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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석운동 Dec 06. 2022

충격과 공포, 에든버러에서 따귀를 맞다

스코틀랜드 에든버러(Edinburgh) 산책


* 글에 등장하는 지역 이름, 사람 이름, 위스키와 증류소 이름의 원어 표기 및 따옴표는 편의상 생략한 경우도 있습니다.





위스키 때문에!



도대체가 무엇 때문에 돈도 없는 녀석이 한 달씩이나, 물가도 비싼 영국으로 ―정확히 말하자면 스코틀랜드로― 여행을 가는 거냐는 물음에, 멋쩍은 웃음으로 위스키 때문에. 라고 일단 답은 해 두었다. 그것이 이번 여행의 전부는 아니었지만, 일부는 사실이었다. 스카치 위스키! 재작년부터 홀짝홀짝 마시기 시작한 위스키에 대해 알게 될수록 스코틀랜드가 궁금했다.



이를테면 싱글 몰트 위스키에는 저마다 독특하고 강력한 향들이 있는데 그러한 향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 중 하나가 해당 증류소의 자연환경이라고, 우리가 자주 가는 바의 바텐더가 말했다. 예컨대 스페이사이드 내륙에 위치한 글렌피딕 증류소의 부드러움은 케언곰 산에서 흘러 내려오는 깨끗한 시냇물 덕이다. 반면 탈리스커 증류소의 강한 피트 향은 증류소가 위치한 스카이섬에서만 나는 토탄 ―맥아를 건조하는 과정에서 토탄을 이용해 훈연한다― 에 섞인 바다 식물들의 향, 그리고 숙성과정에서 오크통을 지나가는 바다 바람의 짠맛이 더해진 것이란다. 맥아를 증류하여 숙성한 것일 뿐인데 이렇게 서로 다른 맛과 향을 가진 위스키들을 마시다 보면 자연히 그러한 환경을 상상하게 되고, 궁금해진다.



물론 이런 낭만적인 이유가 아니더라도 발단은 위스키였다. 작년 여름 어느 날 친구들과 2차로 간 위스키 바에서 거하게 취해, “우리 이거 마시러 스코틀랜드나 가볼까?” 하고 비행기 표를 끊었으니, 어쨌건 ‘위스키 때문’이라고 말 하는 데에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 문제의 단골 위스키 바









그러나 다른 한편, 위스키는 우연찮은 하나의 계기일 뿐이었다. 왜 목공을 시작했냐는 질문에 대한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간단한 대답은 아마도 “돈”일 것이다. 난 인문학 공동체에서 공부를 하고 싶었고, 돈을 벌어야 했는데, 마침 목공소에서 사람을 구하고 있었고, 그게 전부였다.


그러나 ‘김지원은 돈 때문에 목공을 했다.’라는 명쾌해 보이는 문장이 나에 대하여 설명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아무것도 없다. 내가 생각하기에 대부분의 일들은 애초부터 명확한 목적과 방향을 가지고 일어나지 않으며, 설사 목적과 방향을 가졌다 하더라도, 시간이 지나며 그것이 무너지고 변화하는 과정에서 처음과는 완전히 다른 방향을 가지게 된다.



비행기 표를 끊고 한동안은 여행에 대해 잊고 지내다가, 바쁜 연말이 지나고 조금 한가해졌을 때 스코틀랜드와 관련된 이런저런 책들을 찾아 읽었다. 《위스키 바이블》, 《스코틀랜드 종교 개혁사》, 《홀리데이 인 스코틀랜드》, 《스코틀랜드 역사 이야기》……. 종교 개혁에 대한 이야기를 읽다보니 예전에 세미나에서 읽었던 막스 베버가 생각나서, 그의 책을 잠시 뒤적이기도 했다. 또 영국 역사가 궁금해져서 《영국 노동계급의 형성》과 같은 책들도 펼쳐 보았다.


