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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아키 Feb 09. 2018

끊어진 끈

끈 1


할머니는 언제나 하고 싶은 말이 많으신 분이었다. 모든 가족들이 모이는 명절이면, 할머니의 목소리가 대부분의 공기를 갈랐다. 나와 민아는 조용히 하라는 소리를 듣기 일쑤였는데, 그것은 아마 할머니가 선생님이셨기 때문에 더 그러셨으리라. 그러면 나와 민아는 할머니를 피해 방으로 도망쳐 이야기를 실컷 나눴다. 그러다 보면 방으로 우리를 찾아온 할머니가 다시금 우리에게 수많은 이야기를 건넸다. 그렇게 명절은 언제나 할머니의 소리로 가득 찼다.



병원에서 나누어 주는 푸른 마스크로 내 얼굴을 가렸다. 나에게 묻어 있는 균이 할머니에게 좋지 않을 수 있다 했다. 그렇지만 병원은 균 이외에도 굳은 의지를 앗아갈 정도의 많은 슬픔이 덕지덕지 붙은 장소였다. 중환자실은 태생부터가 그런 공간이다. 새로운 슬픔이 쌓여 헌 슬픔을 몰아내는 곳.


신은 할머니에게서 잔인하게도 가장 먼저 목소리를 앗아갔다. 시력도, 기억도 멀쩡한 가운데 할머니는 나를 바라보며 입모양으로 말을 건넸다. 입은 어떠한 모양으로서 무언가를 전하고 있었는데, 기운이 없어 더 이상 할머니에게서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아 무슨 말씀을 하시고 싶은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가슴 아픈 일이었다. 할머니는 소리로 대변되는 사람이었으므로.


엄마는 병원 침대 위의 할머니에게 집에 얼른 돌아가자 말했다. 의사에게 하루 또는 이틀일 것이라는 통보를 듣고 난 뒤 눈물을 참으며 내뱉는 거짓말. 어서 힘을 내시라고, 다시 일어나시면 맛있는 갈비찜을 해 드리라 허공으로 흩어지는 약속들을 엄마는 지치지도 않고 끊임없이 계속했다. 집에 가고 싶다는 뜻을 계속 전하던 할머니는 그런 엄마에게 끝내 힘겨운 소리를 냈다. 나 집에 못 가.



이름 모를 기기들에게서 길게 뽑아져 나온 선들이 할머니를 이 세상에 붙잡아 놓았다. 여기 이곳에 계속 존재할 사람들의 욕심이었다. 자신을 붙잡고 있는 답답한 끈들을 풀어달라며 소리 없는 소리를 내는 할머니를 바라보며 가족들은 고개를 저었다. 아직 당신을 보내줄 수 없다는 뜻이었다. 그렇게 마지막을 억지로 길게 늘이고야 마는 것은 축복일까, 저주일까. 안도일까, 후회일까.




끈 2


가족들이 모여 있던 주말에 할머니는 모든 끈을 놓고 떠났다. 갑작스러운 끝맺음이었다. 다행히 많은 가족들이 함께하고 있던 순간. 가족들의 유일한 위안이다. 혼자 외로이 보내드리지 않았다는 안도. 그러나 죽음 앞에서 의연할 수는 없었다. 그것은 다시 무언가를 전하거나 시도할 수 있는 기회를 영원히 박탈당했기 때문일 테다. 다시는. 이 세 글자가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정신없이 장례식은 시작됐다. 죽음의 어둡고 끈적한 그림자를 찾아오는 여러 사람들이 가진 생의 기운으로 몰아낸다. 그렇게 남은 가족들이 슬픔의 깊은 늪으로 빠지지 못하게 막는다. 불가항력으로 가족들은 왁자지껄한 여러 사람들의 한가운데에 놓이기 때문에, 죽음이 불러오는 상실감에 온전히 빠져버리지 못한다.


내가 보낸 단 몇 통의 연락으로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나에 대한 걱정으로 장례식장까지 찾아와 주었다. 그게 아니라면 위로가 가득 담긴 연락을 전했다. 아이러니하게도 할머니와 나 사이에 이어져 있던 끈이 끊어지자, 나와 연결되어 있던 다른 끈들이 선명하게 보였다. 장례식에선 그런 모순된 일들이 벌어졌다.




끈 3


코를 찌르는 소독약의 냄새가 가득한 흰 공간에 할머니가 있었다. 아니, 그것은 엄밀히 말하면 할머니가 아니라 할머니였던 육신이겠지만 가족들은 여전히 차갑게 누워있는 그 흔적을 바라보며 할머니라 여겼다. 굳게 감긴 눈과 입은 짙은 위화감을 불러일으켰다. 끈으로 꽁꽁 매어져 움직이지 않는 몸. 침묵하는 얼굴.


그렇게 마지막으로 할머니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혹여 잊힐까 가족들은 마지막 모습을 화면 안으로 담아냈다. 기억은 믿을 만한 장치가 되지 못하기 때문에.



누군가는 소리 높여 울부짖고, 누군가는 고개를 떨구고 손을 모았다. 누군가는 사람들과 함께 모여 노래를 불렀다. 화장터는 병원보다, 장례식보다 더 날것의 본능이 날뛰는 장소였다. 파괴가 일어나는 공간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불길이 타오르고 잦아드는 그 시간 동안에 오래된 대합실에서 입 안으로 음식을 욱여넣었다. 살 사람은 그렇게도 산다.



눈이 내렸다. 아직 채 비석도 새겨지지 않은 돌무덤을 뒤로하는 발걸음이 무거워 자꾸만 뒤를 돌아보았다. 눈이 내리면 더 따뜻할까. 


아. 추운 겨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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