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비평] TVING Original 서울체크인
최근 ‘회귀물’이 젊은 세대에서 유행이다. 현재까지 알고 있는 모든 기억을 그대로 가진 채로 과거로 돌아가 인생의 기회를 다시 얻는 설정을 가진 장르를 ‘회귀물’이라 부른다. 사실 최근이라고 하기엔 웹툰이나 웹소설 분야에서는 2010년 후반에 이미 크게 유행했던 설정이지만, 드라마, 영화 등 대중의 보편적 관심사로 올라온 것은 이번 연도부터다.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음)같은 자조적 유행어에서도 볼 수 있듯이 현실의 어려움이나 삶에 대한 불만 등을 탈피하고자 하는 청년 세대의 욕망이 회귀물의 유행으로 번져갔다고 봐도 무방하다 할 수 있다.
2022년 UN산하 자문기구 지속가능발전해법네트워크(SDSN)가 발표한 ‘2022년 세계 행복 보고서(2021 World Happiness Report)’에 따르면 지난 2019~2021년 한국의 행복지수는 대상 146개국 가운데 59번째로 나타났다. 이는 OECD 국가 37개국 중 최하위권이다. 거기에다 청년 자살률 OECD 국가 중 1위, 30%에 육박하는 청년 경제 고통 지수까지 살펴보면 대한민국 청년들의 삶이 얼마나 힘든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렇게 팍팍한 삶 속에서 무엇을 의지하며 살아가야 할까. 개인의 의지로 상황을 바꾸기 어려우니 ‘회귀물’ 등을 통해 현실에서 도피하는 방법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인 걸까.
하지만 현실은 언제까지 도피할 수만 있는 것은 아니다. 잠깐 잊을 수는 있을지 몰라도, 어쨌든 현실의 삶은 살아가야 한다. 우리는 삶을 살아가다 보면 필연적으로 나보다 앞서간 누군가를 만날 때가 있다. 그를 통해 내가 겪고 있는 어려움이 나만의 것도 아니며, 나를 지지해주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삶의 무게를 견딜 힘을 얻게 된다.
작년 이맘때쯤, 한 방송국의 막내 PD로 일한 적이 있었다. 계약직에 박봉이었지만, 오래도록 꿈꾸던 일이었기에 부푼 마음으로 일을 시작했다. 하지만 PD의 일은 생각보다 더 고단했다. 밤샘 편집으로 인해 집에 들어가지 못하는 날이 더 많았고, 방송국 내부의 문화라며 예사로 쏟아지는 욕설에 자존감은 점점 낮아져만 갔다.
처진 어깨와 다크서클 가득한 얼굴로 편집실과 촬영 현장에서 ‘버티던’ 생활이 한 달째 되던 어느 날이었다. PD의 꿈을 꾸면서부터 동경했던 PD님을 회사 복도에서 우연히 마주쳤다. 그는 같은 회사 다른 팀 PD였다. 그가 쓴 책을 인상 깊게 읽었던 터라, 떨리는 마음으로 사인을 요청했다. 그런데 그는 사인은 물론이요, 흔쾌히 커피까지 대접하겠다고 했다. 함께 카페에 간 그날, 그는 자신의 조연출 시절을 이야기하며 ‘힘든 것 다 이해한다’고 따뜻한 위로들을 건넸다. ‘힘들지 않냐’는 질문을 처음 받아서 그랬던 것인지, 존경하는 인물이 나에게 관심을 가져줬다는 것에서 오는 황홀감에서 오는 용기였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만 초면임을 잊어버린 채 첫 사회생활의 서러움을 봇물 터지듯 쏟아냈었다.
그날 이후, 나의 지옥 같던 회사 생활은 180도 달라졌다. 열악한 근무 환경과 감정노동은 계속됐지만, 같은 길을 먼저 걸어본 것에서 나와 공감대를 갖고 나를 이해해주는 선배가 한 명 생겼기 때문이다. 일주일에 한 번, 그에게 찾아가 일하면서 서러웠던 경험을 털어놓고 직업에 대해 가졌던 근본적인 질문과 함께 고민 상담까지 할 수 있었다. 혼자 내던져진 것 같은 세상에서 같은 경험을 공유하고, 그 고충을 이해할 수 있는 선배가 한 명이라도 있다는 것은 살아갈 용기를 준다. 힘들었던 프로그램을 시즌 끝까지 버틸 수 있었던 힘도 거기에서 왔다. 회사를 그만둔 뒤에도, 지금까지 그 인연이 이어지는 것 또한 그때 느꼈던 위로와 연대 덕분이었으리라.
