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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설작가 May 20. 2024

음악 얘기에 일대기를 써버렸네~

<아내와 글쓰기 프로젝트 #12. 음악>

이번 글쓰기 주제어가 '음악'이라는 말에

음악과 관련된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불행하게도 아름다운 '음악'이란 단어를 두고 떠오른 건

음악 시험 때 오해받아 거짓말쟁이가 되었던 기억과,

(관련 일화를 브런치에 언급했었다.

https://brunch.co.kr/@seolpro/67)

정말 돌이키기 싫은 부끄러운 기억이 먼저 떠올랐다.



<#1. 중1 음악시간>


우리 반엔 약간 모자란 아이 J가 있었다.

외관상 딱 봐도 2% 부족한 걸 알 수 있었고

하는 짓을 보면 심증을 확신할 수 있었다.

J는 친구들에게 놀림을 받아도

아랑곳하지 않았고 그걸 즐기는 것 같기도 했다.


음악시간, 내 뒷자리에서 J와 짝이 소란스러웠다.

수업 중에 J는 비듬을 털기 시작했다. 

책상 위 수북이 쌓여가는 비듬에 짝은 경악했고 

J는 그 반응에 신나 더 격렬하게 비듬을 털어댔다.

J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장비를 동원했다.

두피에 딱지처럼 달라붙어 있는 비듬을

자로 긁어내기 시작했다.


"드르륵, 드르륵..."


비듬인지 돌가루인지 모를 딱지들이

투둑투둑 떨어져 나왔다.

난 앞을 보고 있었지만 온 신경은 뒷자리에 쏠렸다.

뒤를 돌아보니 책상에 함박눈처럼 비듬이 소복했다.

와~ 저거 훅 불면 눈보라가 휘몰아치겠는데?


"야, 이거 나한테 불지 마~"


낄낄거리며 비듬을 긁어대는 놈,

옆에서 오만상을 찌푸리는 놈,

움찔거리며 뒤를 돌아보는 놈...

우린 대번에 선생님 레이더에 포착됐다.

선생님은 수업을 멈추고 우리 쪽으로 걸어왔다.


'아이씨~ 걸렸네~'


선생님은 내 앞에 멈춰 서더니 내게 일어나라고 했다.

왜 수업에 집중 안 하고 뒤를 돌아보는 거냐며 

다짜고짜 내 뺨을 후려갈겼다.

내 인생 첫 '피(披)'싸대기에

피가 거꾸로 솟는 느낌이었다.


어디 겁 없이 사람 뺨을 때려?
뺨 때리고 뺨 맞고.
그런 거 드라마에서나 흔한 일이지
일반 사람들이 평생 살면서
한 번이나 있는 일인 줄 알아?

- 드라마 <나의 아저씨> 中 -


평생 살면서 한 번이나 있을까 말까 한 일이

그 시절엔 왜 그리 자주 일어났던 건지...

내 주변에 유독 드라마 주인공들이 많았던 건지...


역시 학교는 배움의 공간이었다.

뺨을 맞으면 고통은 물론 자존심이 나락으로 떨어지고

더러운 기분이 몰려온다는 걸 선생님께 배웠다.

상황을 다 알던 친구들은 싸대기의 파워에 한 번,

싸대기를 맞은 놈이 나였다는 사실에 또 한 번 놀랐다.


"와~ 뭐냐 이거? 너무하네~"

"너 이제 죽었다."

"민이 화났다."


친구들은 소곤거리며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나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화, 없는 화를 

다 끌어모아 자가발전하며 폭발 준비를 마쳤다.

수업 종료 종이 울렸고 선생님이 교실을 나가자마자

뒤를 돌아 J에게 주먹을 날렸다.

내 인생 처음이자 마지막 주먹이었고

가장 부끄럽고 못난 주먹이었다.

강자에게 뺨 맞고 약자에게 화풀이한 주먹.


무방비 상태에서 얻어맞은 친구는 뒤로 나자빠졌다.

쿨하게 웃으며 넘기면 됐을 일을...

