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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음가는대로 Mar 28. 2023

[멋대로 서평 쓰기] 노인과 바다

삶과 죽음

바다는 생명의 공간이면서 동시에 죽음의 공간이다. 부연하자면 바다는 스스로 생명을 잉태하기에 삶의 근원이면서도 자신을 어미로 삼는 그 무엇에게도 영생을 허락하지 않는 혹독한 운명이라 할 수 있다. ‘노인과 바다’는 바다가 가진 이 철저히 대립되는 두 개념을 교묘하게 나란히 세워 두었다. 노인의 여정은 삶과 죽음의 은유이다. 그의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뜨거운 생명력과 얼어붙을 듯한 허무를 모두 느낄 수 있다.



서사의 기점은 따로 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노인과 바다’는 삶과 죽음을 포함한 소설이 아닌 삶과 죽음이라는 거대한 관념 속에 포함되어 있는 소설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노인과 바다'라는 제목은 그야말로 소설의 백미이다. 바다는 무수한 은유를 내포한다. 단편적인 예만 들더라도 폭발적으로 태동하는 이미지나 무한히 잠식하는 고요한 이미지와 같이 서로 상반되는 인상마저도 포함한다. 우리가 '백경'을 떠올릴 때와 '해저 2만 리'를 떠올릴 때, 그리고 '노인과 바다'를 떠올릴 때 바다는 모두 서로 다른 인상으로 다가온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특히 이 책의 제목에서는 그런 바다를 노인이라는 단어와 병치시킴으로써 삶이라는 시간적 관점에서 바라보게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제목은 단순한 객체로서의 노인과 바다가 아닌 삶과 죽음이라는 관념에 대한 사고로까지 표상을 확장시킨다.


노인과 바다를  읽은 후 제목을 보면 '노인'이라는 단어가 주는 인상은 생생하고 노련하게 삶의 현장을 살아가는 인간상과 그리 머지않은 미래에 필연적으로 맞이하게 될 운명의 종말을 겸허히 인정하고 삶을 영위하는 인간상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 물론 개개인이 기존에 생각하던 '노인'이라는 단어의 인상에는 차이가 있겠지만 적어도 '노인과 바다'를 읽은 독자들에게 제목의 '노인'이 주는 인상은 인간을 표현하는 그 어떤 단어보다도 선명히 삶과 죽음을 동시에 떠오르게 한다. 그리고 그 '노인'이 단독으로 제시되지 않고 '바다'와 상호작용하기 때문에 단순히 세월의 흐름에 따라 탄생부터 죽음까지의 직선적 인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삶의 이미지를 끝을 알 수 없는 공간에 펼쳐진 입체적 인상으로 받아들이게 한다. 그래서 ‘노인과 바다’라는 제목은 삶과 죽음이라는 관점으로 작품을 바라볼 때 가장 극적인 연출을 가능하게 해주는 백미로 꼽을 수 있는 것이다.


Michael Cheval - Old Man and the Sea (SN) (11/100)  Limited Edition Giclee on Canvas  32 x 40 in