영화도 봤다. <브레이브 하트>, <메리 퀸 오브 스코틀랜드>……. 잉글랜드와의 끊이지 않는 갈등, 법망을 피해 가는 밀주(위스키!)의 역사, 역동적인 종교 개혁사, 찾아볼수록 궁금한 것이 많아졌다.


여행을 기다리는 과정에서 왜 하필 스코틀랜드냐, 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얼마든지 생겨날 수 있었다. 스코틀랜드엔 데이비드 흄이 있고, 애덤 스미스가 있고…….



아마도 누군가는 이 모든 것이 거꾸로 되어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여행지를 정할 땐 미리 어떤 목적과 이유가 있고, 그러한 목적과 이유에 따라 여행의 계획이 세워지는, 그리고 그것을 달성하느냐 하지 못했느냐가 여행의 중요한 성패가 되는 그런 여행. 그러나 내 생각에, 여행은 정확히 그것의 반대 방향으로 우리에게 배움을 주는 것 같다. 우리가 도저히 목적하거나 정향하지 못했던 것과의 마주침, 내 일상에선 상상할 수 없던 것들, 길을 잃고 마주하게 되는 뜻하지 않았던 풍경…….


난 막연하게나마 그런 것들을 기대하며 여행길에 올랐다.








▲ 스코틀랜드로의 장장 13시간의 비행









세 개의 언덕



우리는 스코틀랜드에 도착한 뒤로 3일 동안 수도인 에든버러에 머물며 천천히 도시를 둘러보았다. 에든버러, 특히 에든버러의 구 도심은 특별한 목적 없이 걸어도 즐거운 도시이다. 서울처럼 도로가 넓지도, 차가 많지도 않을 뿐더러 200~300년은 된 오래된 건물들과 보도, 골목들이 시간을 품고 아기자기하게 펼쳐져 있어 언제나 눈이 머물 곳이 있다. 걷다 보면 우리가 잘 아는 철학자의 동상을 만나기도 하고, 다양한 역사적 기념비들을 만나 그것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기도 한다.


물론, 어느 곳에든 들어가 낮술을 해도 좋다. 스코틀랜드는 대학생부터 직장인, 백수들까지 온 국민이 즐기는 낮술 문화를 퇴치하기 위해 지난 몇 년간 갖은 비만 예방 캠페인을 벌였음에도 실패하고 있는, 낮술에 최적화된 나라이다.



에든버러에는 또한 도시 어디에서든 눈에 띄는 세 개의 높은 언덕이 있다. 우리는 이후 장장 7일 간의 ‘웨스트 하일랜드 웨이’ 트래킹 ―이후의 글에서 다루게 될 것이다― 을 앞두고 있었기에, 이 세 언덕을 몸풀기 삼아 하나씩 정복(?)해 보기로 했다.



먼저 에든버러 캐슬(Edinburgh Castle)에 올랐다. 영화에서나 볼 것 같은 모습을 한 고성이 도시 중심부의 높은 언덕 위에서 도시 전체를 내려다본다. 에든버러 구 도심에는 안 그래도 오래된 건물들이 많아 마치 과거에 와 있는 것 같은 인상을 주는데, 도시 어디에서든 고개를 들면 보이는 바로 이 성이 그러한 인상에 아주 큰 몫을 한다. 걷기로 치자면 난이도 하(下). 성의 세 면은 가파른 절벽이지만 동쪽으로는 비교적 완만한 경사로 바로 앞 주차장까지 길이 잘 뚫려 있다. 입장료가 좀 비쌌지만 고성 내부는 한국말 오디오 가이드까지 있어서 다양한 이야기들을 만날 수 있었다.


