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성현 감독의 <불한당> 후기
누아르 영화 싫어한다.
극장에서 불한당(2017)을 처음 보았던 당시, 예상도 못 한 총성에 꽤액 소리 질렀던 그 순간을 잊지 못한다.
그럼에도 내가 극장에서 가장 많은 돈을 들여 재관람했던 영화가 이 ‘불한당’인 것이다. 누아르임에도 망설임 없이 이 영화를 보게 된 이유는 임시완 배우 때문이었다.
영화의 장면들은 가끔 지나칠 정도로 잔인했고 굳이 보여주지 않아도 될 만큼 구체적이었다. 예를 들어 현수(임시완)가 어머니의 사고를 꾸민 사람이 재호(설경구)라는 걸 알게 되는 순간이 있다. 주마등처럼 스치는 재호의 표정과 의미심장했던 말들이 다시 흘러나온다.
이 묘사들은 보여주지 않아도 충분했을 텐데 ‘너무 설명적이고 직관적이다, 근거를 찾아 하나하나 덧붙이는 논설문이야?’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난 입을 틀어막고 울고 있었다.
눈물의 이유는 ‘논설문인 줄 알았는데 다 읽고 보니 산문시였더라,’하는 느낌 때문이었다.
마약 밀수 조직의 실질적 수장이었던 재호에게 접근하려 현수는 감방에 들어간다. 잠입수사였다.
교도소 내의 권력 다툼에서 밀려난 재호의 목숨이 위태롭던 순간, 현수가 그를 구한다. 이것을 계기로 둘의 관계가 시작된다. 그러던 중 갑작스러운 어머니의 죽음으로 현수는 외출을 요구하지만, 팀장인 인숙(전혜진)은 그가 모범수가 아니라는 이유로 이를 거부한다. 경찰대에서 군계일학의 성적으로 졸업한 현수가 3년을 감방에서 애쓴 것도 전부 어머니의 신장을 구해주겠다는 인숙의 약속 때문이었다.
그런 그에게 있어 어머니의 장례를 치를 수 없다는 절망의 순간 손을 내민 것이 재호였다. 그가 어머니의 장례식부터 현수의 외출까지 이 모두를 해결해 준 것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현수는 변화한다. 재호에게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마음을 열어젖혔던 것이다.
내가 포착한 시의 순간은 어머니의 사망 소식을 전해 들은 현수에게 내려앉았던 빛의 장면이었다.
두 사람에게 양팔을 붙들려선 엄마를 보고 오겠다며 팔과 다리를 휘저으며 역광으로 쏘이는 빛을 가르던 현수의 몸부림. 그 때문에 무수한 먼지가 별처럼 일어나는 장면이 있었다.
‘참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그토록 명석한 사람이 어머니 죽음의 이유를 되묻거나 의심하지 않고 그의 우주가 사라진 순간, 함락되어 온몸으로 울음을 터뜨리는. 너무나도 투명하고 맑아서 아름다웠다. 재호가 현수에게 시선을 떼지 못한 이유를 발견한 것 같았다. 사람이 사람에게 이토록 뜨거운 의미일 수 있는 거구나. 몸이 부서져라 울음을 터뜨릴 만큼 재호는 ‘사람’을 아껴본 적 없었다. 마음 한 자락을 그 사람을 위해 비워두고 들여오고 애정을 쏟아 자라게 했던 적이 없었으니까. 현수라는 인물이 무척 신기하고 빛나 보였을 것이다. 내가 재호의 시선으로 읽어낸 이 순간은 그래서 이토록 아름다운 장면으로 기억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또 재호가 현수에게 총구를 겨눈 채 울음 같은 웃음으로 문장을 고르던 장면이 있었다.
‘믿음’을 겪어본 적 없는 재호에게 현수의 올곧은 진심이 닿으면서 닳고 닳았던 재호의 가면이 떨어져 나간 것 같았다. 감정을 숨겨야 하는 때를 정확히 알아, 원체 속을 드러내지 않던 재호가 점점 사람다워졌다.
