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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아서 Mar 07. 2023

영화 [밀양]에는 있고 [벌레이야기]에는 없는 것

    이청준의 [벌레이야기]가 영화 [밀양]의 원작이 아니었다면, 넷플릭스를 구독하는 동안 [밀양]을 볼 일은 없었을 것이다. 자세히 줄거리를 찾아보지 않아도 전도연이 영화 내내 오열하겠구나 싶은 포스터가 가벼운 마음으론 오지 말라는 경고처럼 느껴지지 않는가. 볼까 말까 하다가도 몸도 마음도 지친 어느 주말을 위해선 스파이더맨이나 블랙팬서를 재탕하고 만다. 


    [벌레이야기]를 우연히 읽고 난 후,  [밀양]을 볼 수 있는 마음의 에너지가 채워졌다. 그래 지금이야! 하고 휴일에 영화를 재생했다.




    [벌레이야기]는 1981년의 '주영형 사건'을 바탕으로 1985년 쓰인 단편이다. 알암이란 아이가 주산 학원 원장 김도섭에게 유괴 및 살해당한 사건으로 시작한다. 이 소설의 초점은 유괴 사건보다는 남겨진 자들의 고통과 용서에 대한 담론에 있다. 


    그야말로 슬픔의 나락에 빠져있는 알암이 어머니에게 김집사라는 독실한 기독교인이 전도를 해온다. 알암이 어머니는 처음엔 거부하다가 신의 이름 아래 알암이가 평안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교회에 나가고, 범인을 용서하기로 마음먹는다. 하지만, 알암이 어머니가 교도소를 찾았을 때 이미 그 범인은 그 주님을 영접하고 스스로 회개하고 용서받았다 말한다. 그에 알암이 어머니는 완전히 붕괴된다. 

그래요. 내가 그 사람을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은 그것이 싫어서보다는 이미 내가 그러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게 된 때문이었어요. 집사님 말씀대로 그 사람은 이미 용서를 받고 있었어요. 나는 새삼스레 그를 용서할 수도 없었고, 그럴 필요도 없었어요. 하지만 나보다 누가 먼저 용서합니까. 내가 그를 아직 용서하지 않았는데 어느 누가 나 먼저 그를 용서하느냔 말이에요. 그의 죄가 나 밖에 누구에게서 먼저 용서될 수 있어요? 그럴 권리는 주님에게도 있을 수가 없어요. 그런데 주님께선 내게서 그걸 빼앗아가 버리신 거예요. 나는 주님에게 그를 용서할 기회마저 빼앗기고 만 거란 말이에요. 내가 어떻게 다시 그를 용서합니까. 

    약사인 알암이 어머니가 음독 자살하는 걸로 소설은 끝난다. 




    짧은 소설을 샅샅이 다시 뒤져봐도 알암이 어머니의 원망을 그냥 그대로 두는 사람들은 없었다. 얼른 털어내고 앞으로 가라며 떠미는 그 손길들에는 어떤 인내도 없었다.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는 말로 고통을 지켜봐 주지 않는 사람들 속에 알암이 어머니가 삭일 수 없는 분노는 결국 자신을 파훼하는 원동력이 되고 말았다. 


    신의 미명 아래 원망을 버리라는 '김집사'나,

그것은 다만 그 사람만을 위해서가 아니에요. 그 사람보다는 알암이 엄마 자신을 위하는 일이에요. 그리고 가엾은 알암이의 영혼을 위하는 일인 거예요. 알암이의 영혼과 애 엄마 자신을 위해서라도 그에게 너무 깊은 원망을 지니지 않도록 하세요. 그래서 마음을 편하게 가지도록 노력해 보세요. 그렇게 되도록 노력을 하시면 주님께서 반드시 도와주실 거예요 


    그런 김집사를 은근히 부추기는 남편인 '나'.

김 집사의 충고는 틀린 말이 아니었다. 인간의 권리나 그 한계에 대한 이야기도 이제는 아내가 귀를 기울여야 할 대목이었다. 아내에겐 아무래도 그 김 집사와 그녀가 인도하고자 하는 주님에의 의지가 크게 필요해 보였다. 그래 나 역시 아내에게 진심으로 그것을 권했다. 그리고 두 사람이 다 같이 교회를 나가자는 김 집사의 권유에 나는 우선 먼저 아내부터 좋은 길을 인도받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은근히 김 집사를 거들었다.

