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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떠도는 자의 노래 May 19. 2022

한국의 서낭당 - 쉬어가는 글③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난 성황(城隍)에 관한 기록

조선왕조 실록에 성황이라는 키워드로 검색을 하면 모두 158건의 기사가 검색된다. 이 기사들을 찬찬히 살펴보면 당시 조정에서는 성황에 대해서 어떤 시각과 인식을 가지고 있었는지 파악할 수 있다. 다만, 여기에 언급되는 성황은 '서낭'이 아닌 중국에서 건너온 '성황'이다. 완전히 다른 개념이다. 하늘을 희구하며, 현세의 발복과 무사 평안을 기원하는 우리의 정신과 영혼이 응집된 마을/공동체 신앙인 '서낭'과는 시작부터 지금까지 완전히 궤를 달리하는 중국에서 수입된 관치(官置) 신앙이다.


그럼에도 왕조실록의 '성황'관련 기사를 살펴보는 것은, 상술한 서낭과는 다른 개념을 명확하게 인식하기 위한 선행 요건이라고 할 수 있기에 무척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조선 건국의 시기부터 조정 대신들 사이에서 '성황'은 어떻게 인식되고 받아들여졌는지에 대해서 큰 흐름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기사만 연대순으로 뽑아서 옮겨 본다.




태조 1년 임신(1392) 8월 11일(경신) 기사

역대의 사전(祀典)에 대한 상서문. 불경의 백고좌 법석, 7개 도량의 내력을 상고케 하다


禮曹典書趙璞等上書曰:

圓丘, 天子祭天之禮, 請罷之。 

諸神廟及諸州郡城隍, 國祭所請許, 只稱某州某郡城隍之神, 設置位板, 各其守令, 每於春秋行祭, 奠物祭器酌獻之禮, 一依朝廷禮制。


원구(圜丘)는 천자(天子)가 하늘에 제사 지내는 예절이니, 이를 폐지하기를 청합니다. 여러 신묘(神廟)와 여러 주군(州郡)의 성황(城隍)은 나라의 제소(祭所)이니, 다만 모주(某州), 모군(某郡) 성황(城隍)의 신(神)이라 일컫고, 위판(位板)을 설치하여, 각기 그 고을 수령(守令)에게 매양 봄ㆍ가을에 제사를 지내도록 하고, 전물(奠物)ㆍ제기(祭器)ㆍ작헌(酌獻)의 예(禮)는 한결같이 조정(朝廷)의 예제(禮制)에 의거하도록 하소서.


원구(圓丘)는 천자(天子)만이 제사를 올릴 수 있었다. 우리 땅에 원구단은 고려시대부터 있었다고 하나, 조선 건국 이후에 천자의 나라에서 왕의 나라가 되어버려, 대신들이 지속적으로 원구단의 폐지를 주장하여, 결국 원구단은 사라진다. 다만, 주(州) 군(郡)에 설치되어 있던 성황(城隍)은 나라의 예법에 따라서 관리하도록 하니 당시 성황은 관치(官置)의 시설이었음을 알 수 있다.




태종 2년 임오(1402) 11월 7일(병술)

태상왕의 행재소에 심종ㆍ유창을 보내어 시위케 하다


太上王於所過州郡城隍有神之處, 皆以衣襯玉帛禮之曰...


태상왕이 지나는 주군(州郡)의 성황(城隍)으로 신(神)이 있는 곳에 모두 의친ㆍ옥백으로써 예(禮)를 행하고 말하였다...


상왕이 지나는 주군의 성황당마다 직접 예를 행했다고 하니, 당시 성황의 위격을 알 수 있다. 더불어, 우리가 지금 성황당이라고 부르는 마을 제당과는 다른 성격의 시설이었음도 유추할 수 있다.




태종 6년 병술(1406) 1월 7일(무술)

백악산 성황당의 신에게 녹봉을 주다


戊戌/給白嶽城隍神祿。 前此, 給祿於松嶽城隍神, 以定都漢陽, 故移給之。


백악(白嶽)의 성황신(城隍神)에게 녹(祿)을 주었다. 이전에는 송악(松嶽)의 성황신에게 녹을 주었는데, 한양으로 도읍을 정하였기 때문에 옮겨서 준 것이다.


고려의 수도는 개경(송악)이었지만, 조선 건국에 따라 서울(한양)으로 이도했기 때문에 백악(지금의 북악)의 성황에 녹을 주었다는 기사. 