예전이었다면 주저 없이 몇 번이고 당겼을 방아쇠를, 그는 끝내 당기지 못한다.
재호가 생각에 잠길 때마다 공을 튕기는 습관이 현수에게 옮겨간 것처럼, 누구의 것인지도 모를 버릇들이 이미 서로에게 가닿아 있었다.
영화의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은 ‘시선’과 ‘죄의식’의 수미상관이다.
여섯 발의 총알을 한 사람에게 소모한 현수가 재호의 눈을 바로 맞춘 채 그의 입을 두 손으로 틀어막아 목숨을 빼앗는 장면이 있었다. 죄의식을 덜어내는 수단인 총을 버리고 고스란히 이를 떠안는 방식으로 현수는 시선을 피하거나 눈 감지 않고 눈동자 속에 모든 시간을 새긴다.
끝내 재호의 숨이 멎자 그는 몸을 떼어낸다. 동시에 고개를 기울이자 콧대를 타고 사선으로 흐르며 맺히는 왼쪽 눈물과 시간차를 두고 직선으로 떨어져 내리는 오른쪽 눈물이 있었다.
이처럼 상징적인 장면들이 마치 시의 문장처럼 마음에 자리 잡아 두고두고 품어 해석하고 싶은 영화가 되었다.
나에게 시와 닮은 영화는 ‘정답을 맞히지 않아도 좋다’는 감각을 준다.
이건 내가 인생에서, 계속 그림을 그리겠노라 결정한 마음과 닮았다. 참 정직하고 착실하게 공부했던 시절이 있었다. 단 하나의 정답만을 고르고 맞추는 게 재밌었다, 쉬웠다.
하나의 문제에 하나의 정답만이 존재한다니. 얼마나 명쾌한가.
그러나 문제 하나에 여러 정답들이 존재할 수 있다는 걸, 애초에 문제가 잘못되었을 수도 있다는 걸, 아니 왜 ‘정답’을 꼭 찾아야만 하지? 이런 물음표를 느낌표로 바꾼 것이 그림을 그리는 거였다.
창작자의 의도와 감상자의 해석이 같으면 감격스러웠고 다르면 신기해서 기뻤다.
내 그림을 보며 각자의 기억과 이야기와 시간을 나눌 수 있다는 게 겪을수록 놀라웠다. 나에게 불한당은 내 그림처럼 혹은 다른 이의 그림처럼 수많은 해석을 가져도 좋다, 허락한 최초의 영화였던 것이다.
영화 속에서 각별히 시각적으로 끌린 표현은, 변할 의지를 갖지 않았던 인물들이 서로를 만나 변하는 과정을 자연스레 드러낸 장면이었다.
나에게 영화 속 인물들은 각자의 고유색을 지닌 것처럼 보였다. 현수는 시리도록 빛나는 파랑이었다.
차가워 보이지만 실제로는 가장 높은 온도를 가진 파란색의 불꽃처럼 고요하게 타오르는 인물이었다. 재호를 관통하는 색은 노랑이었다. 집념과 생에 의지로 일렁이는 고흐의 노랑처럼. 치열하게 빛나는 생명력의 노랑이었다.
여기서 압권은 ‘초록색’이 만들어진다는 거다. 파란색과 노란색이 섞이면 만들어지는 초록. 각자의 색이 서로의 시간 속에서 섞이고 섞여 초록을 나눠 가지고 결국 서로의 색을 바꿔갖는다. 파랑의 현수는 생을 품은 노란색이 되고, 노랑의 재호는 순수한 파란색을 머금은 사람이 된다.
누군가의 흔적이 색으로 남는다는 것, 지금의 내가 쥐고 있는 색들을 가늠하며 어떤 사람에게서 옮아온 빛이었는지를 세어본다. 또 나는 어떤 색으로 누군가를 물들여왔는지를 헤아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