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알머 Nov 18. 2020

INㅁㅁ

관계에 소홀한 편이다.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주위에 사람이 별로 없다. 사람들에겐 얇고 넓은 관계보단 좁고 ‘깊은’ 관계가 좋아서라고 말하지만, 이건 관계의 나태에 대한 대외적인 변명일 뿐. 사실은 좁은 울타리를 선호하는 것이다. 얕든 깊든 깊이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다. 울타리가 커봐야 피곤하기만 하다. 애써 땅을 늘려봤자 수선할 시간만 더 든다. 만남은 노동이므로 생존 신고만 하면 된다는 생각이다. 해서 그나마 가까운 친구들도 일 년에 두세 번 정도만 보는 편이다. 그 이상의 빈번한 만남은 곤란하다. 이런 성격 탓에 청춘이라면 으레 누릴 법한 낭만의 특권을 포기한 채 살아왔다. 우선 대학생 때 엠티를 가본 적이 없다. 신입생 오티도 물론이다. 귀찮아서 신청하지도 않았다. 당연히 대학가의 흔한 술자리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른다. 간혹 술집이 즐비한 거리를 지나가다 왁자지껄한 웃음소리를 들을 때면, 젊은이들의 술자리는 참으로 떠들썩한 모양이다, 하고 넘겨짚었을 뿐이다.      


굳이? 열거하기도 힘들 정도로 많은 사람을 만나는 데 소중한 에너지를 소모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보단 내 세계를 탐독하는 일이 더 즐거웠다. 애초에 사람을 통해 에너지를 얻는 편이 아닌지라. 불 꺼진 방안에서 책과 음악과 드라마와 영화를 도구로 백일몽에 잠기면 그만이었다. 답답한 마음이 들 때면 야밤에 산책 한두 시간으로 족했다. 만약 보편에 가까운 대학 생활을 했다면 어땠을까, 시뮬레이션을 돌려 보지만 그런 삶을 살았다면 공상을 즐기지도, 글이란 매체에 부단히 빠지지도 않았으리라. 적어도 내게 글은 고독이므로. 그러고 보니 불현듯 이런 생각이 스친다. 만약 올해 대학 생활을 했다면 누구보다 불만 없이 잘 다녔을 것 같다는.     


언젠가 이런 일이 있었다. 이 학년쯤이던가. 매체기획이라는 과목을 들을 때였다. 강의가 끝나고 과 대표가 내게 말을 걸었다. 몇 번 안면이 있는지라 거부감은 없었다. 활달하면서도 발표를 참 잘하는 사람이었다. “어제 술자리가 있었는데 주변에서 인원 씨 보고 미스터리한 남자라던데요. 수업만 듣고 홀연히 사라진다고. 혹시 저희 과가 맘에 안 드세요? 가끔 얼굴도 비춰주세요” “아뇨. 오히려 애정이 많은 편이죠. 제 딴엔 재밌게 다니고 있어요. 그래서 이렇게 재수강도 하는 거고요. 다만 제가 사람은 좋아하는데,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아서요.” 그는 희미하게 웃었다. 아마 내 대답이 와닿지 않은 모양이었다. 왜 꼭 그런 사람들 있지 않은가. 으쌰으쌰 뭉치기 좋아하는. 특히나 일이 학년 때는 모임이 더 잦은 편이다. 한창 대학의 봄을 즐길 때니까. 그런 이유로 그에게 나는 별종이었을지 모른다. 더군다나 그땐 ‘아싸’가 밈으로 소비되던 시기가 아니었다. 안 좋은 이미지에 가까웠다. 

    

그래도 뭐, 기분이 썩 나쁘진 않았다. 사람을 향한 순수한 호기심이 느껴져서인지는 모르겠으나. 재밌었다. 안줏거리가 됐다는 것이. 카페는 자주 가도 술자리는 익숙하지 않아서 말이다. 그날 이후로 우린 눈인사 정도는 하는 사이가 됐다. 그리고 한동안 나는 내가 ‘미스터리한 남자’라는 별칭으로 불리고 있다는 걸 주변에 자랑하고 다녔다. 그건 일종의 표창장이었다. 내 멋대로 잘살고 있다는 증거 말이다. 딱히 존재감을 알리고 싶진 않지만 그렇다고 투명 인간도 되고 싶진 않았던 아이러니를 현실로 만들어주었기에. 추리소설에나 나올 법한 표현이 썩 마음에 들었기도 하고. 그로부터 한참이 지난 지금, 여전히 나는 이 역설을 즐긴다. 기억되고 싶지만 사라지고 싶다. 그럼에도 둘의 균형은 항상 깨지기 마련인데, 그럴 때면 승자는 대체로 후자다. 그쪽이 내게 유리하기 때문이다. 싸이월드에 대한 별다른 향수가 없던 내게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 역시 별세상의 일이다. 잊히고자 한다면 언제든지 자유로워질 수 있다. ‘언팔’이라는 걸 하지 않아도 되니 얼마나 편한지. 죽음도 내게는 자유에 가깝다. 봉분이나 납골당에 얽매이기 싫다. 산 자에게 의무를 남기고 싶지 않다. 애인에게는 내가 먼저 죽으면 태워서 자연에 흩뿌려 달라고 했다.

     

요새는 MBTI라는 제2의 혈액형 신봉론이 유행해서인지 내 성향을 말하는 게 덜 껄끄럽다. 단적으로 “A형이지?” 따위의 말을 안 들어서 참 좋다. 차라리 ‘IN 어쩌구’가 낫다는 생각이다. 끽해야 네 가지 분류로 사람을 판별하는 주술은 예나 지금이나 영 마뜩잖다. 그에 비하면 열여섯 가지의 분류법은 가히 혁명적이다. 지금의 한국 사회가 예전보다 더 다양화된 측면이 있다는 증거일까? 어쨌거나 한 번에 네 명 이상의 사람과 시간을 같이하는 건 내게 너무나 끔찍한 일이다. 귀가 따갑다. 기가 빨린다. 많아야 세 명 정도가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모임의 한계치다. 술 게임 같은 건 하나도 모르고 앞으로도 알고 싶지 않다. 딸기바나나주스에 치즈케이크를 시켜서 카페 구석자리에 앉아 한적하게 웹소설 보는 게 내 젊음의 표현이다. 아무래도 점잖은 게 좋다. 낮의 활달함보단 밤의 침묵이 나를 북돋는다. 친구들끼리 여행 가는 건 딱 질색이다. 만남은 나를 핍진하게 만드는 탓이다. 충전은 집에 홀로 있을 때만 가능하다. 


일평생 작은누나는 나를 히키코모리라 놀리고 엄마는 나중에 직장생활은 어떻게 하겠냐고 왕왕 잔소리 아닌 잔소리를 했다만, 다행히 지금껏 그런대로 잘살고 있다. 이쯤 되면 내 성향이 몇 가지로 좁혀질 테지만, 그렇다고 사이비 성격론으로 나를 단정 짓고 싶진 않다. 틀에 갇히는 건 정말 질색이다. 이젠 좀 질린다. 누가 좀 더 기발한 성격론을 발명해줬으면 좋겠다. 종국엔 사람을 뭉뚱그리는 어떠한 기준도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으면 한다. 사람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매거진의 이전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