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2학년 수업시간 중에 갑자기 무섭게 몰려오는 심리적 부담감으로 내일이 아득하게 느껴졌다. 나를 향한 안팎의 기대감, 맞춰 걷지 않으면 낙오될 것 같은 불안함, 나를 바투 쫓아오는 의무감으로 숨통이 옥죄어 오던 걸 실감하던 순간이었다. 모든 억압에서 벗어나길 강하게 염원하니 집이 아니라 강원도 산골의 풍경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강원도에서 살고 싶다. 숲 속에서 살고 싶다.' 고 노트에 적기 시작했다. '숲'이라고 쓴 글자가 나의 숨통을 터주는 기분이 들었기에, 저 문장을 반복해서 적으며 들끓는 격정을 억누르고 있던 중이었다. 수업 중에 열렬히 딴짓을 하던 날 발견한 선생님이 뭘 하냐고 내 공책을 빼앗았다.
"..."
화를 낼 준비를 하던 선생님의 들숨이 맥없는 도피 욕구에 푸쉬시 식었다. 그리곤 연민으로 가득 찬 표정으로 다시 노트를 돌려주셨는데, '많이 힘들구나'라는 시선이 울음으로 가득 찬 마음의 봇물을 터트렸다. 내가 얼마나 서럽게 울었는지 수업이 중단됐다.
한바탕 울어 젖힌 후 민망하게도 내 마음은 폭풍이 지난 하늘처럼 맑게 개였다. 우울증은 아닌지 염려하는 선생님에게 순간적으로 스트레스를 받아서 눈물이 났다고 설명했고, 나도 그저 찰나의 반항 같은 마음이라고 여겼다. 부모님을 떠올리고 좋은 대학엘 가 좋아 보이는 인생을 살고 있는 사람들의 부러운 인생을 마음에 다시 새겼다. '정상' 궤도를 그저 빨리 달리기 위해 노력했다. 숲으로 가고 싶은 마음은 웃자라게 하는 곁가지라고 생각하고 가차 없이 잘라버렸다.
고등학교 시절로부터 까마득히 멀어진 지금에도 문득 숲이 생각났다. 이직이다 자기 계발이다 마음이 쫓길 때는 늘 숲으로 가고 싶다고 바랐다. 현실이 내 발목을 잡다 못해 구렁이처럼 허리를 감고 옥죄는 지금, 마음이라도 숲으로 향하고 싶을 때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월든]을 펼친다. 그는 2년 2개월간 월든호를 둘러싼 숲에서 자급자족하며 최소한의 노동으로 삶의 본질을 찾아가는 실험적인 삶을 살았다. 극도로 소비를 제한하여 노동할 필요를 줄이고, 독서, 글쓰기, 산책, 지식인들과의 교류 등 본인이 진정 가치를 느끼는 일로 시간을 보낸다. '얘들아. 이렇게 사는 것도 가능하다?'라고 문명사회를 벗어난 삶이 가능함을 몸소 증명한다. 또 하나의 삶의 방식이 내 앞에 선택지로 놓여있다는 걸 아는 것만으로도 숨통이 조금 트인다.
내가 숲 속으로 들어간 이유는 깨어 있는 삶을 살기 위해서였다.
삶의 본질적인 사실만은 직면하고 거기서 교훈을 얻을 수 있을지 알아보고,
내가 숨을 거둘 때 깨어 있는 삶을 살지 않은 것을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숲으로 달려가고 싶은 충동의 저변에는 소로와 같이 삶의 본질을 놓치고 있다는 두려움이 있다. '갓생' 사는 직장인이 되기 위해서 회사에선 일을, 출퇴근 길엔 자기 계발을 하고 집에선 그럴듯한 취미를 갈고닦는 삶을 살다 어느 순간 깨닫는다. 내 삶이 남김없이 소진되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우리는 왜 그렇게 서둘러 인생을 낭비하며 사는가? 우리는 배가 고프기도 전에 굶주리게 될 것이라 단정한다. 사람들은 제때의 바느질 한 땀이 아홉 땀의 수고를 던다고 하면서 내일 아홉 땀의 수고를 덜기 위해 오늘 천 땀의 바느질을 한다. 우리가 하는 ‘일’ 가운데 진정 중요한 일은 하나도 없다.