에든버러 캐슬은 유럽 역사상 가장 많은 전투를 치른 성 중 하나이다. 6세기경부터 시작된 외세와의 전투부터 시작해 12세기 잉글랜드의 점령과 탈환, 16~17세기 종교와 왕권을 둘러싼 숱한 전쟁들, 18세기 재커바이트의 독립 투쟁,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에 의한 공중 폭격까지 다양한 형태의 공격을 견디며 더 단단하게 모습을 바꾸고 흔적을 남겨 왔다. 어쩌면 이런 성의 모습이, 같은 영국으로 묶여 있으면서도 자신들을 잉글리시라고 부르면 학을 떼는 스코티시들 특유의 민족적 자부심을 보여 주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동쪽 주차장에서 바라본 에든버러 캐슬. 평일 오전이라 이 정도면 사람이 적은 편이다.






다음은 칼튼 힐(Calton Hill). 여러 국가적 기념비가 모여 있는 이 언덕에는 파르테논 신전처럼 생긴 건축물이 있다. 이는 19세기 초 나폴레옹 전쟁에서 전사한 병사들을 추모하기 위한 기념물이었는데, 예산 부족에 의해 중단되어 파사드만 남았다고 한다. 에든버러를 ‘북쪽의 아테네’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칼튼 힐에서 북쪽으로 내려다보이는 바다와, 이 기념물이 그러한 별명을 증명하듯 보인다.


이 언덕은 높이 약 110m로, 걸어 올라가는 시간은 짧지만 꽤 경사가 있다. 그리 높지 않은 언덕임에도 불구하고 여기에 서서 바라보는 에든버러는 360도로 아름다운 풍경이 이어진다. 마치 온 도시가 나를 향해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이런 풍경은 예술가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미친 듯한데, 대표적으로 스코틀랜드 출신 화가 로버트 바커(Robert Barker, 1739~1806)는 이 언덕에서 보이는 풍경으로부터 영감을 얻어 이후 유럽 전역에 유행한 ‘파노라마’ 화법을 창안했다. 이 화법은 특히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다양한 화가들의 19세기 나폴레옹 전쟁의 전경화에 사용되었다.








▲ 칼튼 힐의 파사드만 남아 있는 내셔널 모뉴먼트







마지막은 전설 속의 아서 왕이 이 지역을 정복한 후에 앉아서 쉬었다는 아서스 시트(Arthur’s Seat)이다. 걷기 난이도 중(中)! 세 언덕 중 가장 높은 이 언덕은 북쪽 바다로부터 거대한 배가 난파되어 내륙으로 들이닥친 것 같은 특이한 모양을 하고 있다. 이런 지형은 무려 3억 5천 년 전의 화산 활동과 이후 빙하기를 거치며 형성된 것이라고 하는데, 도시의 한쪽 면에 우뚝 솟은 특이한 형태의 이 언덕이 도시 전체를 비현실적인 공간처럼 보이도록 한다.


이런 풍경 때문인지 에든버러는 많은 예술가 뿐 아니라 지질학자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특히 에든버러 출신 지질학자인 ‘동일 과정설’을 제시한 제임스 허턴(James Hutton, 1726~1797)이 그 예시이다. 18세기 당시 지질학계는 가끔씩 일어나는 천재지변에 따라 지형과 생물계가 완전히 변화한다는 ‘천변지이설(天變地異說)’이 주도하고 있었다. 이 가설은 대표적으로 공룡의 멸종을 운석의 충돌로 설명한다. 그러나 허턴은 지구가 풍화, 침식, 운반, 퇴적, 암석화, 융기, 풍화……로 이어지는 과정을 아주 느리게 반복한다는 주장을 했다. 그는 일례로 2천 년 전 건설된 로마의 도로가 흔적을 남기고 있는 것을 보고 지금 우리가 보는 지구의 풍경이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정도의, 어쩌면 영원에 가까운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주장은 종교계와 학계에 의해 거친 비난과 비판을 받았는데, 이유는 당시 성경의 표준적 해석으로 받아들여졌던 지구의 나이가 6,000년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죽을 때까지 학계에서 인정을 받지 못했지만, 역시 스코틀랜드 출신의 지질학자 찰스 라이엘(Charles Lyell, 1797~1875) 등 후학들의 노력으로 동일 과정설은 정론이 되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이들이 열어젖힌 새로운 시간적 패러다임의 변화 위에서 다윈과 같은 진화론자 ―그 역시 에든버러에서 잠시나마 의학을 공부했으며, 비글호 여행에서 라이엘의 《지질학 원리》를 읽었다고 전해진다― 가 등장할 수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 칼튼 힐에서 바라본 아서스 시트