    

    함께 단장(斷腸)의 고통을 나눠야 하는 남편조차도 불가능한 용서를 바란다. 마치 신의 섭리를 이해하는 대리인인양 그들이 겪는 고통 밖에 서있다. 자식을 잔인하게 죽인 범인도 용서할 수 있는 그 대단한 '인간'이 될 수 없는 알암이 어머니가 외로운 '벌레'처럼 신의 성의 없는 장난질에 죽어 갈 수 밖엔 없었다. 




    하지만, 영화 [밀양]의 신애(전도연 분)는 결국에 살아남았다.


    소설과 마찬가지로 아이가 유괴, 살해되고 나서 해소될 수 없는 고통 겪는다. 그 고통으로부터 구원받기 위해 주님을 받아들이게 되며, 범인을 용서하고자 마음먹기에 이르는데 정작 범인은 이미 신에게 용서받았다 말한다. 용서할 기회조차 빼앗긴 신애가 하나님을 지독히 원망하며 자살 기도를 하는 부분까지도 같다. 하지만, 신애는 마침내 말한다


살려주세요...


    신애는 알암이 어머니와 달리, 어째서 끝내 스스로의 의지로 살고자 했을까?




    이창동 감독은 소설의 화자로 등장하는 남편을 사고사 처리(?)하고 신애 곁에 새로운 인물을 세웠다. 사망한 남편의 고향에 살고자 아들과 단 둘이 밀양으로 향하는 길에 우연히 만난 카센터 사장, 종찬(송강호 분)이었다.


    종찬은 한 마디로 말해 허세로 가득 찬 속물이다. 여자를 함부로 희롱하기도 하고, 돈 많은 '형님'의 위세에 기대어 젠체를 하기도 한다. 신애의 끈질긴 거부에도 더 끈질기게 옆자리를 비우지 않는 징글징글한 끈기를 자랑하기도 한다. 신애의 어떤 모습에 반해서 쫓아다니는지도 모르겠다. 그냥 남녀를 엮기 좋아하는 행님의 한마디에(분명히 어떻게 해보라는 너절한 농담이었을 것...) 꼭 좋아하라고 누가 정한 것처럼 신애 곁에 바짝 붙어 다녔다. 


    오지랖도 넓고 여기저기 가리지 않고 신애의 뭐라도 되는 양 설치고 다니는 꼴이 미웠다. 쉽게 생긴 마음이 얼마나 쉽게 변할까. 그런데, 신애의 절망 옆에도 노상 어리둥절, 잘 모르겠다는 표정을 한 종찬이 늘 있다는 걸 눈치챘다. 


    울지 못하는 신애 옆에도,

[밀양] 스틸컷

     그야말로 '고통'을 실체화하는 신애의 미친 듯한 울음 옆에서도,

[밀양] 스틸컷


    그 '고통'을 용서로 분해하려는 신애의 용감한 시도 옆에서도 근엄한 티벳 여우 같은 표정으로 신애를 지켜보고 있다. 

[밀양] 스틸컷


    종찬은 신애에게 아무것도 조언하지 않는다. 신을 믿으라던가, 용서를 하라던가, 용서하지 말라거나, 잊으라거나 하는 어떤 조언도 입에 올리지 않고, 그저 신애의 고통을 지켜본다. 끝내는 환청까지 듣게 되는 신애의 '헛소리'도 그저 들어준다. 신애에게 가짜 상장을 만들어주고 자기 일인 양 땅을 알아보러 다니던 종찬은 신애의 고통에는 쉽게 개입하지 않고 그냥 지켜만 본다. 마치 비밀스럽게 비추는 태양처럼 말이다.


    알암이 어머니와 다르게 신애는 그 밀양(密陽) 덕분에 충분히 고통당하고 살아남은 게 아닐까.




    사실 남의 고통을 그냥 두는 건 정말로 피곤한 일이다. 딱히 해주는 것도 없이 듣기만 해도 기운이 쭉쭉 빠져나가고 지친다. 그리곤 어쭙잖은 충고를 곁들인다. 빨리 그 고통에서 벗어나면 좋겠다는 애정이라고는 하지만 가끔은 나한테서 그 고통을 치워버리고 싶은 마음일 때가 있다.


    [벌레이야기]를 읽고 [밀양]을 보고 나니, 신이 나를 꼭 집어 내린 듯한 감당 할 수 없는 고통 앞에서 필요한 사람은 바로 종찬 같은 사람이었다. 


    이젠 누군가의 고통을 대할 때 종찬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머리를 반만 자르고 미용실에서 뛰쳐나온 신애의 기행에도 별말 없이 신애를 거울로 비춰주기만 하는 저 마음을 떠올려야겠다. 


[밀양] 스틸컷




인용 출처 : 이청준, 벌레이야기(문학과 지성사,2013) 

사진 출처 : 밀양, 이창동감독,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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