던 홀로 선 대나무
사실 대나무를 보면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가 가장 먼저 떠올랐는데 김영하 작가님의 '살인자의 기억법'을 읽게 된 이후론... 어우 시체 묻기 딱 좋은 곳이네..
라는 생각이나 하게 돼버려서... 본래 가지고 있던 사군자 대나무의 강직 청렴결백과 같은 의미는 내게서 제법 옅어짐
극 중에서 팽팽한 긴장감을 환기하듯 대나무들이 화면에 머물렀다. 그중 홀로 우뚝 서서 바람에 휘날리는 나무 하나가 키쿠오 같다고 느껴졌다.
무리라고 믿고 싶은 하나의 집단에 속해 있지만 사실은 철저히 혼자라는 걸 알고 있는 키쿠오
이걸 군계일학이라 불러야 할지 어디에 있든 오롯이 섞이지 못해 슬픈 존재라 여겨야 할지 모르겠네.
그 동떨어진 나무는 무리에 속하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을까? 애초에 자신이 그 무리 속 일원이란 생각조차 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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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원작을 읽고 있습니다만 어제 경악할 만한 힌트를 발견했어요...
세키코토를 함께 연기했던 토쿠지의 등 문신이 대나무와 호랑이로 묘사되더라고요...? 영화와는 다르게 원작에선 토쿠지의 역할과 비중이 굉장히 크다고 들었는데 언뜻언뜻 이렇게나마 그의 숨결을 영화 속에 불어넣은 걸까요?
아주 조금 읽었는데도, 활자로 읽는 가부키는 너무 신선하더라고요!!! 그래서 아주 밑줄 박박 긋고, 메모를 휘갈기며 신나게 읽고 있답니다!! 곧 원작 후기도 끓여 올게요.
13-4
10년 만에 돌아온 슌이, tv프로그램에 나온 장면을 보여 주던 공간에 걸린 해바라기 달력과 슌의 집 거실에 놓인 해바라기와 백합 조합의 꽃병
여명의 순간 만기쿠 선생님이 키쿠오에게 건네준 부채에 그려진 해바라기
3회차 만에 처음으로 발견한 해바라기였는데, 한번 인식하고 나니 슌이 해바라기처럼 느껴졌다.
아폴론을 사랑하게 된 클리티에가, 영영 자신을 바라봐주지 않을 그를 알면서도 끊임없이 꽃바퀴를 돌려 태양을 향해 눈 맞추는 해바라기가 된 것처럼.
이 생생한 연정은 어떻게 시작된 걸까?
어떤 마음이 더 먼저였을까?
이루어지지 못하고 외면당한 사랑인 것을 알기에, 기다리게 되고 일편단심으로 숭배할 수 있었던 걸까?
슌에게 태양은 무엇이었을까? 키쿠오였을까? 아니면 그저 영원히 가질 수 없는 재능이었을까?
원하는 경지에 이르고픈 가부키 세계, 그 자체였을까?
키쿠오에게 태양은 무엇이었을까?
자신의 모든 과오도 슬픔도 짐도 모두 내려놓고 편히 쉴 수 있는 누군가의 품이었을까?
13-5
마지막 소네자키 무대 소품이었던 보랏빛? 꽃이 너무 예뻤는데.... 아무리 봐도 무슨 꽃인지를 모르겠습니다...
알고 계신 분 제발 알려주세요....
13-6
식물을 떠올리면 떠올릴수록 세상에 이토록 무해하고 아름다운 존재가 있다는 것. 그들과 함께 살아갈 수 있음에 감사하고픈 마음뿐입니다...
숨 돌릴 틈 없이 치열하고 퍽퍽한 일상 속에서 잠시 동안의 위로를 끌어당기고 결국 나를 사랑하게 만드는 것들을 손 닿는 곳, 눈이 마주하는 곳곳에 놓아둘 수 있는 온기와 정성으로, 스스로를 그리고 서로를 아낄 수 있는 어른이 되고 싶습니다. (평생 목표)
14) 와스레테 헹요 아야노ㅜㅜㅜㅜ
후지코마란 여성을 알고 계시나요? 기온의 게이코인데ㅜㅜㅜㅜ
(알고 있다고 대답하지 않고 곧바로... 아야노의 이름을 부른 게... 크리티컬 하게 좋았음...)
와스레테 헹요 아야노(잊지 않았어 아야노)라니.... 정말 정말... 키쿠오 등에 새겨진 수리부엉이의 눈매가 두둥... 하고 오버랩되는 장면 입죠...
아니 근데요ㅜㅜ키쿠오는 처음부터 아야노를 알아차렸지만 모른 척하잖아요..?
아야노가 이 공간에, 자신의 앞에 있게 된 것이 우연인지, 의도한 건지를 키쿠오는 판단할 수 없으니
아야노에게 누가 될까 상처가 될까 숨죽인 채 눈 돌리며ㅜ일부러 데면데면 알아보지 못한 척하고 있는 키쿠오가ㅜㅜ너무 맘 아팠어요...
속으론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자꾸 수상하게 곁을 맴도는 아야노가 찍으란 사진은 안 찍고 옷매무새 다듬고 그럴 때ㅠㅠㅠㅠ
참 많이 컸구나, 대견하고 미안한 마음이었을까요?
15) 음소거가 되는 장면과 음악이 인상적인 순간
아야노가 셔터소리를 낸 다음 장면에서 소리가 사라짐. 왜 소리를 삭제했을까?
소리가 사라져서 얻을 수 있는 효과는 뭘까? 생각하며 보다가 백로 아가씨 무대에 막 오르려는 찰나의 음악이 너무너무 무서워서 이게 뭐람..?
