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일 감독의 영화 <국보> 후기

내가 이걸 보려고 심각하게 부국제행을 고민함

by 윤석화



영화가 끝나자마자 제일 먼저 쓰고 싶었던 감정이 있었다.

전 국보였던 키쿠오의 스승이 아무것도 남지 않은 공간에 누워, 여명을 채우던 순간의 소회.


평생을 아름다운 것들에 둘러싸여 있다, 이제서야! 겨우 이곳에서 뱉을 수 있게 된 “ほっとした”가 참 와닿았다.


그토록 섬세하고 예민한 이가 늘 벼려진 칼날처럼 화려하게 빛나는 것들에 삼켜지지 않으려, 베어 지지 않으려 얼마나 곤두선 채 꼿꼿이 평생을 살아낸 걸까.


아름다운 것이 하나도 없는 공간에서 겨우 안심하게 된 그의 마음을 들었을 때 키쿠오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럼에도 자신은 그 세계로 돌아가고 싶다 되뇌었을까?


이토록 허망하고 무상한 국보의 삶을 부디 키쿠오가 살아내지 않길 빌었다. 이 간절함에 응답하듯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날 안도케 했다.


눈이 아플 정도로 다양한 색과 채도 높은 무대 위에서 그가 평생 찾아 헤맨 무채색의 풍경


빛과 어둠으로만 채워져 시간조차 멎은 공간에서 그가 탄식하듯 읊조린 아름다움은 사실 그를 가장 안도하게 만든 것이 아니었을까.

터무니없는 슬픔과 상처로부터 초월하듯 발견한 그의 안도는 여전하게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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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고 돌아와, 차분히 시간을 두고 가라앉았다가 반복해 떠오르던 이야기는 역시 색에 관한 장면이었다.


곱씹으며 생각할 때, 이 감독은 질감에 따른 무게를 색채로 잘 표현하는구나, 싶었다.


빛의 색으로 표현된 날카롭고 선명한 슬픔은 블루로 (이별을 직감한 프러포즈 순간의 새벽, 슌스케가 이제 죽겠구나 싶을 때 투명한 염주가 감긴 손을 비추던 조명의 색, 잘 벼려진 슬픔이랄까? 고요하고 창백하게 그 자리를 지키나, 섬뜩할 정도로 형형히 날이 선 채 머물러 외롭고 아름다운 늑대 같은 키쿠오를 소개하는 색처럼 느껴졌다-불한당 현수의 블루처럼)


이렇게 블루가 예리하고 단단한 고체의 슬픔이라면 내리던 눈의 무게와 질감, 온도와 속도 또한 잊을 수 없다. 극의 초반 아버지의 죽음을 위로하던 순백이었으므로.


블루보단 느리지만 확실하게 모든 면적을 채워 질식시키는 액체의 위력처럼 파괴력과 침투력이 뛰어난 화이트. 가장 가벼워 보였지만 무게를 가늠하기조차 어려워, 모든 걸 무너뜨리고 새로이 태어나게 만들기도 하는 색이었다.


(극의 마지막 키쿠오의 백조 아가씨 공연에서 하얀 컨페티가 쌓인 눈처럼 묘사되어 그의 움직임에 따라 움푹 파였다 모였다 흩어지기를 반복하며 그가 걸어온 모든 길과 눈물들을 기억하고 있다는 듯, 위로하는 것처럼 느껴져 좋았다...


또 무대에 오르기 전 건네받은 우산이 불투명하나 빛과 그림자를 설명할 정도의 투명함을 지니고 있어, 비추어내던 풍경과 컨페티가 흰색의 빛으로 하강하나 그와 반대 방향으로 상승하듯 표현된 그림자가 우산에 그대로 그려지는 장면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빨강이 주는 감정은 무엇일까?

중국의 변검처럼 무대 위에서 화려한 변화를 강조하는 붉은 의상이 가장 먼저 떠오르지만, 젯소 칠하듯 새하얗게 가다듬는 온나카타의 몸 위에 유일하게 허락된 색인 듯 내려앉은 입술과 눈매에 찍히듯 표현된 붉은빛.


피를 상징하기 위함일까? 눈물을 흘릴 때마다(공연을 마치고 화장을 미처 다 지우지 못한 채 뛰어나가는 상황에서) 피눈물처럼 보이는 연출이 좋았다. 눈물에도 여러 이름표를 붙일 수 있는 것처럼 색으로 눈물을 보여주니 그 감정을 좀 더 선명하게 구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질감과 물성을 색감으로 너무 잘 설명하고 있다고 할까. 감독님 부디 무병장수하시고 작품 많이 만들어주세요.




(적고 싶은 말은 많지만, 덕메와 함께 영화를 보고 얘기를 나눈 뒤에 더 보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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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으로 그의 발목을 잡은 수리부엉이 문신 얘기를 안 할 수가 없는데...

한창 잘 나가던 그의 등이 드러나며, 화려한 문신과 야쿠자의 아들이었던 것까지 밝혀지게 되며 사장되는 듯 전개가 되는데


마음을 열기 어려워 보이던 소년 슌과 처음으로 가깝게 대화한 소재가 이 문신이란 것도 참 아이러니했다.

“수리부엉이는 사람을 잊지 않는다.”

자막으론 은혜를 잊지 않는다고 나왔던 것 같은데, 그저 은혜라기보단 사람에게 받은 것을 잊지 않고 실은 누구보다 사랑을 오래 기억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소꿉친구였던 그녀도, 슌짱도 슌짱의 아버지도, 결국엔 그를 놓지 않고 알아봐 준 스승님도 모두 사랑하며 살아내고 싶었지만, 그들에게 가장 소중한 1번이 자신이 아닐 때마다 소스라쳐 부서지던 그 마음이 고스란히 그의 눈동자에 담겼다. ㅠ제발 행복해주세요ㅠ


그래서 수리부엉이는 사람한테 은혜를 입으면 보답하려고ㅠ뱀이나 쥐 같은 거 놓고 간다던데, 슌짱은 뭐가 좋아? 하고 물었던 게.... 영화다 끝나고 꺼이꺼이하게 슬펐음.... 아니 누구보다 이미 은혜를 입었다는 걸!! 제일 잘 알고 있는 키쿠오쟈나요엉엉 그만 괴롭혀 세상놈아ㅜㅜ)


문신의 의미도 사람에 따라 새기는 위치에 따라, 천차만별의 이야기가 있겠지만 등에 새기는 문신은 뭐랄까. 우리 몸 중에 가장 큰 면적의 피부이니, 내 인생에서 가장 큰 무게를 두고 싶은 의미를 담은 걸까? 자신이 볼 순 없으니 타인으로 하여금 거듭 그 메시지를 상기하기 위함일까? 무엇이든 간에 당분간 나는 수리부엉에 부엉 자만 들어도 눈물 흘릴 준비가 되어있슴...


후기 투비컨티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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