매일 내일을 위한 천 땀의 바느질을 하고 나서 숨을 몰아쉰다. 뒤를 돌아보면 내가 수놓은 바느질은 화려하게 빛나지만 결국 나에게는 무엇이 남아있는가. 나에 대한 진실한 사유가 하나라도 남아있는가. 하루를 채우는 나의 '열심'이 그저 남들이 세운 목적을 쫓아가기 위함이라면 나는 삶을 펑펑 낭비하고 있는 셈이다. 시간들이 모래알처럼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는 걸 느낄 때마다 두려워지지만, 두려움은 잠깐이고 한 낮이 되면 생산성을 높이는데 혈안이 된 채 열심히 남들과 같은 방향으로 달린다. 그래서 소로의 글이 필요하다. 정신없이 서두르는 나에게 제동을 걸어준다.
진짜 '필요'가 무엇인지 구분하고 살라는 경고가 나에게 필요하다. 무한한 필요의 탈을 쓴 불필요가 매일 나를 현혹한다... 소비하게 한다. 처음엔 기호였다가 이젠 필요가 된 '필수품'이 얼마나 많은가. 예를 들면, 스마트 워치. 처음에 스마트 워치를 선물 받았을 땐 별 필요가 없는 제품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지금은 어떠한가. 한참 운동하고 있는 중에 애플 워치가 방전됐을 때 바로 새로운 제품이 얼마인지 검색해보고 사려했다. 운동이나 건강 데이터를 놓치는 걸 않기 위해 배터리 용량이 개선된 애플 워치가 '필수적'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수많은 '필요'가 나를 더 튼튼한 노동의 굴레에 가둔다.
사람들은 남들처럼 집을 장만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쓸데없이 평생을 빈곤하게 산다. 종려나무 잎이나 우드척 가죽으로 만든 모자를 버리고 재단사가 만든 맞춤 외투를 입으려 하고, 경기가 나빠져 왕관을 사기 어렵다고 불평한다. 우리는 왜 이렇게 늘 더 많이 소유하려고 하는가?
한 평 더 넓은 집에 살고 상급지로 이사하는 것이 '필요'라고 확신하는 순간 끝없는 상승 욕구에 일을 멈출 수가 없다. 부를 남들보다 더 많이 확보하는 것 이외의 다른 가치에 눈 돌릴 여유가 없다. 19세기에도 저택을 소유하기 위해 뼈 빠지게 평생 일만 하는 사람들을 보며 고급 저택은 그저 죽을 때 더 많은 장례비용을 남긴다는 가치뿐이라고 일축한 소로가 지금의 과열된 소유욕들을 보면 뭐라고 말했을까. 그냥 본인의 저서를 내밀지 않았을까.
사람들은 흔히 ‘필요'라고 불리는, 운명처럼 보이는 것에 발목을 잡혀 곧 좀먹고 녹슬고 도둑이 침입해 훔쳐 갈 재물을 축적하느라 안간힘을 쓴다.
소로의 주장을 듣다 보면 마치 그리스 철학자들의 이분법적 사고에 기반하는 것처럼 보인다. 물질은 중요하지 않고 오로지 관념을 중시하며, 진짜 중요한 건 이데아 저 편에 있다고 하는 것처럼 말이다. 소로는 저서 [월든]의 반 이상의 페이지를 할애해 자신을 둘러싼 자연을 상세히 묘사했다. 소로의 오두막을 자주 방문했던 동물들의 종류를 나열하기도 하고 지형에 대해 자세히 소개하기도 한다. 또한 어떻게 최소한의 돈으로 먹고살 수 있었는지 생정 브이로그 뺨치게 자세하고 유용한 후기를 남겼다. 소로의 삶은 현실에 단단히 기반하고 있고, 단지 수단을 목적화한 빈번한 사례에 대해 경계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 삶에 '진짜'만을 남기기 위한 노력, 그뿐이다.
