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敍)는 펼친다는 뜻이다.
서정(敍情)은 감정과 감각을,
서사(敍事)는 사건 혹은 사실을 펼치는 것이다.
문학이나 영화와 같은 예술작품이 서정과 서사를 담듯, 기업과 브랜드도 서정과 서사를 담는다. 서정은 브랜드가 전달하는 감각과 느낌, 감정과 정서다. 서사는 브랜드가 전하는 자취와 스토리다.
1. 서정
같은 서사를 가졌지만 다른 서정을 전달하는 두 작품을 비교해보면 서정의 힘을 알 수 있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 <올드보이>(2003)와 할리우드의 리메이크작 <old boy>(2013)가 그런 경우다.
원작 <올드보이> 에서는 (1)산발의 오두식(최민식)이 (2)산낙지를 (3)생으로 씹어 삼킨다. 반면 리메이크작은 (1)반삭의 조 두셋(조슈 브롤린)이 (2)수족관의 문어를 그저 (3)바라보기만 한다. 서로 다른 장치의 배열과 결합은 두 올드보이의 느낌과 정서를 전혀 다르게 만든다. 같은 이야기의 두 영화를 전혀 다른 감각과 느낌을 가진 영화로 만드는 것이 서정의 문법이고 힘이다.
브랜드의 서정도 예술 작품의 서정과 같은 문법을 따른다. 브랜드는 소비자와의 거의 모든 접점에 존재하는 도구와 소품, 장치를 사용해 온갖 은유와 상징으로 브랜드의 서정을 빚어낸다. 서정의 장치는 제품과 브랜드의 이름, 대표 색상, 디자인, 글씨체, 로고, 굿즈, 캐릭터, 미디어에 노출되는 창업자(또는 CEO)의 외모와 성격, 주요 제품의 질감과 양감 및 맛과 향, 광고모델, 광고의 콘텐츠 및 영상과 음악, 매장의 조명과 인테리어 및 배경음악, 주 사용자 그룹, 직원들의 복장 등 셀 수 없이 많고 다양하다.
2. 서사
서사의 힘을 가장 잘 보여주는 브랜드는 애플과 테슬라다. 두 기업 모두 스티브 잡스와 일런 머스크라는 강력한(compelling) 서사가 두 브랜드를 호소력 있게 만든다. 애플과 테슬라는 서정 자체도 뛰어나지만, 특히 두 창업자의 서사는 그 자체로 경쟁 업체들의 서정을 강하게 압도한다. 삼성이나 포드가 광고를 섬세하고 감각적으로 해도 비슷한 aura가 나오진 않는다. 포장을 통해 만들어진 허구의 상(像)은 아무리 화려해도 순도 높은 리얼리티를 압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서사의 경쟁력은 모방 불가능성에 있다. 서정은 어느정도 모방이 가능하지만 서사는 모방이 불가능하다. 서사는 고유한 공간적, 시간적 맥락 속에서 탄생하기 때문에 완벽한 재현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JAJU가 무인양품의 서정을 모방하고, 샤오미의 CEO 레이쥔이 스티브 잡스와 같이 검은색 폴라티와 청바지를 입고 프리젠테이션을 하더라도 이는 겉으로 보이는 서정의 일부만을 차용한 것이요, 고유한 맥락과 정신, 철학이 담긴 서사를 차용하진 못했기 때문에 서사(Originality)가 부재한 속 빈 서정이 된다.
같은 맥락에서 창업자의 진솔한 스토리는 자원이 부족한 스타트업의 가장 훌륭한 마케팅 자원이 된다. 진정성과 진실성은 감각이 아니라 스토리의 영역이고, 창업자(혹은 창업팀)의 스토리야말로 제품과 서비스의 진정성과 진실성을 가장 잘 설명하기 때문이다.
창업자의 블로그 글, 창업 스토리, 언론에 조명된 창업자의 서사, 기업 철학과 정책, CSR 이슈 등 SNS와 미디어에 노출되는 기업과 브랜드에 관련된 모든 영향력 있는 스토리들은 기업과 브랜드의 서사를 구성하는 질료가 된다. 탐스슈즈처럼 마케팅 정책이 서사를 이루기도 하며, 대한항공과 삼성증권 사례와 같은 사건 사고도 임팩트가 큰 서사가 된다.
3. 서정의 문맥과 서사의 문맥의 차이
서정은 오랜 시간을 거친 철저한 연구와 학습, 실험, 설계와 디자인의 결과물이다. 기업은 오랜 고민을 담아 그들이 추구하는 정신과 철학, 감각을 브랜드의 느낌과 감각, 감정과 정서에 투영하기 위해 노력한다. 시장과의 상호작용의 과정을 거치지만 서정은 철저한 디자인과 설계, 꾸밈의 영역이다.
반면 서사는 대체로 리얼리티의 문맥 위에 있다. 일종의 실시간 시스템(real-time system)이다. 영향력 있는 사건은 다수의 매체에 의해 다뤄지므로 조작이나 수정은 거의 불가능하고, 통제 불가능한 경우들이 많다.
서사는 기업의 기획과 의도에 의해서도 만들어지지만, 뻔한 의도가 드러날수록 오히려 임팩트는 떨어져 쉽게 서사로 받아들여지기 힘들다. 자연스러움과 진실됨에 서사의 묘가 있기 때문이다. LG의 소극적인 마케팅 이야기, 계약직이 애초에 없었다는 오뚜기의 일화 등은 의도되지 않았던 서사였기에 오히려 파급력이 있었다.
