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투수의 서막
사회인야구 데뷔전은 악몽 그 자체였다.
난 이제 막 자대배치받은 이등병이었다.
팀원들은 캐치볼 하며 몸을 풀면서도 곁눈으로
이놈 뭐 꼬투리 잡을 거 없나 힐끔거렸다.
내가 이겨야 할 대상은 상대팀이 아닌 것 같았다.
갓 들어온 하룻강아지가 처참하게 밟히는 꼴을
보고 싶은 무서운 범들은 우리 팀에 득실거렸다.
어디 한번 붙어보자! 포수가 뭔지 보여주지!
공 받는 것도, 도루 잡는 것도 자신 있었다.
하지만 늘 세상 일이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게 문제다.
내가 요구한 대로 공은 오지 않았다.
몸쪽을 요구하면 바깥쪽으로,
높은 볼을 요구하면 바닥에 패대기를 쳐댔다.
내가 요구한 사인에 투수가 도리도리 할 때면
난 어이가 없었다.
사인대로 던지지도 못할 거면서 뭔 도리도리?
양심도 염치도 없는 사람 같으니라고...
더 이상 사인 내는 행위 자체가 무의미해 보였다.
시간이 갈수록 존재론적 회의감이 들기 시작했다.
나는 누구인가? 여긴 어디인가?
이래서 다들 포수를 안 하려고 했던 건가?
투수는 내게 멍 때릴 시간조차 주지 않았다.
잊을만하면 바운드 볼을 던지며 내 진을 빼놨다.
빠진 공을 주우러 뛰어다니느라 땀범벅이 됐다.
숨은 턱까지 차오르고 욕은 목까지 차올랐다.
공이 한번 더 빠지니 더 이상 못 참겠다는 듯
우리 팀 큰 형님이 폭발하고 말았다.
야이 씨X, 뭐 하는 거야 진짜!
똑바로 안 할래?!!
내가 딱 하고 싶은 말이었다. 그래, 오래 참았다.
이만하면 투수 교체하자. 양심이 있어야지.
그런데... 어랏? 이상하다? 왜 다들 날 보고 있지?
감독은 타임을 부르더니 나에게 다가와
왜 블록킹을 안 하는 거냐며 윽박질렀다.
누가 봐도 폭투 던진
투수를 욕해야 할 상황 아닌가?
와... 이게 내 잘못이라고? 이게 텃새라는 건가?
그 뒤로 시간이 어떻게 갔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욕먹고 긴장한 이등병이 그렇듯 내 시야는
급격히 좁아졌고 난 몸을 날려 필사적으로
공을 막으며 다시 존재론적 회의감에 빠졌다.
나는 포수인가, 골키퍼인가?
정신이 반쯤 나간 상태에서 경기가 끝났다.
다리가 후들거려 서 있기도 힘들었다.
난 오늘 패배의 원흉이었고 욕받이가 되었다.
살면서 먹을 욕을 이날 다 먹은 것 같았다.
이것들이 작정하고 날 엿 먹이려고 짠 거라는
강한 의심이 들었지만 그럴수록 오기가 생겼다.
오케이,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내가 다음 경기에 찍소리 못하게 보여준다 진짜!
집에 가자마자 야구 교본을 몇 권 샀다.
어떤 책엔 CD도 딸려 있었다.
그땐 막 스마트폰이 보급되기 시작한 시절이니
지금처럼 유튜브로 배울 수 있는 여건이 아니었다.
나는야 옛날 사람...
동영상이 아닌 구분동작이 찍힌 사진들로
야구를 배워서인지 아직도 가끔
로보트냐, 왜 이리 뻣뻣하냐는 말을 듣는다.
야구를 책으로 배워서 그래요.
사람들은 이 말이 농담인 줄 안다.
남모를 눈물과 애환이 담긴 말인 줄
누가 알기나 할까?
지금 돌아보니 그때 내가 얼마나 초짜였는지,
하룻강아지 야구 무서운지 몰랐는지 알겠다.
포지션에 대한 고민 없이 야구는 그저
던지고 받고 치는 것만 잘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그때 우리 팀 투수가 그렇게 던졌던 것도
초짜 포수인 나 때문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야구는 투수 놀음이라고 하지만
70인 투수의 능력치를
100으로 만들 수 있는 사람,
30으로 떨어뜨릴 수도 있는 사람이 포수다.
투포수만 짱짱해도 반 이상 먹고 들어간다.