태종 6년 병술(1406) 6월 5일(계해)

서북면 도순문사 조박이 평양부 토관 제도에 대해 계문하다


大興部、龍德部 、龍興部 、川德部、 興土部。 已上五部, 掌戶籍。 東西南北都監官員各四, 東西南北城隍都監官員各四, 都計三十二人, 閑游食祿, 避軍役未便。


대흥부(大興部)ㆍ용덕부(龍德部)ㆍ용흥부(龍興部)ㆍ천덕부(川德部)ㆍ흥토부(興土部) 이상 5부는 호적을 맡으므로, 동ㆍ서ㆍ남ㆍ북 도감(都監)의 관원이 각각 4명, 동ㆍ서ㆍ남ㆍ북 성황 도감(城隍都監)의 관원 각각 4명, 도합 32명이 한가하게 놀고 녹(祿)을 먹으면서 군역(軍役)을 피하니, 미편(未便)합니다.


왕조실록에 처음 등장하는 성황(城隍)에 대한 부정적인 기사. 당시 관직이었던 성황 도감(城隍都監)은 요새의 말로 하면 '땡보직'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태종 13년 계사(1413) 6월 8일(을묘)

예조에서 사전(祀典)을 개정하여 올리다


及我太祖卽位之初, 本曹建議, 各官城隍之神, 革去爵號, 但稱某州城隍之神, 卽蒙兪允, 已爲著令。 有司因循至今, 莫之擧行, 爵號像設, 尙仍其舊, 以行淫祀。 伏望申明太祖已降敎旨, 但稱某州城隍之神, 只留神主一位, 其妻妾等神, 悉皆去之; 山川海島之神, 亦留主神一位, 皆題木主曰某海某山川之神, 其像設, 竝皆徹去, 以正祀典。" 從之。


우리 태조(太祖)가 즉위하자  본조(本曹)에서 건의하기를, ‘각관(各官)의 성황지신(城隍之神) 작호를 혁거(革去)하고, 단지 모주(某州)의 성황지신이라 부르게 하소서.’하여, 즉시 유윤(兪允)을 받아 이미 뚜렷한 법령으로 되었으나, 유사(有司)에서 지금까지 그대로 따라 이를 행하지 않아 작호(爵號)와 상설(像說)이 아직도 그전대로이어서 음사(淫祀)를 행하니, 엎드려 바라건대, 태조가 이미 내린 교지를 거듭 밝혀 단지 ‘모주(某州)의 성황지신(城隍之神)이라’ 부르게 하고, 신주(神主) 1위(位)만 남겨 두되 그 처첩(妻妾) 등의 신은 모두 다 버리게 하소서. 산천(山川)·해도(海島)의 신 역시 주신(主神) 1위만을 남겨 두고 모두 목주(木主)에 쓰기를, ‘모해(某海)·모산천지신(某山川之神)’이라 하고, 그 상설(像設)은 모두 다 철거(撤去)하여 사전(祀典)을 바르게 하소서." 이에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조선 건국 당시에 태조의 명에 따라서 각 고을에 난립한 성황당을 혁파케 하고 고을마다 관치의 성황당의 관리를 법령에 따르게 하였으나, 일선에서는 여전히 삿된 방식과 절차로 성황당이 관리되고 있음을 개탄한 기사. 관치 성황당에서도 신격의 확장과 변화가 일어나서 성황신 이외에 부인과 첩 등을 신으로 모시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변화는 민간신앙에도 영향을 끼치게 된다.





태종 14년 갑오(1414) 8월 21일(신유)

