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서 처음 러닝을 한 날
얼마 전 제주도에서 있었던 일이다. 나는 작년부터 종종 뛰었는데 (러닝이라고 말하면 왠지 거창하게 느껴진다.) 그때마다 친구 빔에게 함께 뛰어보지 않겠냐 권했다. 빔은 운동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한사코 나의 러닝 제안을 거절해 왔는데 (여름엔 더워서, 겨울엔 추워서 왜 뛰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이유로) 최소 10번이 넘는 나의 제안 끝에 빔이 수락하는 날이 온 것이다. 제주라는 이유로, 봄이라는 이유로.
꼭 뛸 수 있는 운동화와 뛸 때 입을 수 있는 옷을 챙겨 오라고, 제주도로 떠나기 며칠 전부터 신신당부를 했다. 제주도에서 언제 뛸지도 정했다. 우리는 두 번째 날 오전 11시에 뛰기로 했다. 너무 이른 아침은 빔이 힘들 것 같다고 했고, 나는 러닝 후에 씻고 싶었기 때문이다. 마침 숙소는 성산일출봉이 보이는 올레길 바로 앞이었고, 도착한 날 산책을 하며 코스를 살짝 훑어놓았다.
다음 날 오전 11시에 커피를 마시고 있던 빔에게 이제 뛰러 갈 시간이 되었다 말했다. 빔은 내가 잊었으면, 사실 그냥 모른 채 넘어갔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럴 순 없지. 빔은 정말 내키지 않지만 본인이 내뱉은 말을 지키지 않는 것이 더 마음이 불편한 사람이었으므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도무지 왜 가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과 제스처를 잔뜩 뿜으면서. 그게 얼마나 웃기는지 본인은 아직도 모른다.
한 5km 정도 뛸 수 있으려나 생각했다. 빠르게 달릴 생각은 없었고 7분 30초 정도로 맞춰 뛰고 싶었다. 저 멀리 성산일출봉이 보였고, 성산일출봉 앞에까지 가볼 수 있을까 빔에게 묻자 빔은 또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 앞까지 정말 다녀옴.)
뛰는 것이 왜 좋은지 도저히 모르겠다고 말하는데, 나는 뛰면서 답한다. 이건 명상 같은 거야. 러닝도 그렇고, 테니스도 그렇고, 프리다이빙도 그렇고, 딱 그 순간엔 아무 생각이 안 드는 거야. 내가 숨 쉬는 데에, 아니면 공 움직임 하나만 딱 생각나고 나머지는 다 잊는 거야. 평소에 가지고 있던 스트레스와 생각을 내려놓게 되는 거지.
그럼 빔은 말한다. 네가 스트레스를 많이 받거나 생각이 많은 편은 아니잖아. 내가 답한다. 어, 그렇지. 빔이 묻는다. 왜 생각을 더 할 생각은 안 해? 생각을 더 해도 괜찮지 않아? 평소의 나를 아는 빔은 살짝 어이없어한다. 나는 소리 내어 웃었다. 나는 빔의 촌철살인이 항상 웃기다. 맞다. 나는 생각을 안 할 생각만 한다.
40분 정도를 쉬지 않고 뛰었다. 노란 유채꽃이 만발한 꽃밭에 도달해서야 멈춰 숨을 가다듬었다. 제주도에 와서 만개한 유채꽃을 보는 것은 또 처음이었다. 항상 유채꽃의 시기를 놓치곤 했다. 빔이 유채꽃의 열매가 뭔지 검색해 달라 하여 유채는 사실 배추와 양배추의 자연교잡종이며 유채에서 나온 기름이 바로 카놀라유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카놀라유의 기원을 단 한 번도 궁금해하지 않았다. 생각보다 유채는 가까운 곳에 있었다.
그렇게 빔과 시답잖은 이야기를 하며 숙소로 돌아와 첫 러닝을 끝마쳤다. 기분으로 간다고 했다가, 막상 러닝을 하러 나가는 길의 가기 싫은 마음을 경험했기 때문에 아마 빔은 다시는 러닝 제안을 수락해주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게 웬걸? 서울로 돌아와 빔은 헬스장 트레드밀 위에서 러닝 인증샷을 보내왔다. 6km를 넘게 뛴 기록이었다. 아, 제주도 러닝이 마지막이 아닐지도?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