미숙한 나이였고 주변 시선에 민감할 시기였다.

일을 저지르자마자 후회와 미안함, 

막막함이 몰려왔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다음날 J는 부모님을 모시고 학교에 왔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아닌가 할 정도로 연세가 많았다.

부모님을 뵈니 더 마음이 아프고 부끄러웠다.

어렵게 가진 귀한 자식 얼굴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으니

얼마나 속이 상하셨을지...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이날 이후 음악시간도 고개를 들지 않는 시간이 됐다.

음악(音樂) 시간은 즐겁고 아름다운 노랫소리가 아닌

듣기 싫은 선생님의 목소리, 

내 안의 악의 소리가 들리는

음악(惡) 시간이 되어 날 괴롭혔다.



<#2. 10대>


대개 동생들은 형이나 언니에게

영향을 많이 받는 것 같다. 음악 취향까지도.

내 중고등학교 시절 형은 메탈에 심취해 있었고

나 역시 자연스레 메탈 음악을 접하게 되었다.


메탈은 그 시절 내게 일종의 분출구였다.

내 안의 억눌린 응어리, 폭력성, 악함 같은 것들이

메탈로 시원하게 분출되는 느낌이 들었다.

메탈은 분출뿐 아니라 약한 모습을 감추고

강한 것처럼 포장하는 기능까지 수행했다.

메탈리카, 메가데스, 스키드로우 같은 밴드의

티셔츠를 입고 괴상한 목걸이도 차고 다녔다.

티셔츠엔 주로 해골이나 피가 그려져 있었다.


다 때려 부수는 강한 메탈을 듣는 것이 

또래보다 어른이 된 것 같은 느낌

괜히 으쓱한 느낌이 들게 했다.


'난 너희와 달라~'



<#3. 20대>


대학생이 되어 부모님 품을 떠나 하숙생활을 하며

자유의 몸이 되었지만 정작 난 자유롭지 못했다.

남자들만 득실대는 공대는 내가 꿈꾸던 대학과는

거리가 멀었고 그저 고등학교의 연장일 뿐이었다.

다양한 친구들, 원치 않는 전공, 불안한 미래...

남들 눈엔 즐겁고 자유로워 보였을지 모르겠지만

이대로 살아도 되는 건지 마음 한 구석은 늘 불안했고

미래에 대한 고민 없이 산 나를 자책했다.

하지만 뭘 해본 게 없으니 막상 잘하는 게 뭔지,

좋아하는 게 뭔지도 모른 채 시간만 흘렀다.


여느 날과 비슷한 하루, 학교를 걷다

학교 방송으로 캠퍼스에 울려 퍼진

노래 한 곡은 뒤통수를 사정없이 가격했다.


사는 대로 사니 가는 대로 사니
그냥 되는 대로 사니?
니가 진짜로 원하는 게 뭐야!
그 나이를 퍼 먹도록 그걸 하나 몰라!
이거 아니면 죽음 정말
이거 아니면 끝장 진짜
내 전부를 걸어보고 싶은 그런
니가 진짜로 원하는 게 뭐야!

당시 이 노래는 내게 하늘의 음성으로 들렸다.

도망가고 피하려는 나를 쫓아오며 

반복적으로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진짜 이 나이를 퍼 먹도록 난 뭘 했을까?'


나에 대한 불만은 사회에 대한 불만으로

불똥이 튀었다. 그냥 이 상황이 싫은 거였다.

그때 내게 찾아온 사람은 '조pd'였다.


메탈이 사운드와 비주얼로 조졌다면

조pd는 가사로 조졌다.

욕설 섞인 시원시원한 사회비판적 랩은

당시 내 또 다른 해방구가 되었다.


이때 처음으로 하고 싶은 게 생겼다.

래퍼가 되어 자유롭게 할 말을 하고 싶었고

내가 만든 내 노래를 갖고 싶었다.


40대 중반이 된 지금도 그때의 감성은 남아있다.

아직도 "니가 진짜로 원하는 게 뭐야"라는

노랫말은 내 귀를 계속해서 때리고 있고

죽기 전에 내 노래를 만들고 싶다는 꿈이 있다.