예조에서 산천에 지내는 제사에 대한 규정을 상정하다


禮曹上山川祀典之制: "謹按唐 《禮樂志》, 嶽鎭海瀆爲中祀, 山林川澤爲小祀, 《文獻通考》 宋制, 亦以嶽鎭海瀆爲中祀。 本朝承前朝之制, 山川之祀, 未分等第, 境內名山大川及諸山川, 乞依古制, 分等第。" 從之, 嶽海瀆爲中祀, 諸山川爲小祀。 京城 三角山之神、漢江之神, 京畿 松嶽山、德津, 忠淸道 熊津, 慶尙道 伽耶津, 全羅道 智異山、南海, 江原道 東海, 豐海道 西海, 永吉道 鼻白山, 平安道 鴨綠江、平壤江皆中祀; 京城 木覓, 京畿 五冠山、紺岳山、楊津, 忠淸道 雞龍山、竹嶺山、楊津溟所, 慶尙道 亏弗神館 主屹山, 全羅道 全州城隍、錦城山, 江原道 雉嶽山、義舘嶺、德津 溟所, 豊海道 牛耳山、長山串、阿斯津、松串, 永吉道 永興城隍、咸興城隍、沸流水, 平安道 淸川江、九津、溺水皆小祀, 在前所在官行。 京畿 龍虎山、華嶽, 慶尙道 晋州城隍, 永吉道 顯德鎭、白頭山, 此皆仍舊所在官自行, 永安城、貞州牧監、九龍山、因達巖皆革去。 又啓: "開城 大井、牛峰、朴淵旣非名山大川, 乞依華嶽山、龍虎山例, 令所在官行祭。" 從之。


"삼가 《당서(唐書)》 《예악지(禮樂志)》를 보니, 악(嶽)·진(鎭)·해(海)·독(瀆)은 중사(中祀)로 하였고, 산(山)·임(林)·천(川)·택(澤)은 소사(小祀)로 하였고, 《문헌통고(文獻通考)》의 송(宋)나라 제도에서도 또한 악(嶽)·진(鎭)·해(海)·독(瀆)은 중사(中祀)로 하였습니다. 본조(本朝)에서는 전조(前朝)의 제도를 이어받아 산천(山川)의 제사는 등제(等第)를 나누지 않았는데, 경내(境內)의 명산 대천(名山大川)과 여러 산천(山川)을 빌건대, 고제(古制)에 의하여 등제(等第)를 나누소서."


임금이 그대로 따라서 악(嶽)·해(海)·독(瀆)은 중사(中祀)로 삼고, 여러 산천(山川)은 소사(小祀)로 삼았다. 경성(京城) 삼각산(三角山)의 신(神)·한강(漢江)의 신, 경기의 송악산(松嶽山)·덕진(德津), 충청도의 웅진(熊津), 경상도의 가야진(伽耶津), 전라도의 지리산(智異山)·남해(南海), 강원도의 동해(東海), 풍해도의 서해(西海), 영길도(永吉道)의 비백산(鼻白山), 평안도의 압록강(鴨綠江)·평양강(平壤江)은 모두 중사(中祀)이었고, 경성(京城)의 목멱(木覓), 경기의 오관산(五冠山)·감악산(紺岳山)·양진(楊津), 충청도의 계룡산(雞龍山)·죽령산(竹嶺山)·양진 명소(楊津溟所), 경상도의 우불신(亐弗神)·주흘산(主屹山), 전라도의 전주 성황(全州城隍)·금성산(錦城山), 강원도의 치악산(雉嶽山)·의관령(義館嶺)·덕진 명소(德津溟所), 풍해도의 우이산(牛耳山)·장산곶이[長山串]·아사진(阿斯津)·송곶이[松串], 영길도(永吉道)의 영흥 성황(永興城隍)·함흥 성황(咸興城隍)·비류수(沸流水), 평안도의 청천강(淸川江)·구진 익수(九津溺水)는 모두 소사(小祀)이니, 전에는 소재관(所在官)에서 행하던 것이다. 경기의 용호산(龍虎山)·화악(華嶽), 경상도의 진주 성황(晉州城隍), 영길도(永吉道)의 현덕진(顯德鎭)·백두산(白頭山)은 이것은 모두 옛날 그대로 소재관(所在官)에서 스스로 행하게 하고, 영안성(永安城)·정주 목감(貞州牧監)·구룡산(九龍山)·인달암(因達巖)은 모두 혁거(革去)하였다. 또 아뢰었다.


"개성(開城)의 대정(大井)·우봉(牛峯)의 박연(朴淵)은 이미 명산 대천(名山大川)이 아니니, 빌건대, 화악산(華嶽山)·용호산(龍虎山)의 예에 의하여 소재관(所在官)에서 제사를 행하게 하소서."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상당히 중요한 기사다. 명산대천에 지었던 국사당(國祀堂)의 등제(等第)와 관리주체를 명확하게 규정하고, 혁파할 것은 혁파해야 함을 명시해 놓았다. 사실, 이 기사 덕분에 언급된 해당 지역의 마을 서낭당들이 각기 자기 고장의 서낭당이 국통(?)을 이어받은 것처럼 나서서 주장하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여기에 언급된 성황은 국사당이다. 지금 설악의 자락에 남아있는 대관령의 국사성황당(國師城隍堂)과 같은 성격이라고 보면 된다. 고래의 민간 신앙이자 공동체 신앙인 마을 제당이 아니다. 어찌 되었든 각 지역별로 중사와 소사를 나누어 등급을 메겼다는 사실을 적시해 놓은 것만으로도 의미가 중차대하다.