특히 세 개의 언덕 중 3억 5천년, 혹은 그보다 더 오랜 시간을 품은 아서스 시트는 나에게도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그런데 그 중에서 나에게 가장 큰 감응을 일으킨 것은 뜬금없지만, 이 언덕 위에서 불어닥치는 ‘바람’이었다.





단 한 번도 맞아 본 적 없는 바람



단 한 번도 맞아본 적 없는 그런 종류의 바람이 이 언덕 위에서 불고 있었다. ‘겨울의 스코틀랜드는 춥다.’, 혹은 ‘바람이 많이 분다.’라는 식의 문장은 책에서 수도 없이 읽었지만, 그것이 이런 종류의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내가 나의 여행을 글로 전하는 것이 어려운 만큼이나, 그들이 이러한 종류의 바람을 그보다 더 자세하게 묘사하기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그럴 필요가 없었던 걸지도― .


4년 전 겨울, 그러고 보니 이번 여행을 하는 친구들과 같이 제주도를 놀러간 적이 있었다. 그때 ‘새별 오름’을 올랐다. 이전까지 내가 기억하는 가장 강력한 바람이었다. 오름 위에서 내려다보이는 비양도와 제주 서남부의 아름다운 풍경에도 불구하고 ‘사진이나 찍고 빨리 내려가고 싶다’는 마음이 들도록 하는 그런 바람이었다.



그런데 이곳의 바람은 차원이 달랐다. 우선 공포였다. 정상을 앞두고 바람이 심상치 않다는 것은 느꼈지만, 정상에 오르니 바람에 몸이 밀려서 고개를 제대로 들기가 어려웠다. 그저 가만히 서 있고자 해도 그렇게 되지가 않았고, 앉거나 엎드려도 계속해서 바람의 영향을 받았다. 뿐만 아니라 고개를 들면 문제는 숨을 쉴 수가 없다는 거였다. 내 얼굴에 뚫린 눈, 코, 입 무능한 다섯 개의 구멍은 밖에서 밀려드는 바람을 막는 데에만 총력을 기울여도 모자랄 판이었다. 그것을 받아들이면 마치 폐나 내장 기관이 바람에 의해 폭발이라도 일어날 것처럼. 어떻게 숨을 쉬어야 하는지 까먹은, 그저 통제를 벗어난 몇 개의 구멍들처럼 움직였다.




안정을 찾기 위해 정상에 있는 돌에 기대어 뒤돌아 앉자, 나와 똑같은 행위를 하고 있는 관광객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은 얼굴만 봐선 관광객인지 로컬인지 알 수 없는 백인이었지만, 관광객이었다. 그들도 그것을 처음 겪은 것이다.


반면 태연하게 개를 데리고 언덕을 올라가던 남자의 모습을 잊을 수 없다. 그 남자가 정상에서 취하는 자연스러운 자세, 그리고 개, 특히 그 개는 너무 작아서 살짝만 헛디뎌도 언덕 아래까지 바람에 날아갈 것 같은데, 개마저 그 바람에 익숙하다는 듯이 자세를 잡았다.



뒤돌아 앉은 나는 관광객들의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이 우스워 웃음이 터졌고, 그들은 나를 볼 만한 여유가 없었다. 웃음이 내 몸의 긴장을 약간 풀어 주었고, 그 무서운 소리와 몸을 밀어내는 힘에 조금씩 적응하여 다시 일어났다.


바람이 오는 방향 쪽으로 몸을 기울여서 균형을 맞춘다. 상체에 힘을 빼 본다. 바람이 내 몸을 어디까지 받아 낼 수 있는지 앞으로 넘어지는 시험을 해 본다. 꽤 오랫동안 받아 내지만 넘어지기는 넘어진다. 내 몸무게가 날아갈 정도는 아니라는 것을 확인한다.


