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대리는 나와 단둘이서만 치맥을 한다는 사실에 약간 상기된 표정이다. 아침 출근 때는 매끈했던 최대리의 턱엔 어느덧 수염이 올라와 파르스름 했다. 동화 속 푸른수염은 무서운 존재인데 최대리의 푸른수염에선 공포라고는 한올도 느껴지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 팔을 뻗어 손가락으로 최대리의 턱을 스윽 만졌다. 최대리는 흠칫 놀랐다가, 확장된 홍채가 아련해지고 있었다. 예상했던 것보다 촉감이 부드러워 나도 놀랐다. 까끌거릴줄 알았는데.
최대리를 모텔까지 데리고 가는 건 껌이지. 나는 이 방면에선 100전 100승, 가능성이 없는 상대는 꼬시지 않는다는 것이 나의 룰이다. 치맥 후 최대리와 모텔에 간다면 사무실에 남은 남자는 일주일 전에 입사한 인턴사원 하나. 하지만 인턴까지는 차례가 가지 않을 테다. 나는 내일 사직서를 낼 예정이라서. 작성까지 끝내 이미 가방 안에 들어있다. 출근해 제출만 하면 이 회사와도 바이바이. 같은 사무실 남자들과의 모텔 순례도 바이바이.
사실 최대리까지 갈 생각은 없었다. 그는 뭐랄까 21세기엔 어울리지 않는 진심이 장착된 인류 같았거든. 기념비적인 존재를 보존하고 싶은 인류애랄까. 물론 최대리가 나를 몰래몰래 훔쳐보고 있다는 거야 진즉 눈치채고 있었지만. 하긴 그런 눈빛으로 바라보는데 어떻게 몰라.
치킨집을 나와 그 동네 모텔이 어디 있나 찾으려고 두리번 거리는데 최대리가 묻는다.
댁이 어디시지요?
응?
카카오택시를 부르려고요.
(고작 저녁 8시 15분인데? 날 집에 보내겠다고?)
이차 안 가나? 그리고 아직 지하철도 다니잖아.
지하철이 빠를까요? 그럼 지하철로 댁까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어조가 단호하다. 나보다 세 살 위인 그에게 나는 말을 짧게 하지만 그는 내게 깍듯하다. 이상한 남자야 정말. 요새 누가 여자를 집까지 바래다준담. 나와 모텔을 갔던 남자 중 어느 한 명도 나를 집까지 바래다 준 적이 없거늘. 아, 뭐, 그들에게 정확한 내 집 위치를 알려주고싶지 않았던 마음도 컸다. 모텔을 나서기 전 스마트폰 어플로 자동결제 택시를 불러 준 남자가 있었고, 지갑에서 지폐를 꺼내 택시 타고 가라는 남자는 있었다. 생글생글한 미소로 그들의 호의를 받아들였다. 나는 친절한 윤아씨니까.
그 시간의 강남역 지하철 안은 제법 한산했다. 그는 나를 좌석에 앉히고 자리가 있는데도 굳이 내 앞에 서있다. 내 치마가 엄청 짧아서일까? 사무실에 남은 마지막 남자(인턴은 제외) 최대리를 꼬실 작정으로 내가 가진 치마 중 가장 짧은 걸 입었다. 내 앞에 선 그는 차창 밖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지하철 안에서 창 밖 풍경에만 시선을 고정하고 있다.
진짜로 날 집까지 바래다 줄 작정인가 보다. 어떻하지? 내 집 근처엔 모텔이 없다고.
다 왔어. 여기가 우리집.
얼른 들어가세요. 그럼 내일 사무실에서 뵐게요.
203동 아파트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가 엘리베이터에 타는 대신 계단을 오른다. 계단 창문에서 성큼성큼 걸어가는 최대리의 모습이 보인다. 순한 등짝이다. 오늘 밤 넌 내게 1패의 굴욕을 줬어. 가방에서 사직서를 꺼내 반으로 찢는다. 최대리가 '내일' 사무실에서 보자고 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