세종 8년 병오(1426) 4월 25일(무자)

음악과 율려를 합하여 악부를 바로잡게 하다


禮曹啓: "風、雲、雷、雨、山川、城隍, 同壇而祭, 乃時王之制...


풍운뇌우와 산천, 성황[城隍]의 단(壇)을 같이하여 제사지내는 것은 곧 시왕(時王)의 제도이므로...


기우제, 산신제, 성황제를 동일하게 취급하여 관리했고, 이는 왕령에 따라서 시행 유지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세종 8년 병오(1426) 11월 7일(병신)

국무당을 정파하자는 사간원의 상소문


丙申/司諫院上疏曰:

鬼神之道, 作善則降之百祥, 作不善則降之百殃。 然則降福降殃, 莫非爲善爲惡之致然也。 豈有諂神邀福之理乎? 而況非其鬼而祭之乎? 古者天子祭天地, 諸侯祭山川, 大夫祭五祀, 士庶人祭祖考, 各有等級, 而不相紊也。 恭惟我國家制禮作樂, 文物悉備, 至於祀事, 亦皆參酌古今, 勒成令典, 禁淫祀之令, 載在《元典》。 然民習舊染, 尙鬼之風, 猶有未殄, 酷信巫覡妖誕之說, 死生禍福, 皆神所致, 淫祀是崇, 而或家或野, 無地不作, 酣歌恒舞, 無不爲已, 以至越禮犯分, 山川城隍, 人皆得以祭之, 群飮糜費, 傾家破産, 一遇水旱, 則輒有飢色, 流弊可慮。 非唯細民爲然, 卿大夫家, 率以爲常, 曾不爲怪, 或稱祈恩, 或稱半行, 諂瀆鬼神, 無所不爲, 至使其祖考之神, 見食於巫家。 神其有知, 其肯享之乎? 甚者, 率其婦女, 躬自祈禱, 恬不知愧, 非徒昧於鬼神之理, 亦失其正家之道也。 其尊祖敬宗之禮安在, 敬鬼神而遠之之義, 亦安在乎? 原其所自, 豈非國家旣設國巫堂, 而又於名山, 遣巫致祭之故歟? 人皆藉口, 縱意逞情, 略無忌憚, 實有累於盛治也。 山川城隍, 各有其祭, 而又設厲祭, 咸秩無文, 則靡神不擧至矣。 今之巫覡所祀, 未知其何神也? 此臣等之所憾也。 《傳》曰: "上有好者, 下必有甚焉者。" 未有上行, 而下不效者也。 伏望殿下特下兪音, 停罷國巫堂, 每於祈恩, 亦遣朝臣, 以禮祭之, 以斷巫覡之妖誕, 以新下民之耳目。


