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세상

인생은 고통일 수 밖에 없다.

by 서고독

저의 두번째 책의 첫 챕터 입니다.


[인간 세상]


우리의 사회는, 정보와 정보가 만나 또 다른 정보로 태어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서로를 향해 손을 내밀며 연결되고, 그 연결은 마치 뿌리가 땅속 깊이 퍼져나가듯 넓고 촘촘해집니다.


성장은 더 이상 완만한 기울기의 선이 아닌, 가속이 쌓이고 쌓여 기하급수적으로 발전하며 변해갑니다.


정보가 끝없이 연결되고 확장되는 모습은, 어쩐지 인간의 뇌 구조를 닮아 있는 듯합니다.
아마도, 이 모든 것이 인간의 세계이기에 가능한 일일 겁니다.
우리가 인식하는 방식 그대로, 세상 또한 우리를 닮아 확장되어 가는 것이겠지요.


이처럼 ‘무한’이라는 말은, 인간을 설명하기에 참 어울리는 단어입니다. 우리의 의식은 언제나 켜져 있는 등불처럼 꺼지지 않고,


상상력과 인지의 구조 또한 끝이 없습니다.
그 무한함은 인간의 본질적인 능력이자, 우리를 이루는 중요한 일부라 할 수 있겠지요.


그리고 그 무한함은, 결국 ‘자유’라는 개념으로 이어집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무한함을 본질로 받아들이기보다는, 그 안에서 욕심내고 고통받으며 스스로 만들어낸 무한함에 종속되어 살아가곤 합니다.


자유가 허락한 가능성은 곧 욕망이 되었고, 그 욕망은 나를 돌아보기보다는 늘 눈앞의 세상만을 좇게 만듭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것은 결국 ‘자극’이 됩니다. 그 자극은 마치, 우리의 무한함을 채워줄 무언가처럼 다가오지만, 무한한 것에 무엇을 더해도 여전히 무한하듯, 우리는 끝없이 또 다른 자극만을 찾아 헤매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것은 어쩌면, 피할 수 없는 필연일지도 모릅니다. 이처럼, 인간은 본래, 빠르고 많으며 다양한 것을 자연스레 추구하도록 구조되어 있습니다.


새로운 자극은 우리의 무한함 속에 스며들어 곧 익숙함이 되고, 당연한 것이 되어버립니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무한함의 원동력’에 이끌려 또 다른 어딘가로 향하게 되겠지요.


만약 우리가 이러한 인간의 특성을 모른 채 살아간다면, 우리는 끝없이 앞만 바라보며 달려야 하는 운명 속에 놓이게 될 것입니다.


무한함은 분명 인간의 강력한 동력이지만, 매 순간 무언가를 잡아내는 방식으로는 결코 그 무한함을 채울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지금 무엇을 손에 쥐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다음에 무엇을 또 쥐어야 할지를 고민하게 되고, 그 사이에서 불안과 걱정에 휩싸이게 됩니다.


결국 우리는 충족되지 않는 무한함 속에서 헤매며 살아가고, 그래서 인생은 고통이라고도 말하는 것이겠지요.


인간 사회의 발전과 그 놀라운 속도는, 결국 우리가 스스로를 모른다는 불안과, 불확실한 세상 속에서 더 확실하고 안정된 무언가를 만들고자 하는 몸부림의 결과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많은 이들이 겉으론 충분히 살기 좋은 시대라 말하지만, 정작 자신의 삶은 어딘가 많이 부족하다고 느낄 겁니다.

무한한 것에 무엇을 더해도 여전히 무한한 것처럼, 아무리 편리하고 효율적인 사회가 도래하더라도, 우리는 결코 완전한 만족에 도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자각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인간은 본래 무한한 존재이기에, 그 무한함을 더 확장할 방법을 스스로 찾아내려 했고, 결국 찾아냈습니다. 그것이 바로, 더 쉽고 빠르게 우리를 자극할 수 있는 기술 — 인터넷과 휴대폰 같은 도구들입니다.


