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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아키 Jul 10. 2017

지금, 여성으로 살아가는 당신에게

<82년생 김지영>, 조남주

01


작년 강남에선 살인사건이 일어났다. 강남의 어느 술집 공용 화장실에서 여성이 들어오기를 기다리고 있던 남자는 한 여성이 들어오자 그녀를 살해했다. 처음 보는 여자였고, 시비가 붙은 것도 아니었다. 이유는 그저 여자이기 때문이었다. 그 시각, 여자의 남자 친구는 화장실에 간 여자를 기다리고 있던 중이었다.


뉴스로 이 사건이 알려지자, 강남역에는 많은 여성들의 추모 행렬이 이어졌다. 많은 여자들이 슬퍼했고, 분노했다. 끝없이 이어지는 여성들의 추모 행렬을 많은 남성들은 이해하지 못하는 듯 보였다. 모든 남자들은 잠정적 범죄자로 취급하는 것이라며 분노하는 댓글들이 인터넷에서 꽤 많이 보였다. 남자 친구도 왜 그 사건이 이렇게나 크게 이슈가 되는 것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이따금씩 등장하는 살인 사건들과 크게 다르지 않지 않느냐고 되물었다. 그때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성(性)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이렇게나 큰 감정의 간극이 일어난다.


김지영 씨는 미로 한가운데 선 기분이었다. 성실하고 차분하게 출구를 찾고 있는데 애초부터 출구가 없었다고 한다.
─ <82년생 김지영>, 조남주


여성들이 분노한 이유는 답이 없기 때문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찾는 강남역이었다. 그렇다고 강남역을 안 갈 순 없고, 그렇다고 여성들이 맥주 한 잔밖에서 하지 말란 법도 없고. 화장실을 안 갈 순 없는데, 그때마다 공용 화장실이 아닌 화장실을 찾아 헤맬 수도 없는 노릇. 그렇다면 이 문제는 운 나빴던 한 여자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문제로 돌아오게 되는 것이다. 자신의 일일 수 있었기 때문에 그 사람에게 공감하고 분노를 느끼게 되는 것. 본인의 힘으로 막을 수 없고, 누구도 도와줄 수 없는 답 없는 문제. 이 모든 상황을 만들어 낸 사회 시스템에 대한 화였다.




02


밤 11시가 가까워지면, 휴대폰에 불이 난다. 아빠의 전화를 받고 어디인지를 설명하고, 귀가하는 루트를 말하고 전화를 끊으면 종료 버튼을 누르자마자 새로운 전화가 걸려 온다. 남자 친구의 전화다. 다시 어디인지를 설명하고, 귀가하는 방법에 대해 말해 준다. 둘 모두 신신당부한다. 조심히 집에 오라고. (또는 가라고.)


그렇지만 때로는 의문이 불쑥 드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조심히 가는 것일까. 그들이 내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까 봐 땅바닥을 잘 살피며 오길 바라고 "조심하라"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겠지. 그렇다면 난 무엇을 어떻게 조심해야 하는 것일까? 반대로 내가 남자였다면 아빠는 아들을 이렇게나 걱정할까? 내가 그저 남자인 친구였다면 지금의 남자 친구는 내가 뭘 타고 집에 가는지에 대해서 이토록 깊은 관심을 보일까? 역시 답은 '아니다'에 더 가까운 것처럼 보인다.


나도 어두운 골목을 지날 때면 무섭다. 한 번씩 뒤를 쳐다본다. 긴 그림자가 내 발끝에서 아른거리면, 흠칫 놀라며 내가 무기로 쓸만한 것을 가지고 있는지 가방 속 물품들을 한 차례 떠올려 본다. 그렇다면 이건 내가 피해망상인 걸까? 아니면 이 사회가 날 이렇게 키운 걸까.




03


주변에 결혼하는 친구들이 늘어난다. 이야기는 자연스레 '애를 가질 것이냐'라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이 질문에 '아니다'라는 답변을 꽤 많이 듣곤 한다. 그 이유는 묻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이다.


이미 직업을 가지고, 몇 년 이상의 커리어를 목표로 한창 회사에 다니고 있는 친구들이 결혼은 그렇다 쳐도 애를 가지게 되면 회사에 과연 남아있을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른다. 애써 외면하고 있던 현실이 고개를 쳐들고 내 앞에 나타난다. 출산 후 한 달만에 출근해 커리어를 이어간 위대한 엄마들의 이야기가 곳곳에서 들려오지만 그것이 정말 자신에게도, 후대의 다른 엄마들에게도 옳은 선택인 걸까 다시 한번 고민하게 된다. 나는 과연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인지 고민하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것이다. 자신 없다고, 그렇게 위대한 엄마가 될 각오가 없다고 많은 여성들이 아이 낳기를 포기한다.


더군다나 '모성애'를 가진 존재로서 찬양됨과 동시에 '맘충'이라는 단어로 재단하고 혐오하는 것이 동시에 일어나는 사회에 우린 지금 산다. 아이를 데리고 지하철이나 버스를 탄 엄마들을 바라보며 부러움보다는 안쓰러움이 먼저 마음속에서 인다. 아이를 가진 엄마들이 부러워지기 전까지는, 한국에서 저출산 문제가 해결되기가 힘드리라 본다. 가임기 여성이 우리나라에 몇 명인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애를 낳아 보조금을 얼마만큼 많이 받을 수 있는지가 핵심이 아닌 것.




90년생 김선아가 <82년생 김지영>을 읽으며 위화감보다 공감을 더 많이 느꼈다는 것은 그 8년 동안의 시간 동안 세상이 그리 크게 변하지 않았다는 뜻 아닌가. 누군가는 인스타그램에 이 세상의 모든 김지영을 응원한다고 글을 남겼고, 또 누군가는 김지영이 답답해서 너무 읽기 힘든 책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언제쯤 이 책을 읽으며, 이런 시대가 다 있었냐고 호쾌하게 웃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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