사간원에서 상소하기를,

“귀신의 도(道)는 착한 일을 하면 백 가지 상서를 내리고, 착하지 못한 일을 하면 백 가지 재앙을 내리는 것입니다. 그러하오면 복을 내리고 재앙을 내리는 것도 모두 착한 일을 하고 악한 일을 하는 데 달리지 않은 것이 없사온데, 어찌 다만 귀신에게 아첨만 하여 복을 구하는 이치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물며 그 귀신이 아닌데 제사를 지내오리이까. 옛날에 천자(天子)는 천지(天地)에 제사지내고, 제후(諸侯)는 산천(山川)에 제사지내고, 대부(大夫)는 오사(五祀)에 제사지내고, 사서인(士庶人)은 조고(祖考)에게 제사지냄에, 각각 등급(等級)이 있어서 서로 문란하게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가만히 생각하건대 우리 나라에서는 예(禮)와 악(樂)을 제정하여 문물(文物)이 모두 갖추어져, 제사에 이르러서도 또한 모두 고금의 일을 참작해서 아름다운 법전을 만들어 놓아, 음사(淫祀)를 금하는 법령이 《원전(元典)》에 실려 있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이 구습(舊習)에 오래 젖어서 귀신을 숭상하는 풍조가 오히려 없어지지 않고, 무당과 박수의 요망하고 허탄한 말을 혹신(酷信)하여 생사(生死)와 화복이 모두 귀신의 소치라고 하고, 음사(淫祀)를 숭상해서 집에서나 들에서 하지 않는 곳이 없사오며, 노래하고 춤추어 하지 못하는 일이 없어, 심지어 예(禮)에 지나치고 분수를 어기는 데 이릅니다. 산천(山川)과 성황(城隍)에 사람마다 모두 제사지내며 떼지어 술 마시고 돈을 허비하여, 집을 결단내고 가산을 탕진하여 한 번 수재나 한재를 만나면 문득 굶주린 빛이 있사오니, 이 유행의 폐단이 가히 염려됩니다. 이것은 비단 세민(細民)들만 그러할 뿐이 아니옵고, 경대부(卿大夫)의 집까지도 대개 보통으로 여겨서 괴이하게 여기지 않사와, 혹은 은혜를 빈다고도 하고, 혹은 반행(半行)한다고도 하여, 귀신에게 아첨하는 등 하지 아니하는 바가 없습니다. 심지어 제 조상의 귀신으로 하여금 무당집에 가서 먹게 하니, 귀신이 만일 안다면 어찌 즐겨 받아 먹겠습니까. 심한 자는 제 계집과 딸을 데리고 가서 몸소 기도를 드리면서도 조금도 부끄러움을 알지 못하오니, 한갓 귀신의 이치에 어두울 뿐만 아니라 또한 집을 바르게 다스리는 도리를 잃는 것입니다. 그 조상을 높이고 종가를 공경하는 예가 어디에 있사오며, 귀신을 공경하되 이를 멀리 한다는 뜻이 또한 어디에 있습니까. 유래를 살펴 본다면 어찌 국가에서 이미 국무당(國巫堂)을 세운 까닭이 아니오며, 또 명산(名山)에 무당을 보내어 제사지내는 까닭이 아니겠읍니까. 사람마다 모두 이를 구실로 삼아 뜻대로 제마음대로 하는 등 조금도 기탄(忌憚)함이 없사오니, 실로 성대(盛大)한 정치에 누(累)가 되나이다. 산천(山川)과 성황(城隍)에 각각 그 제사가 있는데 또 악귀(惡鬼)의 제사를 베풀었으니, 명문(明文)없이 모두 제전(祭典)에 편입시켜 놓으면 어느 귀신이 나오지 아니하겠습니까. 지금의 무당과 박수가 제사지내는 것은 그 무슨 귀신인지 알지 못하겠사오니, 이는 신 등이 유감으로 여기는 바입니다. 전(傳)에 말하기를, ‘위에서 좋아하는 것이 있으면, 아래에서 반드시 심한 것이 있다.’ 하였사오니, 위에서 행하는데 아래에서 본받지 않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특별히 유음(兪音)을 내리시어 국무당(國巫堂)을 정파(停罷)하시옵고, 매양 은혜를 빌 때에는 또한 조신(朝臣)을 보내어 예법대로 제사를 지내게 하여, 무당과 박수들의 요망하고 허탄함을 막고 아래 백성들의 이목(耳目)을 새롭게 하소서.”

하였다.


성황의 이름을 빌어서 잇속을 취하고 음사를 행하는 무당들과 그에 놀아나는 우매한 일부 민중을 지적하며, 어명으로 이러한 폐단을 정비할 것을 간하는 글이다. 예(600년 전)나 지금이나 무속이 민간 신앙의 영역을 침탈하고 그 이름을 오염시키는 것은 매한가지이다. 예전처럼 왕이 있다면 신문고라도 두드려 그 폐해를 간할 터이지만, 민간 신앙과 공동체 신앙이 사회에서 괴리되어 아무런 관심을 받지 못하는 지금은 그저 왜곡되고 오용되는 마을 신앙의 전통과 습속을 안타깝게 지켜보기만 할 뿐, 다른 방도가 없는 실정이다. 또한 기사에서 언급되는 국무당(國巫堂)이라는 명칭에 대해서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국무(國巫)라는 중량감 있는 명칭에도 불구하고 이미 관의 통제를 벗어나 온갖 음사와 기행이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시설은 국사(國祀)와도 관련이 없고, 성황(城隍)과도 관련이 없으며, 마을 신앙인 서낭당과도 전혀 무관한 무당의 폐속에 지나지 않는 것이며, 이는 당시에도 무속과 관련되어 세간에서 행해지고 있던 습속이 이미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 상태에 있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세종실록 128권, 五禮 吉禮序例 辨祀五禮 / 吉禮序例 / 辨祀


