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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설작가 Dec 15. 2023

브런치가 날 변태로 만드는 구나.

<아내와 글쓰기 프로젝트 #18. 자전거>

지난 토요일. 야구팀 송년회가 있었다.

잦은 연말 모임으로 아내 눈치가 보이는 상황.

아침에 눈뜨자마자 분리수거를 하고 식사를 준비했다.

이런 때일수록 눈치, 염치, 세치 혀를 잘 챙겨야 한다.


"오늘 모임은 자전거 타고 가려고~ 

돈 아껴야지."


검색해 보니 차로 18분, 자전거로 34분,

대중교통으로는 거의 한 시간이 걸렸다.

돈 아끼고 시간 아끼는 최선의 옵션이 자전거였다.

아내에게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최선의 옵션이기도 했다.


초행길이고 만만치 않은 거리였지만

차비를 아끼기 위해 열심히 페달을 굴리는 모습.

기특한데? 낭만적인데? 멋진데?

아내도 그렇게 생각하겠지?


아들 자전거를 빌려 부랴부랴 출발했다.

점심때 배달 주문한 쌀이 늦게 도착해

저녁식사를 만드는 데 시간을 너무 지체했다.

까짓것 페달 좀 빡세게 굴리면 되지~


자전거에 라이트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아... 진작 확인할걸...

그래도 지금 와서 빠꾸는 없다.

보도로만 조심히 가면 되지~


밤공기를 마시며 달리는 느낌이 좋았다.

딱 10분 정도까지는...

다리 밑에서 길이 끊겼다.

분명 지도상에는 길이 있었는데...

IT 강국 대한민국에서 이럴 리 없다며

가로등도 없는 다리 밑 주변 한참 맴돌았다.

이때 멈췄어야 했다.


돌아 돌아 대로변까지 나오는 데 성공했다.

이제 이 길을 따라 쭉 가기만 하면 됐다.

그런데... 얼마 못 가 또 길이 끊겼다.

12월이라고 보도 곳곳이 파재껴져 있었다.

아... 대한민국... 왜 12월만 되면 포장을 하냐고~

대체로도 없었다. 대체 어디로 가란 말인가?


큰 차들이 쌩쌩 다니는 8차선 도로엔

횡단보도가 없어 길을 건널 수도 없었다.

사람이 안 다니는데 횡단보도가 있을 리 없었다.

지금이라도 자전거 버려두고 그냥 택시 잡을까?

그런데 이곳은 택시가 다닐 길도,

정차를 할 수 있는 길도 아니었다.

에라 모르겠다. 빠꾸는 없다!

이건 내 의지가 아니라 불가항력이었다.


공사용 도로 같은 삼거리에 신호등이 있었다.

이 밤에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신호 같았지만

다행히 좌회전 신호에 차들이 멈춰 섰다.

역시 대한민국! 준법정신 보소~

이때다! 죽어라 페달을 굴려 길을 건넜다.


라이트도 없이 도로변에서 뭉그적거리다

골로 가는 수가 있어 빨리 도로를 벗어나야 했지만

식수대에 가로막혀 넘어갈 수가 없었다.

식수대는 높고 촘촘했고 그 흔한 개구멍도 없었다.

살아야겠다는 생각에 자전거를 번쩍 들어

보도 쪽으로 집어 넘겼다.

이때 손목이 삐끗했다.

아... 내일 중요한 경기가 세 개나 있는데...


이젠 됐다, 고비는 넘겼다 생각했지만

가는 내내 고비였고 후회의 연속이었다.

가로등이 없어 잘 보이지 않았고

그 와중에 곳곳에서 나무뿌리가 보도를 들고일어나

신경을 곤두세우느라 속도를 내지 못했고

길은 좁아지다 없어지다를 반복했다.


긴장한 탓인지 몸에 땀이 흥건했다.

이미 약속시간은 지나 있었고

앞으로도 언제 도착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도대체 자전거 34분은 무슨 근거야?

사이클 선수가 도로로 달리는 기준인가?

길이 이 모양인 것까진 계산이 안 됐겠지?

이 길만 벗어나면, 도심 불빛만 보이면

자전거 세워놓고 택시 잡아야지.

내가 왜 미쳤다고 자전거를 끌고 왔을까...


울고 싶은 마음으로 페달을 굴리는데

앞에 사람의 형상이 보였다.

