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이 아프면 우리는 병원에 간다. 가벼운 감기면 감기 치료를 하면 되고, 심각한 뇌혈관 질환이면 그것을 치료한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그 질환에 대해 알게 된다. 심각한 질병일수록 더 많이 알아보고, 더 많이 치료를 한 의사(임상경험이 많은 의사)를 찾아가 수술을 받기도 하고, 각종 의료행위를 받게 된다.
adhd도 그렇게 보면 어떨까. adhd 진단을 받았다고 좌절하고, 부정하는 부모를 보았다. 그리고 치료도 거부하는 부모를 보았다. 몰랐다면 모를까, 알게 되었다면 치료를 해주어야 한다. 왜냐하면 혼자서 겪어내는 과정은 너무나 아프고 힘들기 때문이다. 이해할 수 없는 멸시와 상처는 세상으로 나가지 못하는 미숙아로 성장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 가지를 더 추천한다. adhd를 더욱 알아가라는 것. 더욱 깊이 있게 이해하라는 것. 부모님도 이해하고, 아이에게도 이해시킬 것. 그래서 스스로의 상태를 객관적으로 알 수 있게 도와주어야 한다. 그것이 부모의 도움 없이도, 약물 치료나 심리치료 없이도 자립할 수 있는 어른으로 성장시키는 역할을 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ADHD가 뭔지 알려줄게!'의 주인공 톰은 열 살이다. 그리고 adhd다. 그래서 아이는 adhd에 대해 알아가고, 알려준다. 이 책을 읽는 아이들에게. 이 책은 이 전 '과잉행동 거북이 셜리'보다는 어렵다. 초등 2~5학년 아동에게 읽히기 좋을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초등 1학년 때 아이에게 이 책을 읽혔다. 그리고 도움이 되었냐 하면 '그렇다'이다.
톰은 adhd를 자세하면서도 쉽게 알려준다. 정보의 나열은 자칫 어려울 수 있는데, 상황에 맞는 그림이 흥미를 끌고, 글씨를 오려 붙인듯한 강조 효과를 통해 아이가 조금 더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고 있다. 그래서 아이는 충분히 정보를 받아들였고, 이 책의 주인공 톰과 공감했다.
"나는 이런 어려움들을 겪었어. 너는 어때?"
adhd를 겪는 친구들은 아주 기발하다. 그래서 유쾌하다. 그래서 웃기고 재미있는 친구라며 친구들이 좋아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 기발한 생각이 생각에서 멈추지 않는다. 이때 '충동성'이 발휘되면 상상이 현실이 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이 된다. 다치고, 까지고, 혼이 난다.
'이거 재미있겠다!'
라고 생각하면 바로 행동으로 간다.
'하지만 위험하겠는데? 다칠 것 같아.'
라는 생각에까지 미치지 않는 것이 '충동성'이다.
이 부분이 adhd 아동과 함께하는 모든 사람들이 겪는 고통일 것이다. 그 곁에 있는 사람들은 늘 갑작스러운 사고에 마음 졸이거나 신경이 예민해져 있을 것이며, 함께 성장하는 형제자매는 그 위험에 가장 크게 노출되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이런 충동적인 위험으로 친구들도 거부감을 표현한다. 그렇게 고립되며 외로움과 우울증을 겪기도 한다.
아이는 이해받지 못하는 세상에서 아주 큰 외로움을 느끼게 된다. 친했던 친구도 짜증을 내고, 아무 관계도 아닌 아이가 갑자기 화를 내기도 한다. 도대체 내가 무엇을 잘 못 했는지 모를 때도 너무 많다. 너무 많은 실수와 잘못을 해서, 이제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잘하는 것인지 조차도 알 수 없게 되어버린다.
충동성이라는 것은 '절제력'이다. 충동이 올라올 때, 그 충동을 억제하는 절제 능력. 그 절제 능력이 보통의 아이들보다 부족하다. 절제 능력이란 결국 자기 스스로 자신을 제어하는 것이다. adhd는 이런 제어가 거의 안 되는 것이다. 그래서 과하게 흥분하는 과잉행동을 하는 것이다.