4. 서정의 매트릭스에 균열이 생기는 순간
늘 달달했던 초콜릿이 쓴 맛으로 느껴지기 시작했던 시점은 초콜릿 생산을 위해 아프리카에서 벌어지는 아동 노동 착취 다큐멘터리를 보게 됐을 때다.
이때 깨달았던 것은 감각이 인식(스토리)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이다. 내가 소비하는 이 제품을 어떤 사람들이 만들고 있으며, 어떤 환경에서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 제품인가하는 스토리가 감각에 분명한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기업과 브랜드의 서사가 서정에 힘을 미치는 지점은 여기에 있다. 아이스크림 브랜드 백미당이 갑질로 유명한 남양유업의 브랜드인줄 알고 먹는 것과 모르고 먹는 것에는 맛에 큰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브랜드가 오랜 시간 공들여 디자인한 완벽한 감각의 매트릭스에 작은 균열을 만드는 것은 바뀐 포장지, 새로 출시된 굿즈 같은 어떤 서정의 장치가 아니다. 브랜드가 보여주는 서정의 기법은 크게 발전했고 브랜드가 트렌드를 읽는 눈은 어느 때보다 정확하다. 화려하고 감각적인 마케팅의 시대에 서정의 트릭이 어긋나는 경우는 많지 않다. 서정의 매트릭스를 깨는 작은 균열은 바로 서사에서 온다.
늘 좋은 분위기와 심리적 편안함을 제공했던 스타벅스의 공간에서 미국 소비자들이 지난 며칠 심리적 불편함과 찜찜함을 느꼈다면, 그것은 미국 내 스타벅스의 인종차별의 뉴스 때문이지 스타벅스 매장이 담고 있는 감각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이후 스타벅스는 모든 매장의 문을 닫고 직원 교육을 실시함으로써 진정성을 보여줬다.) 당신이 이제 콘텐츠 플랫폼 Sellev를 구독하기를 중지한다면 이는 그들이 좋은 콘텐츠를 전달하는 감각이 떨어져서가 아니라 당신이 그들의 "갑질" 스토리를 알게 됐기 때문이다.
물질적 장치 위에 훌륭하게 설계된 브랜드의 색(色)이 공(空)이 되는 순간은 서사가 서정을 완전히 깨트렸을 때 온다. 대한항공은 매년 수십억 원의 광고 예산을 집행했지만, 이들이 그동안 쌓아 올린 감각의 색은 최근에 밝혀진 일련의 사건들로 무너졌다. 이제 대한항공을 생각했을 때 여행의 낭만과 설렘의 서정을 떠올리는 사람은 많지 않다. 서정의 매트릭스는 서사에 의해 깨지곤 한다.
5. 서정과 서사의 역학을 보여주는 몇 가지 사례
5.1 일제강점기의 두 문인 이광수와 윤동주는 모두 빼어났다. 그러나 이광수의 서정은 그의 친일 서사에 의해 진정성을 잃고 대중들에게 거의 전해지지 않는다. 반면 윤동주의 서정은 그의 서사로 더 큰 울림과 진정성을 갖는다.
5.2 사람은 초라한 옷차림과 외모를 가진 사람보다 매끈한 옷차림에 뛰어난 외모를 가진 사람을 좋아한다. 그런데 옷차림과 외모가 좋지 않아도 그의 말과 행동, 됨됨이로 그의 기품(aura)을 보여주는 사람이 있다. 훌륭한 서사는 그 자체로 서정을 빚어낸다.
5.3 두산그룹의 "사람이 미래다"는 감각적이면서도 공허한 슬로건이다. 잘 기획된 좋은 서정이 서사로 인해 허무하게 무너진 대표 사례.
6. 공(空)과 공(悾)의 경계
서정은 브랜드에 중요하다. 사람은 감성적, 감정적 존재다. 좋은 감각을 추구하며 좋은 감각을 위해 소비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많은 소비활동은 각자가 추구하는 좋은 감각과 느낌, 즉 각자가 추구하는 색(色)에 대한 소비로 이뤄진다.
하지만 감각, 즉 색(色)이라는 것은 분명 허무함(空)의 속성이 있다. 어떤 작은 이격과 이질감을 느끼는 순간 쉽게 깨지는 것이 색의 매트릭스다. 겉모습(色)을 보고 호감을 느꼈다가 시쳇말로 "깼던"(空) 경험은 누구나 있지 않을까. 감각의 허무함을 느끼는 순간은 서사가 품는 진실성과 진정성을 대면했을 때다.
서사는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진실되게 알고 싶다면 당신이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돌아보면 된다. 기업과 브랜드가 진정 평가되는 때 또한 서사를 마주했을 때다.
空은 공허함, 허무함을 의미하지만, 空에 마음( 忄) 이 합해지면 진심과 정성을 뜻하는 悾이 된다. 空과 悾의 경계에는 心이 있다. 감각은 분명 空의 속성이 있다. 空이 心이 없는 서사와 결합할 때 서정은 空의 양상이 된다. 대한항공과 두산그룹, 이광수의 서정이 그러했다. 그러나 空이 心이 있는 서사와 결합하면 서정은 悾(진심과 정성)이 된다. 오뚜기, 테슬라, 윤동주의 서정이 그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