무슨 감정을 의도하고 있는 거죠? 우리가 무엇을 생각하길 바라시나요 음감선생님? 하고 물음표 백만 개 뜸
16) 아야노도 “우치”라고 말한다...ㅠ
일본어에 집을 의미하는 단어가 여러 개 있는데 가장 일반적으로 쓰는 ‘이에’는 건물로서의 집을 가리킨다고 하고, ‘우치’는 우리 집, 우리 가족, 가정의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해요. 뿐만 아니라, 친근한 사이에서 여성들이 쓰는 1인칭의 우치도 있다고 하는데
아니ㅜ왜 아빠한테 우치라고 말함까ㅜ
키쿠오 주변에서 ‘우치’라는 1인칭 쓰던 여자가 딱 둘인데...
하루에랑 후지코마였잖아요???
그럴 때마다 전, 각자의 집이 어디인지 너무 묻고 싶더라고요.... 일본에서 정말 많이 쓰는 표현 중에 ‘いばしょ’가 있죠.
있어야 할 곳, 나에게 어떤 목적도 의도도 없이 그저 자연스럽게 편안하게 내가 나로서 존재할 수 있고 나를 받아주는 곳, 이바쇼.
아야노의 いばしょ 이자 집은 부디, 무대 위의 키쿠오였으면 좋겠다는 이기적인 꿈을 꿔봅니다ㅜ
무대 위의 키쿠오가 ‘같이 가자며, 함께 놀자고 초대된 것처럼
모두 잊고 이리 오거라’ 하고 말 거는 것처럼 느껴졌다는 아야노의 문장이ㅠ너무 포근하고 보드라워요ㅜㅜㅜ
17) 아키코_거울에 담긴 진심
극 중에서 처음으로 거울이 사용된 건 키쿠오와 슌의 만남에서였다.
느닷없이 자신의 인생에 쳐들어와 예명이 “한(반)야”인 자기보다 “이치(하나)로”인 키쿠오를 거울을 통해 노려보던 슌스케.
자기감정을 드러내는 것에 두려움이 없는 슌인데, 굳이 거울을 통해 보여줘야 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두 번째는 완전히 탄바야 가문에서 출가하는 키쿠오의 장면인데, 그를 기다리던 아키코의 얼굴이 차 룸미러에 잡히는 순간이다.
슌과 키쿠오가 싸우는 모습을 아무 말 없이 바라보며, 그녀의 뒷모습과 동시에 룸미러에 비친 눈동자가 묘사된다.
수만 가지의 감정이 교차하는 그 눈동자가, 그녀의 인생에서 최초일 첨예한 고민과 두려움, 배신감과 실망이 여과 없이 드러나며 선택을 종용한다.
아키코가 떠나야 했다면, 바로 이 순간에 가야 했다고 생각한다.
출발하기 전, 이미 키쿠오에 대한 애정과 믿음이 끝나버린 게 얼굴에 다 드러나는데 함께해서 무엇합니까?
그가 가장 아플 때, 가장 힘들어할 때 곁을 지켜주지 않을 거였다면, 안아주지 못할 미래였다면, 이 순간에 바로 끊어버리는 게 서로를 위한 베스트였다고 생각합니다.
세 번째로 등장한 거울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키쿠오가 쿠마도리(흰색 바탕 위에 무늬를 덧입히는 가부키 무대 화장)를 하는 장면이 극 중에서 정말 많이 나오는데, 직접적으로 거울 속의 키쿠오를 보여주는 씬은 이때가 유일하다. 10년 만에 돌아온 슌이 곧바로 주역을 맡게 된 것을 알고 짜증이 난 듯 호닥호닥 분장을 하는 장면.
인형처럼 감정을 지우고 살아가는 키쿠오가 손에 꼽게 감정을 보여주는 모습을 거울을 통해 보여준다.
거울이라는 장치를 이용해서가 아닌, 있는 그대로의 키쿠오를 전해줄 순 없었을까? 그는 언제쯤 모든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네 번째 거울은, 17년 만에 돌아온 한한콤비로 도죠지를 연기하다 쓰러진 슌의 병원씬이었다.
슌이 약간 화가 난 듯한 표정으로 바나나를 먹는 모습이 거울에 비친다.
아니... 당뇨인데... 굳이 수많은 과일 중에 지금 바나나를 먹는다고요? 죽고 싶은 건가?
일상 속의 우리는 거울 없인 살아갈 수 없을 만큼, 그 유용함에 익숙해져 있다.
그러나 그 익숙함에 속아 의미를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거울 속의 나는, 정말 내가 맞을까?
국보에서 살펴본 것처럼, 영화나 여러 다른 매체에선 주로 이성적인 현실과 비교할 수 있는 소재로 쓰인다.
내면에 감추어둔 감정을 드러내거나 타인에게 들켜선 안될 속내를 거울만이 발견한 듯 그 은밀한 동료처럼도 느껴진다.
가장 솔직하고 내밀한 자신의 목소리를 듣고 기억하는 존재로서의 거울
과연 거울 속의 내가 진짜 ‘나’라고 확신할 수 있을까?
또 다른 관찰자로 읽어야 하지 않을까?
거울이 발명되기 이전, 자신의 얼굴을 몰랐던 나르키소스가 수면에 비친 스스로와 사랑에 빠졌던 이야기가 떠오른다.
여러분은 자신에 대해서 얼마나 잘 알고 계신가요?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살고 계신가요?
거울 속의 내 표정과 마음속 진짜 표정과 괴리감은 느껴지지 않나요?
당신은 누구인가요?
물음표 살인마는 이만 물러가고
국보 3회차 후기 5탄과 버무려진 원작 후기로 찾아뵙겠습니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