서울체크인은 바로 그 위로와 연대에 대한 이야기다. 프로그램 전반에 '나는 혼자가 아니다, 나만 외로운 게 아니다'라는, 메시지가 깔려있다. 삶은 누구에게도 쉽지 않다는 사실에 대한 공감, 나보다 먼저 같은 길을 걸어간 선배와 지금 함께 걷고 있는 동료들에게서 느끼는 위로 등을 담은 프로그램이다.
<서울체크인>은 <무한도전>으로 대한민국 예능계에 한 획을 그었던 김태호 PD가 MBC 퇴사 후 TVING에서 처음으로 선보인 예능이다. 제주살이 9년 차 이효리가 서울에서 개인 일정을 소화한 후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잔잔한 톤으로 담아내는 다큐멘터리 같은 관찰 예능이다.
이효리는 언론 인터뷰를 통해 ‘유명하지만 조용히 살고 싶고, 조용히 살고 싶지만 잊히고 싶지는 않다’고 몇 차례 솔직한 심정을 밝힌 바 있다. 이효리는 연예인 외의 미래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고 말할 정도로 이른바 ‘본투비 연예인’이었다. 집안 형편이 어려웠기에 어려서부터 부모님 일을 도왔고, 학창 시절부터 경제활동을 하면서도 연예인의 꿈을 잃지 않았다. 하지만 동시에 낯선 시선을 두려워하는 자아도 가지고 있었다. 인기가 많아질수록 화려한 인기 뒤에 있는 공허함에 힘들어했다.
자기모순과 혼란스러운 감정에 힘들어할 때, 지인의 권유로 받은 정신과 상담은 변화의 계기가 되었다. 동물 보호에 관심을 두게 되어, 과도한 공장 사육을 자제했으면 하는 바람에서 채식주의를 홍보하고, 유기견 동물 보호와 독거노인 보호에 앞장서기 시작했다. 그리고 대한민국의 슈퍼스타였던 이효리는 2013년 9월 1일, 당시 대중에게 생소한 기타리스트 이상순과의 결혼식과 함께 중심부였던 서울을 떠나 제주도로 내려가게 된다. <서울체크인>은 이효리가 대중의 관심에서 벗어나 자기 모습을 찾으려 했던 그만의 철학과, 동시에 대중에게서 잊히는 것을 두려워하는 모순적인 감정을 담아냈다.
<서울체크인>은 음악 시상식 MAMA 최초의 여성 호스트로 초청된 이효리의 무대로 시작한다. 무대는 이효리와 이른바 최근 대세 연예인인 ‘스트리트 우먼 파이트’ 멤버들의 합동 공연으로 구성되었다. 공연 리허설을 마친 뒤, 이효리는 대기실에서 스태프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지금 어떤 기분인 줄 알아? 세상은 다 바뀌었는데 다 바뀐 세상에 나 혼자 턱 와있는 느낌 있지. 옆방에 원더걸스 있고 저쪽 방에 비 있고. 그 똑같은 풍경에서 다 없고 나만 있는 기분이야.”
모두가 변한 세상에 자신만 변하지 않고 홀로 있는 것 같다는 이효리의 고백은 많은 사람의 공감을 자아냈다. 비록 자발적 은퇴를 통해 중심에서 주변으로 이동했지만 격변하는 중심이 낯설게 여겨지는 소외감을 표현한 말이기도 했고, 빠르게 변해가는 시스템과 빠르게 사람을 갈아치우는 시대를 바라보며 한탄하는 말이기도 했다.
당연히 대부분 시청자들이 댄스 가수의 삶을 경험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변화의 속도가 유난히 빠른 과부하 한국 사회에서 낯선 세상에 혼자 내던져진 것 같은 경험, 다들 달리고 있으니 나도 달리고 있는데 어디로 가고 있는지 문득 의문을 품게 되는 경험, 한 발이라도 어긋나면 영영 뒤처지고 말 것 같은 불안함을 가졌던 경험 등은 우리 모두 한 번씩은 해봤을 터이기 때문이다.
