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내가 처음으로 내 돈 주고 와인을 사 마셨던 것은 2014년에서 2015년으로 넘어가던 겨울, 유럽에서였다. 이유는 참 하잘것없었다. 유럽으로 배낭여행을 갔고, 식당에선 물 한 잔을 2유로에 팔았다. 겨울이었으나 스마트폰 없이, 웬만한 거리는 걸어서 이동하는 뚜벅이 여행을 했던 터라 목이 탔다. 하지만 물 한 잔에 2유로, 한국 돈으로 2600원이라니? 유럽의 식당에서는 대부분 하우스 와인도 한 잔씩 팔았는데, 와인 한 잔 가격도 얄궂게 2유로였다. 같은 가격에 물을 마실 순 없지. 나는 물 대신 와인을 시켰다.
와인 맛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었고, 구분할 수 있는 것이라곤 레드냐 화이트냐 정도였지만 나는 들르는 식당마다 하우스 와인을 한 잔씩 걸쳤고, 집집마다 미묘하게 다른 하우스 와인을 어느 순간엔 퍽 즐기기에 이르렀다. 유명한 지방에서 나는 유서 깊은 와인이 아니어도, 그 지역에서 담근 하우스 와인은 음식과 같이 즐기기에 충분했다. 어떤 와인은 가벼운 향과 산뜻한 목 넘김이 있었고, 어떤 와인은 목을 긁고 지나가는 묵직함이 있었다. 어떤 맛일지 예상하지 못한 상태로 경험하는 새로움이 또 추억이 됐다.
한국으로 돌아와 어느 날 엄마랑 외식을 하게 됐고, 우연히 들른 피자집에서 하우스 와인을 한 잔 팔길래 유럽에서의 이야기를 하며 엄마에게 한 잔 권했다. 평소 술을 전혀 마시지 않던 엄마는 그날따라 왠지 흔쾌히 와인 한 잔을 마시겠다고 했고, 그게 시작이었다. 그렇게 엄마와 나는 꽤 잘 맞는 와인 친구가 됐다. 오죽하면 엄마는 와인을 모르고 살았던 지난 50년이 후회스럽다고 말했다.
그 이후 엄마는 즐겨 가는 와인 바가 생겼고, 와인 테이스팅 행사에 참석하고 좋아하는 지역과 품종이 생겼다. 집에는 이제 와인셀러가 있고, 나에게 좋은 일이 있는 날이면 엄마는 나에게 '와인 한 병 가져갈래?' 하며 숨겨둔 와인을 꺼내 준다. 냉장고에는 데일리 와인이 들어 있고 엄마와 나는 가끔 저녁을 먹으며 와인 한 잔을 따라 마시며 기분을 낸다. 와인을 즐기지 않는 아빠와 민아는 '또 술 마셔?'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엄마는 뭘 모른다는 듯 대답한다. 이걸 어떻게 술이라고 할 수가 있어? 이건 와인이야.
좋은 와인을 발견하면, 집에서 엄마와 마시기 위해 한 병 더 산다. 좋은 와인 바를 알게 되면, 엄마에게 같이 가보자 권한다. 우리가 마시는 와인은 격식도 없고, 국적도 없다. 군고구마에도 마시고, 태국 음식과도 함께 즐긴다. 가장 좋아하는 안주는 매주 월요일마다 우리 동네로 오는 순대 트럭의 순대다. 5000원어치 순대를 사서, 레드와인을 따 엄마와 나는 한 병 너끈히 마신다. 역시 레드와인은 순대라고 생각한다.
언젠가 엄마는 나에게 뜬금없이 물었다. 선아야, 엄마가 죽으면 언제 가장 생각날 것 같아? 나는 대답했다. 맛있는 커피와 와인을 마실 때. 나의 대답을 들은 엄마는 매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나의 대답이 흡족했던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