<#4. 30대>


직장에 들어와 기타 동호회에 가입했다.

작곡을 위해서는 피아노나 기타가 기본인데

피아노는 초등학교 때 소질이 없다는 게 증명됐고

이제 남은 건 기타 뿐이었다.


손가락은 아프고 뜻대로 소리는 안 나고

내가 꿈꾸던 연주까지는 너무도 멀어 보였다.

내가 원한 건 메탈의 전자기타 사운드였는데

통기타로 '새들처럼'이나 치고 앉았으니...


코드 몇 개로 노래 몇 곡 더듬거리는 주제에

기타를 메고 친구들과 여름휴가를 떠났다.

그냥 그게 그렇게 하고 싶었다.

계곡 다리 밑에 앉아 친구들과 함께

내 기타 연주에 맞춰 '새들처럼'을 불렀다.

코드를 바꿀 때마다 버퍼링이 걸렸지만

나를 타박하는 친구들은 없었다.

숙소에서 '어느 60대 노부부의 이야기'를

연주하며 분위기를 다 죽여놓았을 때에도

친구들은 웃음을 참으며 묵묵히 연주를 들어줬다.

참 좋은 친구들이다.



<#5. 40대>


기타는 내 길이 아니란 걸 느꼈고

로망 실현을 위해 드럼 학원을 찾아갔다.

드럼 선생님께서 물었다.


"혹시 연주하고 싶은 노래가 있나요?"


난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메탈리카의 'Fuel'을 치고 싶습니다."


선생님도 주저하지 않고 답했다.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수제자가 되겠습니다!"


도원결의가 이뤄졌고

패기 하나는 이미 드러머였다.


점심시간에 레슨을 받고

시간 나는 대로 연습실을 찾았다.

내 안의 응어리를 분출할 수 있는

임자를 이제야 제대로 만났다.

땀 흘리며 연주하는 나 자신이 왠지 멋있었다.


어느 날 연습실 밖에서 꼬마들이 날 구경하고 있었다.

부모님과 드럼 학원을 알아보러 온 아이들이었다.

그땐 또 무슨 패기였는지 문을 열고 말했다.


"들어와~ 아저씨 연주 한번 들어볼래?"


본조비의 'It's my life'를 틀고 연주를 시작했다.

신이 난 아이들은 옆에서 무아지경으로 춤을 췄다.

흥 넘치는 아이들 덕분에 성황리에 공연을 마쳤다.

이 분위기면 전국투어도 가능할 기세였다.


이 기세를 몰아 고가의 전자드럼을 질러버렸다.

집 어디에 놓을 거냐는 아내를 잘 설득(?)해

거실에 떡 하니 전자드럼을 설치하고야 말았다.


집에 손님이 오면 스피커를 틀고 연주를 시작한다.

술 한잔 하다가도 흥이 오르면 드럼 앞에 앉는다.

우리 집에 오는 손님은 내 연주를 

끝까지 들을 각오를 해야 한다.

이제 그만 들었으면 하고 눈치를 줘도 소용없다.

난 내 멋에 취해 꿋꿋하게 연주를 이어간다.



미숙했던 시절, 남의 눈을 의식했던 시절,

불만과 응어리의 분출이 필요했던 시절...

이제 불안했던 시절은 가고 눈치 안 보고 

현재를 즐길 있는 여유가 생겼다.

'음악'만으로도 그 순간의 장면 장면들,

그때의 내 시절이 떠오른다는 게 신기하다.

"Music is my life"까지는 아니지만

내 삶의 순간순간엔 음악이 있었다.


야구에 푹 빠져 사는 동안

삶의 한 부분인 음악에 너무 소홀했던 것 같다.

음악이 있는 인생 스토리 중 

40대의 페이지를 드럼으로 채울 수 있도록

다시 열정을 불태워 봐야겠다.

죽기 전까지 'Fuel' 근처에도 못 가겠지만

열정과 패기만은 메탈리카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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