투수와 포수를 배터리(battery)라고 한다.
이는 핸드폰 배터리가 아니라 군사용어다.
포병대를 artillery battery라고 하는데
여러 대의 대포와 조종하는 포수를 한 세트로 묶어
배터리(battery)라고 부른다.
공격하는 대포는 공을 뿌리는 투수고,
장전하고 지휘하는 포수(砲手)는
포수(捕手)와 같아 야구 용어로 쓰이게 됐다.
아무리 좋은 대포가 있어도 포수가 얼빵하면
포탄이 제대로 날아갈 리 없다.
포수는 투수뿐 아니라 경기 전체를 조율하는
엄마 같은 역할을 해야 한다.
우리 팀 모든 수비수를 볼 수 있는,
모든 수비수가 보고 있는 포지션이 포수다.
투수 컨디션을 보고 그날 좋은 공이 뭔지 파악하고
투수에게 믿음을 주고 멘탈을 잡아줘야 한다.
투수에게 공을 던져줄 때도 빡빡 힘 있게 던져주며
투수에게 파이팅을 심어줘야 한다.
타자들 서있는 자세, 스윙을 보며 볼 배합을 하고
지난 타석 타구를 기억해 수비 위치를 잡아주고...
생각할 게 한두 개가 아니다.
경기 전체를 조율해야 할 놈이
투수 탓만 하며 제 한 몸 건사하기도 바빴으니...
혹독한 신고식에 많은 것을 얻었다.
야구를 대하는 자세가 겸손해졌다.
배울 게 정말 많구나.
야구를 너무 쉽게 생각했구나.
경기 전체를 생각해 볼 수 있는 포지션으로
야구를 시작하게 된 건 행운이었다.
일종의 경영자 수업이라고나 할까?
야구 교본을 사기로 한 결정은
신의 한 수, 운명적 순간이었다.
투수의 꿈을 키우기 시작했으니...
포수를 공부하기 위해 책을 샀지만
내 맘을 사로잡은 건 투수였다.
지금은 비록 욕받이 포수지만 마스크 벗고
마운드에 서서 강속구를 뿌리는 그날은 온다!
투수 편을 보고 또 봤다.
똥 누면서도 야구 교본을 보는 나를 보며
아내가 한소리 했다.
"헬스 한다고 할 때는 헬스 책을 보더니
이제 야구 시작하더니 야구 책을 보네?
책으로 헬스하고 책으로 야구하는 사람 처음 보네.
책 볼 시간에 운동을 해!"
무작정 한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요.
올바른 방법으로, 마음의 준비부터!
마인드 컨트롤! 이미지 트레이닝 아닙니까!
다 계획이 있습니다요. It's my style!
준비된 자에게 기회가 온다고 했던가.
운명의 그날이 왔다.
우리 팀 투수가 부상으로 빠지게 된 것이다.
"투수할 수 있는 놈, 한 명씩 나와서 던져 봐!"
남몰래 투수를 꿈꿨던 팀원들은 하나둘
쭈뼛거리며 나와 쪼로록 줄을 섰다.
이거 초등학교 때 많이 봤던 풍경인데?
서로 지가 던지겠다고 투수판에 우르르 몰리던.
나도 슬그머니 맨 뒤에 섰다.
이게 오디션? 말로만 듣던 트라이아웃?
다들 공을 날리고, 패대기치고 가관이었다.
이게 우리 팀 투수의 전통인 건지 팀 칼라인 건지...
다들 재미 삼아 던져 보는 것 같은데
진지한 사람은 나뿐인 것 같았다.
드디어 내 차례.
야구를 책으로 배운 사람의 실력을 보여주마!
책에서 본 사진대로, 백만 번 상상했던 대로
힘차게 공을 뿌렸고,
공은 그대로 포수 미트에 꽂혔다.
그렇지! 이게 이미지 트레이닝의 효과라고!
"어? 뭐야? 한번 더 던져봐."
그날 난 감독 눈에 들었고, 바로 마운드에 올랐다.
경기 내용은 기억나지 않는다.
내가 마운드에 올랐다는 사실, 그게 중요하다.
그날 이후 내 보직은 포수에서 투수가 되었다.
체계는 없는 팀이었지만, 감독의 눈은 정확했다.
내가 '대투수가 될 상'인 걸 한 번에 알아봤으니...
그렇게 난 점점 야구에 미쳐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