삶과 죽음의 관점에서 본다면 소설의 서사를 출항과 귀항이라는 두 단계에 집중해서 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삶의 가치는 기대가 결정하고 죽음의 가치는 기억이 결정한다고 생각한다. 이에 따른다면 노인의 출항은 기대로 볼 수 있다. 84일간의 침묵에서 노인이 어느 정도의 좌절을 느꼈건 간에 배를 띄워 삶의 터전으로 나아가는 노인에게는 만선에 대한, 또 월척에 대한 기대가 있다. 기대는 긍정이다. 고로 기대라는 단어에는 어떠한 부정적 요소도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다. 티끌만 한 의심이라도 수반된다면 더 이상 기대는 기대가 아니게 된다.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무조건적 긍정, 한 치 앞도 내다보기 어려운 운명 속에서 매 걸음을 내딛게 해주는 힘, 이것이 기대가 가지는 삶의 가치인 것이다. 삶은 살아지는 것이 아닌 살아가는 것이고 기대를 그 원동력으로 한다. 물론 그 과정 속에 불확실성에 대한 불안감도 있을 수 있고, 실패로 인한 좌절과 무력감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정지가 아닌 정체일 뿐이다. 이 일시적 보류 상태는 기대라는 자연 발생적 동력원에 의해 언제든지 극복될 수 있다. 우리가 노인의 여정을 바라보며 그가 가치 있는 삶을 영위하고 있다고 느낄 수 있는 것은 그가 기대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노인의 항해는 거대한 물고기와의 사활을 건 힘겨루기나 상어무리와의 사투와 같은 사건들을 거치며 계속해서 이어진다. 노인의 출항이 기대로 물들어 있었다면 노인의 귀항은 많은 기억들로 점철되어있다. 현재는 과거가 되고 과거는 기억이 된다. 죽음은 현재의 종말이고, 따라서 기억의 한쪽 끝자락이 된다. 결국 마지막에 뒤돌아서 보면 지나온 모든 길은 기억으로 그 흔적을 남기고 있다. 그래서 기억은 지침이다. 마지막 순간 기억의 종착지가 어디가 될지는 정해져 있지 않다. 다만 기억의 지침이 가리키는 곳을 따라가는 것이 살아가는 것이라 생각한다. 기억에는 회한도 있고 추억도 있다. 하지만 어느 것도 틀린 지침은 아니다. 추억도, 회한도 ‘나’만을 위한 길을 제시해주고 있고, 그렇기에 기억이 죽음의 가치가 되는 것이다. 기억의 종착지인 죽음의 순간에 모두가 각자의 고유한 흔적이 있기 때문에 모든 삶과 죽음이 저마다의 가치를 가지는 것이리라. 노인이 토해낸 ‘사람은 파멸당할 수 있을지언정 패배하지 않는다’라는 외침 역시도 운명을 가로막는 제아무리 거대한 장애물, 하물며 죽음까지도 운명이라는 거대한 굴레에서 어느 것 하나 잘못된 지침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려던 것이 아닐까.


여기서 주지해야 할 사실은 앞서 말한 삶과 죽음, 출항과 귀항을 이분법적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물고기와의 사투가 마치 전환점처럼 보여 그렇게 착각할 수 있겠지만, 노인은 출항하는 순간부터 귀항하고 있었고, 귀항하는 순간까지도 출항해 있었다. 경계는 모호하다. 물고기와의 사투는 하나의 사건일 뿐이다. 그 사건은 삶의 현장이자 죽음의 현장이고 하나의 기대를 충족하는 장면이자 하나의 기억을 남기는 장면일 뿐이다. 노인은 떠나온 곳으로 돌아가기까지의 모든 연속된 순간을 기대와 기억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하지만 앞서 이야기했듯이 이 소설이 단일한 삶과 죽음을 포함하는 것이 아닌 삶과 죽음의 한 부분으로서 존재한다고 사고를 확장해 보면 출항과 귀항의 경계는 더욱 모호해진다. 어쩌면 이 모호함이 삶과 죽음의 틀로 바라본 ‘노인과 바다’의 핵심일지도 모른다.


흔히들 삶을 탄생과 죽음 사이를 이은 선이라고 생각한다. ‘노인과 바다’는 이런 상투적 관념을 다른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 준다. 이를테면 탄생과, 삶과, 죽음은 서로가 서로를 포함하는 개념이라는 것이다. 감히 탄생이 삶의 시작이고, 죽음이 삶의 끝이라고 단언할 수 없다. 노인이 배를 띄우는 순간이 노인의 여정의 시작이라 할 수 없고, 노인이 배를 정박한다고 해서 다시 출항할 수 없는 것이 아닌 것처럼, 삶이 탄생에 선행할 수도, 또 어쩌면 죽음이 또 다른 삶의 부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어쩌면 기대와 기억으로 운동하는 삶은 시작점에서 끝점까지 직선운동을 하는 것이 아닌 시작점도 끝점도 정확히 알 수 없는 드넓은 바닷속을 유영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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