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쏟은 한 달, 그 시간에 대한 이야기
이번 여행에 욕심을 냈다면 아마 난 한국에서 보다 더 바쁜 하루 하루를 보냈을 것이다. 살펴볼 것이 얼마나 많은 곳인가. 그것을 다 볼 욕심으로 이 여행에 접근했다면 아마 스트레스를 덜러 왔다가 오히려 그것을 가득 안고 한국으로 돌아갔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번 여행에 난 굵직굵직한 몇 개의 큰 계획만을 세웠을 뿐 나머지 것들에 대해선 미련을 버린 채 하루하루를 채워나갔다. 아침에 눈을 뜨기 전부터 오늘 하루 동안 해야 할 것들이 머릿속에 가득 차게 떠올랐던 시간들에서 벗어나고 싶어 여기까지 온 것 아니었나. 그런 이유로 여기까지 와놓고 여기에서도 머릿속을 가득 메운 계획들로 하루를 시작하고 싶지는 않았다.
아무것도 할 일이 없는 하루가 날 반기는 기분은 생각보다 즐거운 것이었다. 지금이 몇 시인지, 늦잠을 잔 것은 아닌지, 할 일이 밀린 것은 아닌지 등의 고민을 할 필요가 없는 하루의 시작은 그 얼마나 가벼운가. 가벼운 마음으로 맞이하는 하루는 그 자체가 즐거움이었다. 샤워를 하고 간단하게 아침 식사를 했다. 아직 일을 하러 나가지 않은 집주인과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다 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빛이 따뜻해지길래 천천히 나가 볼 준비를 했다. 간단한 옷에 가벼운 가방. 채비는 끝났다.
워낙 걷는 것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갈 곳이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전철을 타지 않고 무작정 걸어보기 시작했다. 한참 걷다 보니 내가 어디에 있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길도 물어볼 겸 커피를 한 잔 하러 한 카페에 들렸다. 두유가 든 커피 한 잔과 하몽 샌드위치를 시켜 놓고 지도를 들여다 보았다. 지금 내가 커피를 마시는 곳은 아무래도 관광지와 동떨어진 곳이란 생각이 들었고 옆에서 혼자 차를 마시는 아가씨에게 지금 우리가 있는 곳은 어디며 람블라스 거리로 어떻게 가야 하는지를 물어보았다. 람블라스 거리에서 할 일이 있었다기 보단 번화한 곳이니 그곳에 가면 뭐라도 구경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그곳에 가는 방법을 물어보았다. 아가씨는 여기서 람블라스 거리까지는 걸어서 가기 어렵다고 했다. 한참을 걸어야 한다고. 그래서 난 시간이 많고 좀 걷고 싶은 상태이기 때문에 걸어가도 상관없다고 말하며 방향을 좀 알려달라고 했다. 아가씨는 날 보고 환하게 웃으며 방향을 알려주었고, 재미있는 여행이 되길 바란다고 말해주었다. 나도 친구들을 기다리며 커피 한 잔 하고 있는 이 이스라엘 여성에게 좋은 하루 보내길 바란다고 말하고 다시금 길을 걷기 시작했다.
관광지가 아닌 곳에서 관광지로 다가가는 느낌은 흥미로웠다. 사람들이 많아지고 상점들도 많아졌다. 그곳의 사람들은 내게 먼저 미소 지었고 말을 건넸다. 그렇게 람블라스 거리에 당도했다. 동생과 함께 이곳에 왔을 때가 기억났다. 바쁘니까 빨리 보고 다른 곳으로 가자고 말했던 내 목소리가 어디에선가 들려오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오늘은 그렇게 바쁘게 움직이지 않아도 된다. 시간이 아주 많다.