◎ 辨祀

○ 大祀: 社稷、宗廟。

○ 中祀: 風雲雷雨 【山川、城隍附。】 嶽、海、瀆 【智異山, 全羅道 南原南; 三角山, 漢城府中; 松嶽山, 開城府西; 鼻白山, 永吉道 定平北。 東海, 江原道 襄州東; 南海, 全羅道 羅州南; 西海, 豊海道 豊川西; 熊津, 忠淸道 燕歧; 伽倻津, 慶尙道 梁山。 已上南。 漢江, 漢城府中; 德津, 京畿 臨津; 平壤江, 平安道 平壤府; 鴨綠江, 平安道 義州。 已上西。 豆滿江, 咸吉道 慶源。】 、先農、先蠶、雩祀 【句芒木正, 祝融火正, 后土土正, 蓐收金正, 玄冥水正, 后稷。】 、文宣王、朝鮮 檀君、後朝鮮始祖箕子、高麗始祖。

○ 小祀: 靈星、名山、大川 【雉岳山, 江原道 原州東; 鷄龍山, 忠淸道 公州; 竹嶺山, 忠淸道 丹陽; 亏弗山, 慶尙道 蔚山; 主屹山, 慶尙道 聞慶; 全州城隍, 全羅道 錦城山、全羅道 羅州。 已上南。 木覓, 漢城府中; 五冠山, 松林; 牛耳山, 豐海道 海州。 已上西。 紺嶽山, 京畿 積城; 義館嶺, 江原道 淮陽; 永興城隍, 永吉道。 已上北。 場津㝠所, 忠淸道 忠州; 楊津, 京畿 楊州。 已上南。 長山串, 豐海道 長淵; 阿斯津松串, 豊海道 安岳; 淸川江, 平安道 安州; 九津弱水, 平安道 平壤府。 已上西。 德津溟所, 江原道 淮陽; 沸流水, 永吉道 永興府。 已上北。】 、司寒、馬祖、先牧、馬社、馬步、七祀、禜 【音永。】 祭。

○ 凡祭祀之禮, 天神曰祀, 地祇曰祭, 人鬼曰享, 文宣王曰釋奠。



◎ 변사(辨祀)


○ 대사(大祀)

사직(社稷)과 종묘(宗廟)이다.


○ 중사(中祀)

풍운뢰우(風雲雷雨)와 【산천(山川)과 성황(城隍)도 붙여 제사한다. 】 악·해·독(嶽海瀆) 【지리산(智異山)은 전라도 남원(南原)의 남쪽에 있고, 삼각산(三角山)은 한성부(漢城府)의 중앙에 있고, 송악산(松嶽山)은 개성부(開城府)의 서쪽에 있고, 비백산(鼻白山)은 영길도(永吉道) 정평(定平)의 북쪽에 있고, 동해(東海)는 강원도(江原道) 양주(襄州)의 동쪽에 있고, 남해(南海)는 전라도 나주(羅州)의 남쪽에 있고, 서해(西海)는 풍해도(豐海道) 풍천(豐川)의 서쪽에 있다. 웅진(熊津)은 충청도의 연기(燕岐)에 있고, 가야진(伽倻津)은 경상도의 양산(梁山)에 있으니, 이상은 남쪽이요, 한강(漢江)은 한성부 안에 있고, 덕진(德津)은 경기(京畿) 임진(臨津)에 있고, 평양강(平壤江)은 평안도 평양부(平壤府)에 있고, 압록강(鴨綠江)은 평안도 의주(義州)에 있으니, 이상은 서쪽이다. 두만강(豆滿江)은 함길도(咸吉道) 경원(慶源)에 있다. 】 선농(先農)·선잠(先蠶)·우사(雩祀)와 【구망(句芒)은 목정(木正)이요, 축융(祝融)은 화정(火正)이요, 후토(后土)는 토정(土正)이요, 욕수(蓐收)는 금정(金正)이요, 현명(玄冥)은 수정(水正)이요, 후직(后稷)이다. 】 문선왕(文宣王) ·조선(朝鮮) 단군(檀君)·후조선(後朝鮮) 시조(始祖) 기자(箕子)·고려 시조(高麗始祖)이다.