그렇게 하고 나니 에든버러 캐슬과 칼튼 힐에서 본 풍경과는 또 다른 에든버러, 그리고 아름다운 북쪽의 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그 역시 여행자였을 아서왕이 이곳에서 한숨 돌렸던 것은 분명 겨울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곳은 한숨은커녕 매우 통제된 들숨과 날숨을 쉬어야 하는 곳이다. 아니다, 어쩌면 그는 숱한 전쟁을 겪으며 이곳 스코틀랜드의 날씨에 이미 그 신체가 단련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신체에 대하여 생각했다. 칼튼 힐에서 바커는 특수한 시각적 체험을 했다. 우리 눈이 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넘어서는 풍경의 압도적인 현현. 그는 그것을 기존의 화폭을 넘어서는 새로운 형식을 통하여 어떻게든 담아내고 싶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허턴은 자신이 연구하던 지질에 대한 다른 시간적 감각을 이곳 에든버러에서 발견했다(이건 내 추측이다). 이따금의 천재지변으로 만들어질 수 없는 거대한 지형이 그의 눈앞에 펼쳐진 것이다.


“현재는 과거에 대한 열쇠”라는 그의 말처럼, 어쩌면 그에게 수많은 열쇠 중 하나로 다가왔을 아서스 시트와 에든버러 캐슬의 기묘한 언덕. 그리고 그러한 발견들, 달리 말해 배움은 또한 처음엔 내가 바람에 느끼는 것과 같은 일종의 신체적 감응이었을 것이다. 이 풍경이 주는 충격, 공포였을 수도 있고, 아름다움, 혹은 즐거움이었을 수도 있다.








▲ 로버트 바커, 〈Panorama of Edinburgh〉(1792)사진은 그림의 일부이며 원본은 높이만 15m, 길이가 무려 91m라고 한다. © Research Gat







낯섦의 배치



내 신체, 에든버러에 도착한 첫날부터 들떠 있던 나보다 훨씬 더 유난을 떠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내 스마트폰이었다. 걸음의 수를 측정하고 건강 상태를 분석하는 ‘삼성헬스’라는 어플이 푸쉬 알림을 통해 끊임없이 나의 건강에 대한 칭찬을 쏟기 시작했다. 오늘은 12,000걸음을 걸었다느니, 8㎞를 걸었다느니 하는 알림들. 처음에는 그게 뭐 대수인가 싶어 ‘지우기’ 버튼을 눌렀는데, 신경에 거슬려 어플에 접속해 보니 가관이었다. 한국에서 나는 1,500걸음도 걷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니 평소엔 알림을 띄울 이유도 없었던 어플이 10배 가까이 늘어난 걸음의 양에 칭찬을 쏟아낼 만도 하다. 이런 신체로 어떻게 트래킹을 하겠다는 것인지.


아니나 다를까, 여행 며칠이 지나니 정강이 통증이 엄청나게 심해졌다. 고작 10,000걸음이지만, 몇 배로 늘어난 걸음을 다리는 감당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 상태로 겨우겨우 아서스 시트를 올라 무서운 바람을 맞은 저녁부터 바로 콧물과 기침이 시작되었다. 다음 날엔 급기야 열이 나기 시작했다. 이런 더러운(?) 신체, 이 또한 나에게는 새로운 충격이었다.



사실, 이렇게 보면 앞서 이야기한 신체적 감응은 꼭 그것이 여행이어서가 아니라, 그것의 ‘낯섦’ 때문이다. 바람, 감기, 전경골근 통증과 같은 낯섦이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감각을, 사유의 새로운 방향을 열도록 하는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니가 그렇게 걷지 않는다는 걸 꼭 거길 가야 아니?”


“니가 안 걸으니 낯설고 아름다운 것들이 보이지 않지.”


