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실리콘밸리에 이상한 바람이 불고 있다.
'996'이라는 단어가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어서다.
996은 오전 9시 출근, 밤 9시 퇴근, 주 6일 근무를 뜻하는 중국식 초 장시간 노동 방식이다. 알리바바, 바이두, 징둥닷컴 등 중국 빅테크의 성장기를 상징하는 이 문화는 한때 착취적 관행으로 전 세계의 비판을 받았다. 알리바바 창업자 마윈이 "996은 복이다"라고 공개 발언했을 때 중국 개발자들이 거세게 반발했던 것도 이 맥락이다.
(이때 한국은 오히려 다른 방향으로 재택근무, 주 4일제를 채택하는 문화가 확산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미국 스타트업들이 이를 자발적으로 채택하고 있다. AI 스타트업 머커의 CEO 브렌던 푸디는 소셜미디어를 통해 996 동참을 공개 선언했다. "기술 변혁의 정점에서 시장을 선점하려면 치열한 시간 투입은 불가피하다"는 논리와 함께.
AI가 우리를 노동으로 부터 해방시켜줄 것이라 믿었다. 그런데 왜 나를 포함한 우리는 더 오래 일하고 있는 걸까.
"효율이 올라갈수록 수요도 따라 올라간다"
19세기 경제학자 윌리엄 스탠리 제번스는 이상한 현상을 발견했다. 증기기관의 효율이 높아지면 석탄 소비가 줄어들 것이라 예상했지만, 실제로는 반대였다. 효율이 오르자 더 많은 산업이 증기기관을 도입했고, 전체 석탄 소비는 폭발적으로 늘었다. 이를 '제본스의 역설'이라 부른다.
AI 시대의 노동이 꼭 그렇다.
한국은행 조사에 따르면, 국내 근로자 50% 이상이 AI를 도입해 평균 3.8%의 업무 시간을 줄였다고 한다. 하지만 그 절감된 시간은 퇴근을 앞당기지 않았다. 더 많은 보고서, 더 잦은 업데이트, 더 복잡한 요구사항을 처리하는 데 재흡수됐다.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HBR) 연구도 같은 결론이다.
내가 최근에 경험하게 되는 사항으로, AI를 쓰면 쓸 수록 이전에는 포기했을 일까지 해결하기 시작하고 나중에는 그 업무마저 스스로 떠맡기 시작했다.
앱 개발이 3주에서 1주로 단축되는 순간, 나머지 2주는 새로운 앱 2개로 채워진다. 보고서가 1주에 1개씩 나오던것들이, 이제 매일 1개씩 나오는게 당연하게 된다.
"나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를 착취한다"
철학자 한병철은 저서 『피로사회』에서 현대를 '성과사회'라 불렀다. 과거의 사회가 "~해서는 안 된다"는 규율과 금지의 사회였다면, 오늘의 사회는 "~할 수 있다"는 긍정의 과잉이 지배한다. 이 체제 아래서 인간은 외부의 강압이 아니라, 스스로 더 나은 성과를 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린다.
AI는 이 성과사회의 가장 강력한 엔진이 됐다.
"AI를 쓰면 더 많이, 더 빨리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은 역설적으로 그 가능성을 실현하지 못했을 때의 불안과 죄책감을 만들어낸다. 상사가 강요하는 게 아니다. 스스로를 착취하며 "더 할 수 있는데 왜 안 하지?"라고 채찍질한다. 한병철이 말한 '자발적 자기 착취'다.
"AI는 인간에게 효율성을 가져다 주었지만,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지는 않았다"
1차 산업혁명 당시, 방적기와 증기기관은 고된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을 약속했다. 현실은 달랐다. 공장주들은 비싼 기계를 멈출 수 없다는 이유로 노동자들에게 하루 14~16시간 노동을 강요했다. 아동 노동이 만연했고, 기술의 진보는 자본가의 이익으로만 흘렀다.
AI가 모든 걸 대체하면 인간은 일하지 않아도 된다고들 말한다. 과연 과거 역사적 사실을 볼때 그렇게 될 수 있을까?
(AI로 인해 할 수 있는게 많아져서 쓰는글이 아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