○ 소사(小祀)

영성(靈星)·명산 대천(名山大川)과 【치악산(雉嶽山)은 강원도 원주(原州)의 동쪽에 있고, 계룡산(鷄龍山)은 충청도 공주(公州)에 있고, 죽령산(竹嶺山)은 충청도 단양(丹陽)에 있고, 우불산(于弗山)은 경상도 울산(蔚山)에 있고, 주흘산(主屹山)은 경상도 문경(聞慶)에 있고, 전주 성황(全州城隍)은 전라도에 있고, 금성산(錦城山)은 전라도 나주(羅州)에 있으니, 이상은 남쪽이요, 목멱산(木覓山)은 한성부 안에 있고, 오관산(五冠山)은 송림(松林)에 있고, 우이산(牛耳山)은 풍해도(豐海道) 해주(海州)에 있으니, 이상은 서쪽이요, 감악산(紺嶽山)은 경기(京畿) 적성(積城)에 있고, 의관령(義館嶺)은 강원도 회양(淮陽)에 있고, 영흥 성황은 영길도(永吉道)에 있으니, 이상은 북쪽이요, 장진 명소(場津溟所)는 충청도 충주(忠州)에 있고, 양진(楊津)은 경기 양주(楊州)에 있으니, 이상은 남쪽이요, 장산곶(長山串)은 풍해도 장연(長淵)에 있고, 아사진송곶(阿斯津松串)은 풍해도 안악(安岳)에 있고, 청천강(淸川江)은 평안도 안주(安州)에 있고, 구진익수(九津溺水)는 평안도 평양부에 있으니, 이상은 서쪽이요, 덕진 명소(德津溟所)는 강원도 회양(淮陽)에 있고, 비류수(沸流水)는 영길도(永吉道) 영흥부(永興府)에 있으니, 이상은 북쪽이다. 】 사한(司寒)·마조(馬祖)·선목(先牧)·마사(馬社)·마보(馬步)·칠사(七祀) ·영제(禜祭) 


○ 무릇 제사(祭祀)의 예(禮)는 천신(天神)에게 ‘사(祀)’라 하고, 지기(地祗)에게는 ‘제(祭)’라 하고, 인귀(人鬼)에게는 ‘향(享)’이라 하고, 문선왕(文宣王: 공자)에게는 ‘석전(釋奠)’이라 한다.



세종실록을 보면 국사(國祀)를 대, 중, 소로 나누어서 관리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이러한 지역화, 토속화는 관치 성황사가 민간 신앙의 영역에 습합되어 왔다는 것 또한 짐작할 수 있는 지점이다. 조정에서 관리하던 관치 성황도 원래 중국에서 모시던 성황신과는 그 성격이 많이 변화해 있음을 유추할 수 있다. 귤이 회수를 넘어와서 탱자가 된 것인지, 탱자가 회수를 넘어오면서 귤이 된 것인지는 다소 애매한 부분들이 많지만, 비록 성격이 완전히 다른 관치 성황과 민간 신앙의 서낭당 사이에는 작은 부분이나마 영향을 주고받았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겠다.




연산군일기 51권, 연산 9년 11월 13일 丙子 1번째기사 1503년 명 홍치(弘治) 16년

성황당에 기도하는 사람이 대궐을 바라다보는 것을 금하다


木覓、白嶽等山城隍堂祈禱人及堂直人登望闕內者, 一皆禁之。


목멱(木覓)·백악(白嶽)등 산의 성황당(城隍堂)에 기도하는 사람과 올라가 대궐 안을 바라다보는 수직하는 사람을 일체 모두 금하라.


이 기사는 흥밋거리로 첨부해 보았다. 백성들이 기도를 위해 산에 올라 궁궐 안을 바라보는 것이 못마땅한 연산군이 아예 백성들이 산에 오르는 것을 금지시키는 내용이다.




중종 11년 병자(1516) 6월 3일(계축)

중종 11년 병자(1516) 10월 22일(경오)

중종 12년 정축(1517) 12월 17일(무오)

중종 26년 신묘(1531) 6월 16일(기사)


- 所謂淫祀, 如外方城隍堂之類也。음사라는 것은 마치 지방의 성황당과 같은 것이다.


