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무엇이 당신을 살게 하나요?

by 설빈

*교보교육재단 소식지 「참사람 36.5도」 2026년 3월호에 게재된 글입니다.



안녕하세요? 어디에선가 우연히 이 글을 읽게 될, 이름 모를 당신께 인사를 건넵니다.

저는 설빈이라고 합니다. 포크 듀오 ‘여유와 설빈’의 멤버이자 10년차 상담교사입니다.


저는 제주에서 8년간 중·고등학생들을 만나다가, 작년부터는 대학교 상담센터에서 청년들을 만나고 있습니다. 최근 이곳에서 교사를 꿈꾸는 대학생들과 함께 ‘자살 위기 학생 상담하기’라는 주제로 교육 활동을 진행했어요. 어렵고 무거운 주제인 만큼, 교육을 준비하며 그동안 제가 만났던 아이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떠올려 보았습니다.


학교 현장에서 죽음의 끝자락에 제 발로 성큼 걸어가 있는 아이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죽고 싶은데 옥상 문이 잠겨 있어 그 앞에 주저앉은 아이를 겨우 달래 상담실로 데려오기도 했고요. 청소년기가 가장 예측 불가하고 역동적인 시기라고 하지요? 아이들이 마음을 먹었을 때의 그 무서운 추진력은 상담자로서 가장 두려운 장면이 되기도 해요.


아이들이 죽음을 말할 때는 이유가 그리 길지 않았습니다. 학교에서 힘들어서, 집에서 힘들어서, 이런 내가 못나서. 멀찍이서 바라볼 때는 그 정도인가 싶어도, 막상 아이들의 세계로 들어가보면 그것이 삶의 전부여서 저도 함께 압도되기도 했습니다. 앞으로 한 발자국도 떼지 못할 만큼 삶을 짓누르는 자괴감, 무력감, 답답함으로 가득한 세상이었지요.


삶의 무게로 인해 눈빛이 희끄무레해 보이던 한 아이가, 한날은 제게 와서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백은별 작가라고 중학생 소설가가 있다며 운을 떼더니 ‘저도 글을 써보고 싶어요.’ 하며 작게 끝맺는 겁니다. 자기 처지를 늘 비관하다가 내 삶의 모습도 누군가에게 위로가 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춥고 축축하고 깜깜한 동굴 속에서 손에 여린 촛불 하나가 쥐어지는 듯, 저희 둘은 그 아이에게서 피어난 작은 소망에 감동하며 눈물을 흘렸더랬어요.


생각해 보면 죽음의 문턱까지 가지 않더라도 우리 삶의 허들은 참 많습니다. 학창 시절에는 학생의 역할에, 사회에 나와서는 직업인으로서의 과업을 충실해야 하죠. 가정을 꾸리고 나면 끝없는 돌봄의 굴레가 이어집니다. 산 하나를 넘으면 더 큰 산이 눈앞에 떡하니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저는 글을 쓰고 싶다던 아이의 눈빛을 떠올리며, 대학생들과 ‘삶의 여러 난관에도 불구하고 내 삶을 지탱해주는 것들’을 적어 보는 활동을 했습니다. ‘삶의 수레바퀴’라고도 하는, 원 안에 나를 버티게 하는 요소들을 채워 넣는 활동입니다. 청년들이 적어 내려간 소중한 조각들을 잠시 구경해보실까요?


·나를 믿어주는 가족

·반려동물. 힘들 때 OO를 꼭 끌어안고 있기

·자켓 안주머니에 늘 넣고 다니는 책 「데미안」의 한 구절

·포기하지 않는 마음

·하겠다고 마음 먹으면 불도저 같은 추진력

·숨 고르기

·명탐정 코난을 보며 추리하기

·깨끗한 방과 정리된 책상

·하루의 시작에 정신을 번뜩 차리게 해주는 찬물 샤워

·오늘 뭐 먹지? 엽떡! 먹을 거 생각하고 맛난 음식 먹기

·에릭 사티의 피아노 연주곡
·기도와 묵상


수레바퀴는 저마다 다른 모양으로 자신만의 속도와 리듬을 그리며 굴러가고 있었습니다. 가족이 수레바퀴의 전부인 사람도 있었고, 자신만의 취향과 루틴으로 수레바퀴를 가득 채운 사람도 있었어요.


나를 울린 책 속 한 구절, 반려동물의 온기, 만화의 명장면이나 찬물 샤워. 우리를 버티게 하는 건 거대한 성취보다 이토록 작고 소중한 것들일지도 모릅니다. 살아야 할 이유를 못 찾아 헤매는 순간에도, 떡볶이의 매콤함이나 노랫소리에 기대어 숨을 쉽니다. 이 조각들이 모여 우리를 지금 이 자리까지 데려다주었고, 다시 큰 산을 향해 걸어갈 용기를 주지요.


저는 제 삶의 한 시절을 지탱해 준 문장을 덧붙이고 싶습니다. 여유가 작사·작곡한 ‘밤하늘의 별들처럼’이라는 곡의 한 소절입니다.


밤하늘의 별들처럼 밝지 않아도 바람 부는 날의 촛불처럼 난 살아있네
이젠 바다로 가는 강물처럼 맑지 않아도 흔들리는 날의 눈물처럼 삶은 흐르네


내 삶이 늘 또렷하지도, 늘 마음에 드는 것도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살아 있고 삶이 흐르고 있다는 사실. 살아 있다는 그 자체만으로 세상이라는 큰 흐름 속에 존재하고 있음을 느끼는 감각이 저를 가만히 붙들어주곤 했습니다.


거센 바람에 촛불이 흔들리면 불이 꺼질까 두렵기도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 흔들림은 불꽃이 아직 살아있다는 가장 뜨거운 증거이기도 합니다. 당신이 휘청이며 흘리는 눈물 또한 당신이 삶을 포기하지 않고 흐르고 있다는 가장 솔직한 증명이 되지요.


이 글을 읽으시는 당신께도 여쭤보고 싶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무엇이 당신을 살게 하나요?

작가의 이전글때로는 대사와 몸짓을 실수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