람블라스 거리는 그 자체로도 아름답고 즐거운 곳이지만 그 거리 사이사이 가지처럼 뻗어있는 작은 골목을 누비는 재미가 어쩌면 더 흥미롭다. 시간이 아주 많은 나는 그 골목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골목 사이사이에 작고 독특한 상점들이 가득했다. 일부러 찾아가려고 했다면 절대 찾을 수 없었을 것 같은 곳에 보석 같은 장소들이 숨어있었다. 그곳에서 무엇을 사지 않아도 하지 않아도 새롭고 흥미로운 것을 발견했다는 것 만으로도 몹시 즐거운 순간이었다. 무언가를 덤으로 얻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배가 고파졌고 하도 많이 걸었더니 다리도 아팠다. 주린 배도 채우고 다리의 피로도 풀 겸 맛있어 보이는 빵을 파는 곳으로 들어갔다. 단 것이 들어가니 기운이 났다. 그리고 나서 생각해보니 이렇게 많이 걸어왔으니 돌아가는 길도 한 참 걸리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전철을 타고 가면 금방이겠지만.) 이제 발길을 집 쪽으로 돌릴 때가 된 것이다.
한참을 걸었지만 아무래도 집 쪽에 가까워진 기분이 들지 않았다. 지나가는 사람에게 집 근처에 있는 전철역 이름을 대며 그곳으로 가려면 어느 쪽으로 가야 하는지를 물으니 너무 멀어서 못 걸어가니 근처에서 전철을 타라고 말해주었다. 난 또 다시 시간이 아주 많고 걷고 싶어서 그런다고 방향만 알려달라고 했다. 그 분 역시 날 보고 ‘씩’ 한 번 웃더니 손가락으로 방향을 알려주었다. 고맙다고 말한 후 귀에 이어폰을 다시 꽂은 뒤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그렇게 길을 가던 중 말도 안 되게 예쁜 가게를 발견하게 되었다. 다른 사람 눈엔 어떻게 보일지 모르겠지만, 정말 내가 머릿속으로 한 번쯤은 그렸을 법한 그런 예쁜 가게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 옷감을 파는 가게였는데 들어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주머니의 취향이 곳곳에 스며들어 있었다. 그곳에 있는 천 한 조각, 실 한 타래에도 그것을 골라 그곳에 놓아 둔 주인의 숨결이 느껴졌다. 얼마나 오랫동안 얼마나 많은 정성을 이곳에 쏟아 부었을지 감히 상상도 되지 않았다. 그 가게는 곧 주인이었고 주인은 곧 그 가게였다.
그곳에 있는 옷감이 모두 마음에 들어 결정을 하지 못하고 있으니 주인 아주머니가 내게 말을 걸었다. 스페인어로 말을 거시길래 내가 스페인어를 잘 못한다고 스페인어로 말을 했더니 그 말을 스페인어로 할 정도면 스페인어를 못하는 게 아니라고 말씀하시며 웃으셨다. 어렵게 천을 하나 골라 그것의 계산을 부탁하며 스페인어로 가게가 예쁘다고 했더니 그 문장에 쓰인 어휘를 고쳐주시며 사물을 예쁘다고 할 때와 사람을 예쁘다고 할 땐 다른 단어를 써야 한다고 알려주셨다. 느닷없는 스페인어 수업 시간에 잠시 어리둥절했지만 한편으로는 그 마음이 참 고마웠고 따뜻했다. 스페인에 공부하러 온 것인지를 묻는 질문에 ‘여행하면서 공부도 하고요’ 라고 말했기 때문에 내 대답을 고쳐 준 것일 테니 말이다. 실례가 될지 몰라 사진을 찍지 못하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이곳에 다시 찾아 오려면 사진을 찍어 놓아야 할 것 같아 사진을 찍어도 되냐고 물었다. 마음껏 찍으라고 말씀해주셨고 나는 가게 구석구석 주인 아주머니의 숨결을 카메라에 차곡차곡 저장했다.
그렇게 가게에서 나와 한참을 걸어 집에 도착했다. 휴대전화 어플을 확인해보니 오늘 하루 동안 난 2만보를 넘게 걸었다. 근래에 이렇게 많이 걸어본 적이 언제였던가 생각해 봤는데 딱히 생각이 나지 않는 것 보니 그런 날이 없었던 모양이다. 실컷 걸은 것뿐인데 어쩐지 몸과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기분이 들었다. 계획과 생각이 없었던 하루 치곤 꽤 괜찮은 시간을 보냈다. 아니, 계획과 생각이 없었기에 더 괜찮은 하루를 보낸 것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