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순일까.

내 상처가 해낸 일

by 홍달화

맑았다. 겨울 볕이 따스하고 맑았다. 날씨에 의해 기분을 탄다면 그날은 기분이 좋은 날이었다. 휴대전화 소리도 맑게 울렸다. 한껏 밝은 톤으로 "언니"를 불렀다. 그날의 통화는 한 시간이 넘어서야 끝났다.

언니는 '자신을 가장 잘 아는 친구'라고 사람들에게 평소 나를 소개했고, 나 역시 그러했다. 애써 파고들면 자잘한 갈등이야 있었겠지만, 표면화될 정도의 균열은 아니었고, 10년 여의 시간을 좋게 좋게 지내왔었다. 그런데 맑고 따스했던 그날, 언니는 내가 알지 못하는 이유로 나에게 크게 화가 나 있었고 고함을 질렀다. 그 고함을 듣던 끝에 결국 전에 없는 소리를 나도 내질렀다. 파국. 맑고 따스했던 그날, 우리는 독을 내뿜었다. 전화를 끊고 결국 탈진했다. 아마 언니도 그랬을 거다.


'미안하다, 내가 몰랐네.'

'뒤끝 없다, 난!'


아니었다. 겉으로는 아무 일 없던 것처럼 했지만 틈이 벌어져 있었다. 나를 바라보는 언니의 시선이 허공을 향할 때가 많았다. 예전처럼 시답잖은 농담을 하며 깔깔거리지 못했다. 시답잖은 농담은 말 그대로 시답잖게 흩어졌다. 그나마 같은 프로젝트를 하느라 정기적으로 만났던 우리는 얼마 후 정기적 만남마저 끝을 맺었다. 언니는 프로젝트에서 빠졌고 그 일로 상처를 크게 입었다.

만날 일이 없어진 우리는 일부러 만날 일을 만들지 못했다. 언니의 상처는 컸고, 어쩌다 작은 선물이라도 보내면 문자로만 답을 했다. 신년 인사에도 그랬고, 생일 축하 인사에도 그랬다.

일 년, 그리고 조금 더... 시간이 흘렀다. 나에게도 큰 폭풍이 몰아닥쳤다. 언니처럼 나도 프로젝트에서 빠지게 됐다. 예상 못한 펀치에 영혼이 탈탈 털려 있던 어느 날, 약속이 있어 잰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시원한 맥주 한 잔 하기 위한 약속. 통창으로 된 맥줏집 앞에 막 도착했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언니였다. 절대 벨소리를 울리지 않았던 언니. 전화를 받았다.

소문을 들었다, 너 진짜 열받았겠다!

언니는 나를 위해 시원하게 욕을 날렸고, 덕분에 난 길거리에서 큰 소리로 웃었다.

초여름 오후, 가게 안에 앉아있는 친구를 통창으로 바라보며 긴 통화를 했다. 통창 안 마저 맑아 보인 날.


"불행이 나쁜 것만 있는 건 아니었네!"


우리는 동지가 됐다. 같은 상처를 지닌 동지. 남다른 결속력이 생겼다. 언니는 다시 언니로 돌아왔다. 그날 이후 언니는 날 불러서 밥을 사줬고, 건강 챙기라며 영양제를 보내주기까지 했다. 며칠 전에는 한 시간 넘게 수다를 떨었다.

'너랑 나는 잘 맞으니 언니가 기획하는 프로젝트 함께 하자!'

'너 능력 있잖아!'


상처 입은 사람들을 위로하는 것은 말이 아니었다. 상처는 상처로 위로해야

효엄이 있는 법이었다. 당신이 겪고 있는 아픔은 그것인가. 자, 여기 나도 비슷한

아픔을 겪었다. 어쩌면 내 것이 당신 것보다 더 큰 아픔일지도 모르겠다. 내 불행에
비하면 당신은 그나마 천만 다행히 아닌가…….

- 양귀자 『모순』 p.188


상대의 상처가 내 상처로 아물어지는 것. 이런 것이 '모순'일까.

나 또한 누군가의 상처로 내 상처를 쓰다듬었던 적이 있겠지.


언니의 전화가 울릴 때마다 웃음이 난다.

언니의 투명함에.


전화가 오겠지 하는 타이밍에 여지없이 전화를 하는 사람.

역시 내가 언니를 가장 잘 아는 게 맞는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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