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쏟은 한 달, 그 시간에 대한 이야기
그곳엔 마땅히 식사를 할 수 있을 만한 곳이 없다고 들었다. 아침 일찍 문을 열어 놓은 고마운 빵집에 들려 빵을 하나 사 들고 전철을 타러 갔다. 전철을 타고, 기차를 타고, 케이블카까지 타고 난 뒤에야 도착할 수 있었던 몬세라트.
몬세라트는 가우디의 영감의 원천이 된 독특한 모양의 산악 지형으로 유명한 산이기도 하지만 그곳에 지어진 몬세라트 수도원과 합창단 그리고 검은 성모 마리아상으로 더 유명한 곳이기도 하다. 시간을 잘 맞춘다면 (오후 1시) 그곳에서 에스꼴라니아 합창단의 노래를 들을 수 있는 벅찬 기회를 얻을 수 있다. 모두에게 열린 성당으로 미사에 방해가 되지 않게 조심스럽게 들어가기만 하면 된다.
사실 나는 몬세라트의 절경이나 수도원 자체엔 크게 관심이 없었다. 나는 오로지 이 합창단의 노래를 듣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었다. 뜻을 헤아릴 수 없는 언어로 노래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것은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어쩐지 그들의 합창을 듣게 되면 내 모든 시름이 눈 녹듯 사라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사실 믿는 종교가 없는 무신론자 인데, 이상하게도 성당에서 느껴지는 엄숙함과 설명하기 어려운 그곳의 따뜻함이 삶의 곳곳에서 날 위로했던 것 같다. 그런 위로의 순간을 스페인에서도 얻을 수 있길 희망했고, 그래서 이곳 몬세라트에 오게 된 것이다.
케이블카로 실어 나를 수 있는 사람의 수가 많지 않다 보니 케이블카를 기다리며 너무 많은 시간을 소모해 하마터면 합창단의 노래를 들을 수 없을 뻔 했다. 하지만 운 좋게도 합창이 시작되기 직전에 성당에 도착 할 수 있었다. 다행이었다. 에스꼴라니아 합창단의 합창은 예상했던 것 보다 훨씬 더 아름다웠다. 나이는 비록 어릴지 몰라도 지금 자신들이 하고 있는 행동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아는 것 같은 소년들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진지함과 커다란 에너지가 내게 전해졌다. 이곳에 모인 많은 사람들 또한 진지하고 조용한 자세로 이 공간에서 전해지는 은혜로움을 느끼는 듯 했다.
합창단이 자리를 뜨고 얼마간의 미사가 진행된 후 예배가 마무리 되었다. 사람들이 하나 둘씩 성당을 빠져나갔지만 나는 어쩐지 그곳에 더 머무르고 싶어 사람들이 떠난 자리에 가만히 앉아 보았다. 그제서야 많은 인파에 가려져 있던 성당의 아름다움이 눈에 들어왔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이곳에 이런 아름다운 공간을 만들어낸 그 옛날의 사람들이 새삼 대단하게 느껴진 순간이었다. 이런 것을 두고 신앙의 힘이라고 하는 것일까? 나는 감히 상상을 할 수도 없었다.
합창단을 보기 위해 온 곳이긴 했지만 합창단을 보았다고 그냥 가기엔 봐야 할 것이 너무 많이 남아 있는 몬세라트였다. 이젠 몬세라트의 절경과 수도원의 구석구석 그리고 검은 성모 마리아상을 볼 차례였다.
몬세라트의 절경을 둘러보는 여러 가지 방법 중 하나는 수도원이 있는 곳에서 푸니쿨라를 타고 좀 더 올라가 그곳에서부터 걸어서 산을 오르는 것이다. 등산을 좋아하는 편도 아니고 날씨도 더웠지만 힘들면 내려오면 된다는 가벼운 마음으로 천천히 등산을 시작했다. 생각해보니 처음이었다. 35년을 사는 동안 혼자 산에 올라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기분이 묘했다. 노래를 들으며 천천히 올라가다가 힘이 들면 잠깐 앉아 물을 마시며 쉬었다. 지나가는 사람들과 눈인사를 하다가 서로가 혼자 온 것을 눈치로 알게 되면 잠시 멈춰 서로의 사진을 찍어주었다. 그리고는 또 가던 길을 계속 걸어갔다. 그렇게 걷다가 문득 산 아래를 내려다 보니 내가 언제 이렇게 높이 올라왔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 기세라면 더 높은 곳까지 올라가볼 수도 있을 것 같았지만, 검은 성모 마리아상을 아직 보지 못한 터라 마음이 급해져 올라가던 발걸음을 돌려 다시 수도원 쪽으로 내려왔다.
검은 성모 마리아 상을 보기 위해 이미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있었다. 얼마나 많이 기다려야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녀의 손을 잡고 빌 소원이 있었으므로 차분하게 기다려 보기로 했다. 한 시간이 훌쩍 지나고서야 만날 수 있었던 검은 성모 마리아 상(La Moreneta).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신자는 아니었지만 오랜 시간 동안 아주 소중하게 보관된 무언가를 본 다는 사실 만으로 어떤 벅차 오름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옛날 전쟁을 피해 그리고 박해를 피해 이 깊은 산 속에 수도원을 짓고 그 안쪽 더 깊숙한 곳에 이 마리아 상을 모셨을 그들을 생각하니 설명할 수 없는 감동이 밀려왔다. 나는 케이블카를 타고 쉽게 올라온 이곳이지만 이 수도원을 지을 당시 이곳은 바위산이었을 뿐 아닌가. 성모상뿐 아니라 몬세라트에 있는 모든 것에서 신앙의 힘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성모상까지 만났으니 이제 이곳과도 작별을 해야 할 시간이다. 평소 같았으면 케이블카는 운행이 끝났을 시간이었지만 이 날이 스페인의 공휴일이었던 터라 많은 관광객이 몬세라트에 방문해 케이블카의 운행 시간도 연장이 되었다. 다행이었다. 하마터면 산악 기차표를 새로 끊고 내려갔어야 했는데 케이블카의 연장 운행으로 올라올 때 사용했던 케이블카 티켓을 이용해 내려갈 수가 있게 된 것이다. 늦지 않게 성당에 도착해 합창단의 노래를 들을 수 있게 되었던 것도 그렇고 오늘 하루 종일 검은 성모 마리아가 한국에서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했다며 날 지켜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몬세라트에서의 하루가 이렇게 감사하게 저물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