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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이 사라졌다.

이혼의 후유증 2

by 기품있는그녀

감정이 메말랐다. 기쁘지도 않고, 행복도 없었다. 내 상황이 그래서 그런가 보다 생각했다. 그런데 슬픔도, 분노도, 화냄도, 그냥 그저 그런 감정도 없어졌다. 한마디로 나의 감정은 무뎌져버렸다.

감정이 무뎌진 나는 어딘가 고장 난 사람 같았다. 즐거워도 웃을 수 없었고 그저 삼인칭 관찰자 시점이 된 듯 그 상황을 나는 나에게 말로 설명해주고 있었다. 화가 나는 상황에서도 나는 그저 가만히 지켜볼 뿐이었다. 나는 그것을 ’어떠어떠한 상황‘이라고 내 머릿속에 서술할 뿐이었다. 나는 감정으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나는 자연히 무뎌졌다.

원래의 나는 감정적이고 활기가 넘쳤으며 웃음이 많은 사람이었다. 물론 쉽게 짜증내기도 했고, 민감한 감각 때문에 예민을 떨기도 했다. 그런데 한 차례의 폭풍을 겪고 난 나는 그 어떠한 감각도 감정도 다 메마른 나뭇가지처럼 메말라버렸다. 아니, 처음에는 매우 우울했던 것 같다. 나는 우울증을 진단받았고, 극단적인 생각과 충동으로 나를 가만두지 못하고 있을 때가 있었다. 그런데 우울증 약을 먹으며 치료했고, 나는 그렇게 내가 우울증으로부터 벗어난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무감정이라는 이상한 상태를 낳았다.

나는 그때 그저 그 상태가 ‘평온’하다고 느꼈다. 실제로 나는 전에 없던 평온과 평화를 느꼈다. 나는 잔잔한 나의 마음을 느꼈다. 바람도 없고 빗물도 없고, 어떠한 동요도 없는 그런 잔잔한 호수라고 느꼈다. 그런데 그 호수에는 생명력이 없었다. 사는 물고기도 없었고, 수풀도 벌레도 없는 죽은 물이었던 것이다. 나는 사해와 같은 내 마음을 바라보며 ‘잔잔해서 좋다’고 여기고 있었다.

어느 날 나는 내가 참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아이들의 말썽을 보고도 나는 아무 생각이 없이 그저 ’ 지켜볼’뿐이었다. 그러다 뒤늦게 ’훈육해야만 해’라는 머리의 명령을 들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몇 마디 말을 했다. 그게 다였다.

한 번은 친구가 교회 구역 모임에서 웃기는 이야기를 했다. 그 말에 다들 웃었고, 나는 뒤늦게서야 ’웃어야 해‘라는 명령을 듣고 따라 웃었다. 나는 나의 반응들이 이상함을 느꼈다.

친구는 이미 이상함을 느끼고 있었다고 말했다. 무슨 말을 해도 반응이 없거나 느리거나 또는 뭔가 예상치 못한 무던한 반응을 해왔다는 것이다. “너답지 않았어.” 그 말로 나의 상태를 알려줬다. 나는 나다움을 잃어버렸다.

그런 무감정이 글을 쓸 수 없게 만들었다. 나는 나의 모든 감각과 감정에 무뎌졌고, 언제나 반응이 느렸다. 해야만 하니까 하는 필요적인 반응 외에는 하지 않게 된 것이다. 그것도 나의 노력이었다.

나는 나의 어떤 ’에너지’를 최소한으로 쓰고자 노력하는 것 같았다. 나는 더 끌어다 쓸 힘이 없었다. 내가 일상을 일상적으로 살아가고 있는 이유는 나에게 남은 그 조금의 힘을 최대한 끌어 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에게는 ‘여력‘이 없었다. 나는 나마저도 관찰자 시점에서 바라보고 있었기에 모든 상황에서 반응을 않거나 피하거나 어쩔 수 없는 반응만 하고 있었다.

나는 조금 더 반응을 끌어내기 위해 노력했다. 관찰자 시점에서 당사자 시점으로 상황을 바꾸어 받아들여보는 것이다. 일상을 ’나의 일‘로 받아들이기 시작하는 건 너무 힘들었다. 없는 감정을 이끌어내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래서 너무 지쳤다. 하루를 살아내고 나면 나는 마치 소진한 듯 그렇게 꺼지듯이 잠들었다.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이들이 방치되어 있었다는 것은 그 이후에 깨달았다. 나는 최소한의 반응만을 하고 있었기에 ‘그저 그런 평범한 문제상황‘은 그냥 넘겨버리기 일쑤였고, 사소한 문제상황들은 점점 살을 붙이듯 큰 문제 상황으로 악화되어 갔다. 나는 악화된 문제들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마치 일이 커지기를 기다렸다가 해결하듯, 나는 그렇게 뒤늦게 수습할 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팠다.

성장기 아이들에겐 관심이 필요했다. 사랑과 애정이 필요했다. 그것은 말이 아닌 따뜻한 눈빛과 응원, 지지와 같은 것이다. 그런데 나는 말로만 사랑한다고 할 뿐, 아이가 다쳐도 그러려니 했고, 힘든 일이 있어 보여도 무시했다. 내 무감정과 무감각이 나를 그렇게 행동하도록 만들었다. 그러자 아이들은 제멋대로가 되어갔고, 존중도 없어졌으며 나의 권위도 사라져 버렸다.

나는 마치 감정을 새로 배우는 사람처럼, 서투르게 감정들을 바라보았고, 표현했다. 마치 처음인 듯 어려웠다. 조금씩 조금씩 나는 나를 가둬놓은 알껍질을 깨 부수고 나온 것 같다. 나는 ‘어떤 상태’에 나를 가둬 두었던 것 같다. 아프지 않으려고, 나를 보호하기 위해, 감정에 무뎌지기를 선택한 것 같다.

아마 그 ‘어떤 상태’는 ’평온‘의 탈을 쓴 악마가 아니었을까. 나의 눈을 현혹시키고, 나는 무탈하고 괜찮다는 달콤한 말을 내 귀에 속삭이며,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게 만드는 그런 악마. 나는 그렇게 눈과 귀를 가리고, 세상으로부터 숨어버렸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엄마니까. 그리고 인간이니까. 엄마로서 최소한의 사랑과 보살핌을 주어야 마땅하고, 인간으로서 이 세상을 바르게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이 땅을 딛고 세상을 짊어지고 살아가야 함을 나는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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