이것은 잠 문제에도 영향을 끼친다. 뇌가 '이제 쉬어라'라고 명령해야 하는데, 침대에 눕자마자 기발한 생각이 떠오르고, 낮에 있었던 좋은 일 나쁜 일이 마구마구 생각난다. 지금이 아니면 생각할 시간이 없는 듯이, 그렇게 생각 나래를 펼친다. 그렇게 생각에 지쳐 느지막이 잠이 들면, 당연히 늦잠을 자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또 여기서 제어력이 문제다. '이제 깰 시간이야'라는 뇌의 각성이 이루어져야 하지만, 뇌는 각성을 시키지 않는다. 그래서 많은 adhd 아동들이 '잠 문제'를 겪는 것이다.
그냥 아이가 유난이라고 생각했을 많은 부모들. 하지만 adhd로 인해 겪는 어려움이라는 것을 알고, 그것이 질환 문제라는 것을 이해하면 어떨까? 이제는 아이가 조금 더 이해가 될까?
나는 이 부분이 정말 명쾌하다고 생각했다. 결국 뇌는 통제권을 잃어버렸고, 흥미와 재미만을 추구하는 상태가 되었다. 절제라는 것은 결국 나중의 이익을 위해 현재를 희생하는 것인데, 그런 아픔은 겪기 싫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책 속의 표현대로 교통경찰을 잃은 다차선 도로처럼 엉망으로 엉켜버린 도로가 된 adhd의 뇌. 그런 상황에서 옳은 판단, 현명한 판단을 내리길 바라는 것은 욕심이다.
하지만 영원히 그렇게 살게 되는 것은 아니다. 아이들의 뇌는 성장하고, 성장 과정에서 자연히 일반인의 수치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하지만 모두가 그렇다고 할 수도 없다. 성인이 되어서까지도 adhd를 겪는 성인 adhd가 있으니까 말이다.
성인이 되어서도 adhd로 살아야 한다면? 삶을 포기해야 하나? 아니면 그 상태로 살아가야 하나? 당연히 후자다. 그렇게 하기 위해 훈련을 하면 된다. 파블로프의 개처럼. 우리도 자동반사적으로 우리를 만들어 갈 수 있다. 아이 스스로? 아니다. 부모가 도와주면 할 수 있다.
희망이 있다. adhd에 잠식되면 사회 부적응자로 살아갈 수도 있지만, adhd를 극복한 사람들은 위인이 된다. 이 세상은 이런 소수에 의해 발전했다. 사회에 적응한 보통 사람들이 기발한 생각을 해서 세상을 발전시킨 것이 아니라, 말도 안 되는 생각들로 개혁을 이루어낸 소수의 특이한 사람들이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 우리 아이도 당연히 그렇게 될 수 있다. 그렇게 되지 않더라도, 유쾌한 삶을 살 수 있다. 내가 원하는 일을 하며, 원하는 대로 살아가는 멋진 사람이 될 수 있다. 그 가능성을 절대 잊지 말길 바란다.
아직도 사회의 인식은 부정적이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 아이도 자신이 adhd라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은 부모의 역할이 아니다. 부모는 아이가 어떤 결론을 내릴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만 할 뿐이다. 절대 대신 판단해서는 안 된다. 그 모든 생각이 아이를 만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스스로가 자신 앞에 놓이는 과정들을 하나하나 극복해 나아갈 힘을 만들어줄 것이다.
속상하고 상처 받는 과정까지도 아이를 성장시키는 원동력임을 잊지 말자. 단 한순간도 상처 받지 않기를 바라지 말아야 한다. 다만, 상처 받은 순간 엄마에게, 아빠에게 솔직하게 터놓고 말할 수 있는 아이가 되게 만들자. 부모는 딱 거기까지 할 수 있으면 다 한 거다.
톰은 이제 자신의 부족을 알았다. 자기가 어떤 부분에서 어려움을 겪는지 알았다. 그리고 그것을 보완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게 되었다. 이렇게 자기가 어떻게 준비물을 잊지 않고, 물건을 잃어버리지 않고 생활할 수 있는지 알려준다. 여러 가지 극복 방법을 알려준다. 우리 아이들도 스스로 자신이 어려워하는 부분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나 생각하게 될 것이다.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 처음부터 잘 해낼 수 없다. 그리고 adhd가 아닌 평범한 아이들도 이런 문제는 겪는다. 다만 adhd라서 더 잦은 횟수로, 더 힘겹게 극복해야 하는 것이 힘든 것뿐이다.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하나씩 차근차근. 그렇게 만들어 가면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