정보가 정보와 만나 새로운 확장을 만들어내듯, 이제는 사람과 사람도 더욱 가까이 만나며 또 다른 형태의 무한함이 태어나고 맙니다.


세계 인류가 가까이 머물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타인과 세상을 더 빠르고 깊게 접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는 손쉽게 전화를 걸고, 채팅을 나누며, 끝없는 인터넷 기사와 정보를 마주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세상 속에 살고 있는 것이죠.


기술은 앞으로도 더욱 빠르게 발전할 것이고, 나와는 다른 타인들은 점점 더 가까이, 더 깊숙이 우리의 일상 속으로 스며들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무한함’속에서 고통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로 놓입니다.



정보와 타인으로 이루어진 세상이 많아지고 복잡해질수록, 우리는 오히려 그 안에서 더 큰 흥미를 느끼게 됩니다. 그렇게 세상은 곧 ‘자극’이 되고, 우리는 그 자극 속에서 또다시 움직입니다.


무한함 속에서 피어나는 불확실과 걱정은 점점 더 커져만 가고, 우리는 그 불안을 달래기 위해, 더 강한 자극을 끊임없이 찾아 헤매게 되겠지요.


무한함에 굴레에 빠지고 마는 우리들입니다.


좋은 차, 좋은 집, 좋은 직업, 좋은 옷까지—
예전 같으면 평생 알지 못했을 ‘먼’ 세계의 것들 것 우리는 이제 단 한 번의 클릭으로, 아주 쉽고 빠르게 마주합니다.

그것은 마치 내가 직접 체험하고 있는 듯한 착각을 줄 만큼, 매체는 우리에게 생생하게 타인의 삶을 보여줍니다.


나와는 한참 먼 세상에 있는 부자가, 좋은 차를 타고 값비싼 음식을 즐기는 모습을 우리는 아주 손쉽게, 마치 곁에서 함께하고 있는 것처럼 지켜보고 체험할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인간이 지닌 무한함이 끝없이 펼쳐지는 세상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온 세상이 자극으로 가득하다 보니, 정작 ‘나’라는 무한한 존재에는 관심을 두지 못한 채, 눈앞에 보이는 것들에 더 쉽게 이끌리고, 더 강하게 반응하게 됩니다. 결국 인간 사회는, 점점 더 스스로를 알지 못한 채, 자신에게서 멀어져만 가겠지요.


우리의 자식들, 그리고 그들의 자식들 역시 점점 더 빠르게 자극만을 좇게 될 것입니다. 그 흐름 속에서, 자신을 잃어가는 건 어쩌면 피할 수 없는 일인지도 모릅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 사회가 맞이하고 있는 하나의 운명입니다.


요즘 매체를 들여다보면,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감각을 자극하는 것들이 유독 큰 인기를 끌고 있는 듯합니다.


격투기, 음식, 캠핑, 자연… 그리고 인간의 한계를 시험하는 ‘100시간 동안 잠자지 않기’ 같은 콘텐츠들 말이죠.



인간의 근원적인 무언가를 건드리는 자극은, 언제나 아주 친밀하고 깊숙하게 우리 안으로 스며듭니다.


그것은 곧, ‘존재’라는 본질을 흔드는 것이지요. 함께 나누는 한 끼의 밥, 우리 곁의 자연, 그리고 생존의 본능이 느껴지는 격투 같은 것들이 대표적입니다.


‘존재’를 드러내는 것은 언제나 매혹적입니다. 그런데 요즘처럼, 사회 전반이 더 근원적인 것에 빠져드는 모습을 보면, 사람들 마음속 어딘가엔 원초적인 자신의 모습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자리하고 있는 듯합니다.


어쩌면, 지금의 자신이 본래의 ‘나’로부터 멀어져 있다는 것을 스스로도 알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화려하고 예쁜 것들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기엔, 이제는 조금 버거운 시대가 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람들은 너무 오래 보여주고, 꾸미고, 겉을 치장하는 일에 지쳐버린 듯 보입니다. 그래서인지, 점점 겉보다 그 안의 '속', 곧 근원을 보여주는 매체에 더 마음이 끌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에 자연히 끌리고 있는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들에 대해 점점 더 냉정하게 평가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특히 ‘인간성’, ‘법’, ‘태도’처럼 삶의 근간을 이루는 근원적인 요소들에 대해서는 더욱 민감해질 것입니다.