지금까지 길에서 처음 만나는 사람이었다.

저 사람은 뭐지?

이 시간에, 이 어두운 길에서, 왜 혼자?


그 사람은 귀에 뭘 꽂은 채 걷고 있었다.

내가 바로 뒤까지 왔는데도 눈치를 못 챘다.

길이 너무 좁아 앞질러 갈 수도 없고

하는 수 없이 그 뒤를 졸졸 따라갔다.

한참 후 인기척을 느낀 그는 날 보고 화들짝 놀랐다.

충분히 날 괴한으로 볼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이 자식 뭐야? 이 시간에 왜 여기 있는 거야?

라이트도 안 켜고 언제부터 날 따라온 거야?'


하지만 좁은 길엔 비킬 공간이 없었고

그렇다고 냅다 뛰는 것도 이상했을 것이다.

냅다 뛰었으면 나도 냅다 페달을 굴렸겠지?

이 황당한 추격전은 어떻게 끝이 날까?

나는 괜한 상상으로 지루함을 달래며,

그는 모든 신경을 뒤통수에 집중하며

우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그렇게 한참을 동행했다.


드디어 교차로 횡단보도가 나왔다.

신호를 대기하는데 그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저 멀리서 경계의 끈을 놓지 않고

나를 먼저 보내고서야 길을 건넜다.


다리 힘도 풀리고 기분도 찝찝하고

도저히 더는 안 되겠다 싶었다.

육교 밑에 자전거를 묶고 주변 사진을 찍었다.

아들한테 한소리 듣지 않으려면

아침 일찍 와서 자전거를 찾아가야 했다.


택시를 잡으려고 길을 두 번 건넜다.

카카오T를 찍어보니 택시 타기엔 아까운 거리였다.

바로 코앞인데 택시비가 이렇게 많이 나온다고?

대한민국 물가 진짜...

지금까지의 개고생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끝까지 가보자.

난 다시 길을 두 번 건너 자전거를 탔다.


산 넘고쎠 물 건너쎠 바다 건너쎠

한 시간 사경을 헤매다 약속장소에 도착했다.


쌀이 늦게 도착해서 늦었다는 말,

자전거를 타고 와서 늦었다는 말을

믿어주는 사람은 없었다.


"거기서 어떻게 자전거를 타고 와요~

길이 없는데~"


"그 길은 위험해서 자전거 타다 죽어요~"


길이 없는 걸 나만 몰랐다는 게 한심하기도,

다들 어떻게 길을 이렇게 잘 아는지 놀랍기도,

그래도 알아주니 반갑고 고맙기도 했다.


옆에 세워둔 아들 자전거를 보여주니

사람들은 그제야 내 말을 믿었다.


"와~ 넌 아직 젊다 젊어~"


"진짜였네? 뭐 저런 무식한 사람이 다 있어?

난 형이 이렇게 단순 무식하고 철없어서 좋아~"


나의 지각을 타박하는 사람은 없었다.

다들 나의 무사귀환을 축하해 줬다.

이게 팀웍이란 거구만~


이젠 내가 집에 갈 일을 걱정해 줬다.


"자전거도 음주단속 걸려요.

법 바뀐지가 언젠데~

무슨 생각으로 자전거를 타고 왔어~"


"음주단속이 문제가 아니라

형 그러다 진짜 죽어요~"


너희들은 길도 잘 알고 법도 잘 아는 구나.

걱정마. 자전거는 내일 와서 찾아 갈 거야~


"아마 내일 오면 바퀴만 남아 있을 걸요?

우리나라는 다른 건 다 안 가져가는데

자전거는 훔쳐가는 이상한 나라야~"


아... 대한민국...



결국 집엔 택시를 타고 돌아왔다.

할증이 붙어 빛의 속도로 올라가는 미터기를 보며

내가 오늘 뭘 한 건가 더 한심해졌다.

대리비가 더 싸게 먹혔을 것 같다.

돌이켜보니 최악의 옵션이 자전거였다.


그래도 마음 한 편에서 뿌듯함이 느껴졌다.



난 스토리를 건졌다.


그거면 된 거다.


아까 그 사람과 추격전을 했다면 어땠을까?

진흙 구덩이에 빠졌다면 더 임팩트가 있었겠는데?

진짜 자전거 바퀴만 남아 있으면 웃기겠네~


브런치가 날 변태로 만드는 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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