- 外方城隍堂之事, 甚爲怪妄。 稱城隍神下降之時, 則雖士族男女, 無不奔波聚會 지방 성황당이라는 것은 심히 괴상하고 망칙하다. 성황신이라고 부르는 것이 하강한다고 할때는 사족남녀까지 모두 모여든다.


- 且外方城隍堂及凡巫覡之事, 亦當一切禁之。외방(外方)의 성황당(城隍堂) 및 모든 무당[巫覡]들 짓은 마땅히 일체 금단해야 합니다.


- 巫覡興行, 惑世誣民, 城隍、叢祠, 竝設虛位, 備辦供奉。 請皆破毁, 仍設后稷之位, 使人民共奉。무격(巫覡)이 성행하여 혹세 무민하고, 성황(城隍)과 총사(叢祠)에 허위(虛位)를 설치하여 받들고 공양합니다. 청컨대 모두 헐어버리고 후직(后稷)의 위(位)를 설치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받들게 하소서.


- 藍浦縣監洪繼浩, 貪暴無知, 侵漁百姓, 民不堪苦。 且將嫁其女, 信惑邪說, 輿送其女于本鄕羅州 錦城山城隍祠, 經宿一夜, 先嫁其神, 率來嫁夫云。 其無識極矣。남포 현감(藍浦縣監) 홍계호(洪繼浩)는 탐학하고 무지하여 침탈을 일삼기 때문에 백성들이 고통을 견디지 못합니다. 그리고 딸을 시집 보낼 때 사특한 말을 믿고 그 딸을 고향 나주(羅州)에 있는 금성산(錦城山)의 서낭사(城隍祠)로 가마 태워 보내어 하룻밤을 묵게 하면서 먼저 신(神)에게 시집보내고 나서 데려다가 남편에게 시집보냈다 하니, 무식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중종代에는 폐해가 극심했던 무격을 성황이라는 이름으로 지탄하는 기사가 많이 보인다. 무당들의 악행이 성황의 이름하에 횡행했다는 증거가 된다. 이는 민간에 이미 깊게 뿌리를 내리고 있던 성황이라고 (잘못) 불리던 민간 신앙에 기대어, 무당과 박수들이 대중을 현혹하고 혹세무민 했던 생생한 고발 기사와 다름없다 하겠다. 우리 민간 신앙과 공동체 신앙이 이미 조선 초중기 때부터 삿된 무당과 박수들의 패악질에 의해서 폄훼되고 왜곡되어 왔다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실록의 기사임을 감안하면 유교적인 관점에서 민간 신앙을 덮어 놓고 평가절하하는 시각도 어느 정도는 개입되어 있을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또한 이 기사를 통해서 유추할진대, 이미 조선 중기 이전부터 성황과 서낭 사이에 명칭의 혼용과 오용이 빈번하게 행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현재의 마을신앙, 민간신앙의 서낭당이 이미 오래전부터 성황당으로 불려 왔다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서낭당을 활자화, 문서화시키는 과정에서 적당한 한자를 찾을 수 없어, 성황(城隍)으로 대체하여 기록했다는 추측도 가능케 하는 지점이다.




명종 3년 무신(1548, 가정) / 명종 7년 임자(1552, 가정) / 명종 8년 계축(1553, 가정) / 명종 10년 을묘(1555, 가정) / 명종 12년 정사(1557, 가정) / 명종 15년 경신(1560, 가정)


上親傳風雲雷雨、山川、城隍香祝。


상이 풍운 뇌우(風雲雷雨)·산천(山川)·성황(城隍)의 향과 축을 친히 전하였다.


명종代에는 왕이 친히 성황에 바치는 향과 축을 전하였다는 동일한 기사가 무려 여섯 건이나 기록되어 있다. 명종은 이복兄인 인종이 즉위 8개월 만에 사망하자 그 뒤를 이어서 왕위에 올랐다. 이때, 명종의 나이는 12세였고 명종의 어머니인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된다. 따라서 명종代에 성황에 향과 축을 전한 기사는 명종의 뜻이 아니라, 문정왕후의 뜻대로 이루어진 일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문정왕후는 회암사에서 성대한 무차대회를 여는 등, 신앙과 종교에 기대어 의지하는 성향이 강했던 인물이다. 요승 보우와의 관계 역시 잘 알려진 유명한 일이다. 공교롭게도 명종이 성황에 친히 향과 축을 전한 기사는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이 끝난 이후에는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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