그 이유는, 어쩌면 우리 스스로가 그 근원으로부터 점점 멀어졌고, 그 거리가 결국 우리 안의 결핍으로 자리 잡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스스로의 존재에 대해 깊이 갈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을 온전히 알 수 없기에, 눈에 보이는 것들을 곧 ‘나’라 여기며 그것을 쫓고, 편향된 기준 속에서 쉽게 평가하고 마는 것이죠.


그리고 그 평가의 화살은 결국 자신에게도 향하게 됩니다. 스스로를 판단하고 단정지으려는 그 순간, 우리는 더욱 본래의 근원으로부터 멀어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셈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가 빠르게 흘러가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하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인간 사회는 언제나 그랬습니다.


모든 시대의 사람들은 늘 바깥을 바라보며 살아왔고, 그 흐름 속에서 지금의 인류는 이토록 발전해온 것이겠지요.


우리는 본능적으로 불안하기에, 보이는 것을 쫓고, 서로를 비교하며, 경쟁하지 않을 수 없는 존재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것이 인간 세상의 원동력이라면, 우리 역시 그것을 겸허히 받아들여야겠지요. 우리는 본래, 스스로를 완전히 알 수 없는 구조를 지닌 존재이고,


그 한계를 하나의 ‘운명’으로 받아들인다면, 조금은 덜 아프게, 이 삶을 살아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꼭 전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당신이 불확실함과 불안함 때문에 쫓고 있는 그 ‘성장’과 ‘발전’이라는 것이, 어쩌면 당신을 점점 더 자신에게서 멀어지게 하고, 소중한 것들을 잃게 하며, 결국 고통을 만들어내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것이 인류의 원동력이라면, 부정할 수 없는 부분일지도 모르겠지만 그 길 위에서, 조금은 덜 고통받으며 나아가셨으면 합니다.


이제는 잠시 쉬어가도 된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멈추는 법을 알아야, 비로소 온 힘을 다해 나아갈 수도 있는 법이니까요.
머무름은 결코 나약함이 아니라, 다시 걷기 위한 가장 깊은 준비일지도 모릅니다.


요즘은, 모두가 허리춤에 작고 큰 칼 하나쯤은 차고 살아가는 듯합니다.


어떤 이의 칼은 너무 커서, 그 무게가 버겁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요.


그 칼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애써 칼집 속에 감추려다, 결국 자신을 찔러 피를 흘리며 고통을 겪기도 합니다.


또 어떤 이의 칼은 작지만, 그 날이 너무나도 날카로워 단 한 번의 움직임으로도 치명적인 상처를 남길 수 있습니다.

다들 자신의 칼을 감추려 애쓰면서도, 불안함 속에서 확실한 무기를 지닌 듯 살아갑니다.


어쩌면 우리는, 자신을 마주하지 못한 불안감 속에서 누구나 세상을 향해 휘두를 수 있는 검 하나쯤은 꼭 쥐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같은 색과 모양의 칼을 가진 이를 만나면 그 칼을 자랑하기도 하고, 때론 비교하며 더 큰 칼을 만들기도 하니까요.


몸에 칼을 지니고 있다는 건, 이 세상이 그만큼 불안하다는 증거입니다.


총을 가진 이가 가장 안전할 것처럼 보일지라도, 실제로는 언제든 총을 꺼내야 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 가장 불안한 삶을 살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의 고통 또한 결국 내 손에 쥐고 있던 칼에 스스로 베인 상처에서 비롯된 것일지 모릅니다.


칼이 사라지면, 칼집도 더는 필요 없게 됩니다. 그때서야 우리는 비로소, 있는 그대로의 삶을 살아낼 수 있겠지요.


모두가 더 이상 칼도 칼집도 필요하지 않은,
그런 고요하고도 평화로운 세상을 맞이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작가의 이전글이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