맞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것이 언제나 의지의 문제는 아니다. 그것은 삶이 어떻게 ‘배치’되었는가의 문제이기도 하다. 일상의 배치는 그 힘이 너무나도 강력해서, 낯설게 받아들이려 노력하는 우리를 자꾸만 돌려 놓는다. 집에서 일터로, 혹은 공부방으로 이동하는 짧은 순간에도 수많은 사건들이 벌어질 수 있고 벌어지고 있지만 그 수많은 사건의 거리를 우리는 ‘이동’으로 축소한다. 그렇게 파악해야 일상생활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우리 집이 있는 석운동 역시 에든버러의 언덕처럼 3억 5천년, 혹은 영원에 가까운 시간이 만들어 낸 풍경일 터이지만 우리에게 그것은 풍경이 되지 않는다. 어떻게 모든 것들을 낯설게 받아들이며 살 수 있겠는가. 마찬가지로 어쩌면 아서스 시트에서의 산책이 너무나 자연스러워 보이던 남자와 개에게 이곳은 지독한 일상적 배치일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문제는 어떻게 일상적 배치에 매몰되지 않으며 동시에 그것을 낯설게 할 것인가, 이다. 일상 속에서 너무나 어려워 보이는 그것이 난 역설적으로 일상을 벗어난 여행에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난 에든버러에서도 여전히 나에게 훨씬 익숙한 일상에 맞추어, 익숙한 것을 발견하려고 한다. 내가 읽은 것, 보아온 것, 내가 먹을 줄 아는 것, 이미 겪은 것들을 반복하려고 한다. 그러나 나에게 너무나 빈칸투성이인 에든버러는 나의 그런 배치를 향한 의지를 돌연 꺾어 버린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지는 새로운 리듬은 나에게 익숙했던 한국에서의 일상까지도 다시금 돌아보도록 만드는 것이다.



오래 전에 단순한 흥미를 가지고 고대로부터 이어져오는 기독교의 비밀 결사들에 대한 텍스트를 읽은 적이 있었다.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많은 집단들이 공통적으로 행하는 수행의 방법은 자신의 신체에 고통을 가하는 행위였다. 침이 박힌 벨트로 허리를 묶거나, 채찍으로 자신의 신체를 훼손하거나, 동상이 걸리기 직전까지 얼음을 신체의 특정 부위에 부착한다거나.


너무 오래 전 읽은 책이라 제목도 기억이 안 나고, 어린 나에게 가학적 행위들만 기억에 남았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역시 단순히 금욕적 수행의 극단적 차원을 넘어서 어쩌면 넘기 힘든 일상적 배치를 무너트리는 일종의 방법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들뢰즈 역시 《천개의 고원》에서 일상적 배치를 벗어난 신체, 즉 ‘기관 없는 신체’를 만들기 위하여 마약 중독자들과 마조히스트들이 어떤 ‘절차’를 거치는가를 설명한다. 물론 그는 어떻게 마약 없이도! 인간이 그 경계를 넘나들 수 있을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평범한 인간인 나에게 그것은 한편 고원(高遠)하고 추상적인 일처럼 느껴진다.



다만 우리에게도 그런 절차가 있다. 아마도 책과 여행. 그것이 “꼭 스코틀랜드여야 했는가?”라는 질문에는 여전히 대답할 수 없지만, 나에게는 아서스 시트에서의 바람이 신체를 열도록 하는 일종의 절차, 따귀, 말 그대로 따귀였다. 아직 좀 더 맞아야한다.



참, 그런데 그러고 보니 아직 위스키는 제대로 마셔 보지도 못했다.








▲ 아서스 시트 정상에서 어이 없는 바람을 느끼며 웃고 있는 A









글쓴이 김지원(석운동)




‘석운동’이라는 이름의 작업자로, 가구와 공간을 디자인하고 제작합니다. ‘아젠다 2.0’의 공동 편집자를 맡고 있으며, 올해는 프랑스 철학자 질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을 읽으면서 내 삶과 주변, 세상을 이해해 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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