트렌드세터이자 유행의 아이콘이었던 이효리가 서울을 어색해하고 ‘나 혼자만 다른 것 같다’며 외로움을 표현하는 것을 보며 시청자들은 나만 외로운 것이 아니라는 안도감과 함께 변화하는 세상에서 느끼는 고독이 결코 이상한 것이 아니라는 따뜻한 위로를 얻는다.
이효리가 낯선 서울에 올라오면서 가방 하나만 가지고 올라올 수 있는 이유는, 매번 자신을 반겨주는 엄정화가 있기 때문이다. <서울체크인>에서는 이효리가 엄정화의 집에 머무르면서 무대에서 느꼈던 외로움, 여성 댄스가수로서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에 대한 씁쓸한 감정 등에 관해 이야기 하는 장면이 담긴다.
“언니는 언니 없이 어떻게 버텼어요? 언니는 위에 이런 선배가 없잖아요. 그럼 이런 기분 들 때 어떻게 버텼어요?”
“몰라 술 마셨어. 재형이 붙들고 울었지.”
저녁 늦게까지 엄정화와 이효리는 가요계에서 자신들이 지나온 삶과 느끼는 감정에 관해 이야기하다가 즉흥적으로 여성 댄스 가수 브런치 모임을 기획하게 된다. 그렇게 김완선, 엄정화, 이효리, 보아, 화사까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여성 댄스 가수들이 한자리에 모이게 된다.
그들은 처음 만난 자리에서 댄스 가수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공감대를 빠르게 형성한다. 보아가 일본 쇼케이스를 한 번 망친 뒤 무대공포증이 생겼다는 말에 엄정화가 눈물을 흘리기도 하며, 사람들의 시선이 부담스럽지 않냐는 물음에 김완선은 ‘이제는 나를 향한 시선이 없다’고 대답하자 모두가 깔깔거리며 웃음을 짓는다.
<서울체크인> 4화에서는 여성 댄스가수 5명이 김완선의 집에 초청받아 홈파티 하는 내용이 나온다. 이효리는 김완선의 집에서 김완선이 그린 프리다 칼로의 그림을 보게 된다. 그림 밑에는 프리다 칼로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일기에 남긴 말이 적혀있었다. ‘I hope the exit joyful, and I hope never to return (이 죽음의 여행이 행복하기를, 그리고 다시 돌아오지 않기를)’ 그림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이효리는 김완선에게 이렇게 묻는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언니도 그래요? Never to return?”
“당연하지~ 한 번 살았으면 됐지 뭘 또 살아. 그래서 매일매일 즐겁게 살아 행복하게.”
프리다 칼로는 멕시코의 가장 위대한 여성 화가이자, 사회 운동가로 알려져 있다. 그는 소아마비, 전차 교통사고, 남편의 잦은 외도, 평생 35번의 수술과 3번의 유산을 겪으며 그 고통을 그림으로 승화시킨 인물이다. 대화가 끝난 뒤에도 이효리는 생각이 잠긴 듯 그림 앞에 서서 한참 바라본다.
시청자들은 김완선과 이효리의 대화를 완전히 이해할 수도, 공감 할수도 없다. 하지만 투쟁과 같았던 프리다 칼로의 작품과 가혹한 타인들의 시선과 평가에 시달려왔던 여성 스타들의 삶을 겹쳐보며 아무리 큰 영광을 누렸을지라도, 그때로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그들의 속내를 어렴풋이나마 느낄 수 있다. 이는 우리 사회를 살아가며 느끼는 일반의 감정과 맞닿아 있는 부분이 있다.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 다른 사람의 평가에 의존할 수밖에 없으며, 성공을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치열한 경쟁을 거쳐야만 한다는 것은 스타나 유명인이 아니더라도 우리 사회에 속한 모두가 처한 조건이기 때문이다.
이효리의 <서울체크인>은 단순히 슈퍼스타 이효리의 관찰 예능이 아니라, 우리가 모두 삶에서 한 번쯤은 겪어본 외로움과 낯섦에 대한 이야기다. 우리는 연대하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사회적 동물이다. 사람은 사회적 관계 속에서 존재를 확인하고, 누군가와 함께하고 있다는 연대로 세상을 살아갈 힘을 얻는다. 이효리가 서울을 ‘체크인’하는 과정에서 선배들과 친구들에게 얻었던 위로와 연대는 우리에게 다시 한번 일깨워 준다. 우리가 삶 속에서 끊임없이 낯선 곳에 ‘체크인’하면서도 살아갈 수 있게 하는 힘이 무엇인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