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도 여느 때와 같은 밤이었다.
남편은 밤새 진통제를 찾았고, 겨우 4시간을 버텨 진통제를 맞고 잠시 잠이 들어 있었다.
멍하니 넋을 놓고 앉아 있는데, 처음 이 병원에 왔을 때 들었던 여러 명의 발자국이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머릿속에서 자체 배경음악이 재생됐다.
‘빰빰 빠바밤-‘
하얀 거탑의 OST였다.
“설상호 환자분” 이름을 부르는 동시에 커튼이 경쾌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정형외과 김교수님이었다.
하마터면 손을 덥석 잡을 뻔했다.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른다.
“내일은 이틀 후 진행할 수술에 대비해 검사를 진행할 거예요.”
“우리 월요일 수술실에서 봅시다. 조금만 힘내세요.”
살며시 어깨를 두드리고 순식간에 사라지셨다.
정말 거짓말처럼 힘이 났다.
이제, 우리는 살았다.
“보호자분 잠시 저 좀 밖에서 뵐까요?”
파란색 옷을 입은 레지던트로 보이는 사람을 따라갔다.
며칠 전, 남편과 나는 응급병동에서 4일을 보낸 후, 혈액종양내과 입원실로 옮겼다.
12층 병동 안으로 들어가면 정면에 간호스테이션이 있고, 양 옆의 복도를 따라 입원실이 자리하고 있다.
복도를 따라 마주 보고 입원실이 있었는데 왼쪽 편엔 다인실, 오른쪽 편엔 1인실이 있고, 1인실 쪽 끝엔 이비인후과 처치실이 있다.
어울리지 않았지만, 이비인후과 환자 중 단기 입원이 필요한 환자들이 암환자들과 뒤섞여 입원해 있다.
우리 병실은 6인실로 왼쪽 다인실 복도가 끝나는 곳에 있다.
복도 끝은 통창으로 되어 있는데, 그곳에서는 롯데월드타워가 보였다.
얼마 전 설이는 고모, 고모의 외아들 현수와 함께 롯데월드타워에 다녀왔었다.
설이는 또래 평균보다 키가 10센티가 큰 편으로 탈 수 있는 놀이기구가 어느새 늘어있었다.
그 앞에서 다양한 포즈를 취한 사진을 회사에서 보며 곧 롯데호텔을 예약해 하루종일 즐겨야겠다 생각했었다.
레지던트를 따라 그 통창 앞으로 갔다.
어둠이 내려앉은 네이비색 도시에 저 멀리 롯데타워가 반딧불처럼 반짝반짝 빛나고 있다.
진한 파란색의 옷이 잘 어울리는 레지던트는 키도 180이 넘는 것 같다.
작고 갸름한 얼굴에 진한 눈썹 상꺼풀 없이 크고 긴 눈.
의학 드라마에서 튀어나온 배우처럼 젊고 잘 생겼다.
내가 다니던 동네 병원엔 다들 나이 많고 배 나온 아저씨 밖에 없었는데.
‘요즘엔 의대시험 볼 때 외모도 보나.’
잡생각을 하는 나와 달리 젊은 의사 선생님은 곤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수술 동의서에 적힌 내용 중 동그라미 친 부분만 읽어 내려가다가,
하단의 동그라미 친 부분에서 한숨을 길게 쉬었다.
후우.
“이런 얘기드려 죄송해요.”
“환자분 척추에 종양이 많이 퍼져 있어서 출혈이 잘 안 멈출 수도 있어요.”
“사실 이 수술이 정형외과 수술 중 쉬운 순서로 나열하면 15% 안에 드는 수술인데요.”
“환자분 상태가… 종양 때문에 출혈이 잘 안 멈출 수 있어요.”
“그런 일이 확률적으로 얼마나 되나요.”
“케이스마다 다르긴 한데, 간혹, 아주 간혹 있긴 합니다… ”
“그 부분 동의하시면 사인 여기 하시면 됩니다.”
하아.
“그리고… ”
“마취과에서도 추가 동의서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
“일반적으로 이 수술할 때 마취과에서 별도로 동의서를 받지는 않는데요.”
“환자분 상태가 워낙 중증이라서, 만약 깨어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내용이 담긴 동의서입니다.”
“죄송합니다.”
젊은 의사 선생님은 나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바닥만 보고 있다.
동의서라고 하면 마치 수술을 받을지 받지 않을지 선택권이 있는 것 같지만, 이번에도 사실상 선택권은 없었다.
수술 중 만약에 있을지 모를 일이 두려워 수술을 하지 않는다면, 남편은 고통 속에 저대로 말라서 죽을 것이다.
나는 망설임 없이 사인했다.
“수술은 어떻게 진행되나요?”
“먼저 환자분 요추 3번에서 생긴 신경을 누르는 종양을 제거하고, 종양으로 인해 무너져 내린 3번이 더 무너지지 않도록 위 척추뼈 2개, 아래 척추뼈 2개와 연결하는 수술입니다. “
“만약, 열었을 때 잡아 줄 뼈들도 종양으로 인해 강도가 많이 약해져 있으면 위, 아래 하나씩 더 추가로 연결할 수도 있습니다.”
나는 남편의 척추뼈를 좋아했었다.
어깨가 넓고, 골반이 큰 남편은 대조적으로 가는 허리를 가지고 있었다.
남성인지 여성인지 알 수 없는 반가사유상의 매끈하고 아름다운 허리선을 연상시켰다.
40대 초반이 된 지금도 나잇살 하나 없이 그대로다.
하지만, 생존의 문제 앞에서 나의 취향은 아무 의미가 없었다.
사인을 하고 돌아오는 길.
남편이 수술대에서 못 일어날 수도 있을까 생각해 봤다.
사랑하는 설이도 못 보고, 가족들 없이 그렇게 되지는 않겠지.
그렇게 되지 않을 거라 믿기로 했다.
다음날, 새벽부터 수술을 위한 여러 가지 검사가 시작 됐고 점심시간이 지나서야 끝이 났다.
모처럼 한숨을 돌리고 있을 때 남편이 다정하게 나를 불렀다.
“여보, 나 마지막 소원이 있어.”
“이건 당신이 꼭 들어줬으면 좋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