무엇을 소유하느냐로 나를 정의하는 시대에 월든의 메시지는 깊은 울림을 주기도 하지만 혹자에게는 뭘 모르는 19세기 철학자의 한심한 헛소리로 들리기도 한다. 더 젊고 질 좋은 노동 인력이나 운영 비용이 더 싼 기계에게 언제든 교체당할 수 있고, 역병은 창궐하며 날로 환경은 파괴되고, 물도 공기도 돈 주고 사야 하는 이 물질 만능 시대에서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해봤냐고 따지고 싶을 수도 있다. 그러나, 문명이 더 고도로 발전할수록 소로의 메시지는 가치 있다. 끝없는 경쟁을 통해 무한히 발전하는 세상에 살수록, 눈과 귀를 막고 남들이 욕망하는 대로 어렴풋이 쫓아가기 급급하기 쉽다. 내가 삶을 항해 중인 여행자구나! 나의 삶의 방향은 내가 정해야 하는구나! 내가 가진 아파트 값과 내가 다니고 있는 회사의 시가 총액으로 내 본질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구나! 깨닫기 위해 한 번쯤은 소로의 말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문명 세계의 삶이라는 역랑 한가운데는 구름이 짙고 폭풍이 불고 모래 지옥이 도사리고 있으며 그 밖에도 수많은 고비를 헤치고 나아가야 한다. 그러므로 바다 밑바닥에 가라앉지 않고 항구에 무사히 도착하라면 철저히 삶의 항로를 계산하여 방향을 잡아야 한다.
이는 모래 폭풍 속에서 길을 잃은 여행자임을 자각하는 지점에서 출발한다. 욕망을 설계당하고 그대로 행동하는 소비 기계와 같은 삶에서 벗어나기 위한 출발이다. 물론 출발하더라도 바로 길을 잃을 수 있다. '쓸데없는 가십을 읽으면서 내 삶을 낭비하지 않겠어!'라고 다짐한 지 하루도 되지 않아 연예인 열애 가십에 휘말려 길을 잃었다. 인스타그램이니 트위터니 하는 모래 지옥이 너무 매혹적이라 그 고비를 헤치고 나기가 힘들다. 소로의 시대에 스마트폰이 있었다면 과연 그가 숲으로 들어갈 수 있었을까 의심스러울 정도로.
소로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 같은 그 모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삶의 항로를 계산하고자 하는 노력이 지속되어야 한다. 의미 없이 살지 않기 위한 발버둥이 아주 조금씩이라도 나를 무겁고 단단하게 만들 수 있다고 믿는다.
원의 중심에서 그릴 수 있는 반경의 수만큼이나 살아가는 방법은 무한하다. 변화는 모두 기적이고 그 기적을 우리는 눈여겨봐야 한다.
이를 위해 소로가 우리 모두 숲으로 돌아가 금욕의 삶을 살자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삶의 반경에서 나만의 방식으로 살라고 명시한다. 그가 숲으로 들어간 목적인 일상을 단순화시키고 필요와 불필요를 심사숙고하는 장소가 나만의 '월든'이 된다. 화살과 같은 속도로 죽음에 다다르고 있는 우리의 찰나의 삶을 충실하게 살 수 있도록 나를 찾는 공간은 꼭 피톤치드로 가득 차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도움은 될 것 같다...)
Now comes good sailing
드디어 멋진 항해를 시작한다
소로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에는 적어도 인생에 대해 충분히 고민했다는 자신감이 담겨있다. 대충 손이 가고 마음이 가는 대로 편하게 남들처럼 살고 싶고 정신 차려 보면 그렇게 살게 되는 관성을 이겨낸 의지가 느껴진다. 일상의 거추장스러운 장식을 떼어내고 숲 속에서 금욕적이고 단순하게 사는 삶을 통해 본질을 찾는 방식을 실험해 본 소로. 그가 동서고금을 아우르는 방대한 지식을 적절하게 비유로 녹여내며 유려하게 전달하고 있는 글들은 마음속에 오래 남는다. 남아있는 그의 글들을 연료 삼아 나의 삶의 분명한 잣대를 세우고 그 표지를 따라 항해할 수 있도록 또다시 다짐해본다.
인용 출처 : 헨리 데이비드 소로. (2014). 월든. 펭귄클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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