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적 제10호 서울 한양도성을 다녀와서

[10호] 성북동 문화재 답사기|글 박진하

by 김성북


포트리스(fortress)가 아니라 시티월(city wall)인 한양도성


성북동은 한양도성과 함께 태어나 그와 더불어 숨 쉬며 살아왔다. 아니, 서울 전체가 한양 도성의 축성으로 가능해졌으니 말할 필요도 없다. 성북이란 동명도 한양도성 북쪽에 위치한 마을이라는 의미이니 그 이름부터 한양도성에게 빚지고 있는 셈이다.


이번 답사는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서울편2)’라는 책을 근거로 하고, 그 속에 기술된 여러 일정을 좇아가려고 했다. 이전에도 남도 문화유산답사기를 읽고 그 속에 기술된 여러 문화재를 직접 찾아보았던 재미있는 답사 여정이 있었기 때문에, 옛 추억을 살려 이번에도 그렇게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결정한 다음 온라인상으로 서적을 구입하고 그 책이 오기만 기다리는 시간이 길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나 막상 책이 도착한 뒤에는 짬을 내기 어려웠다. 우리 부부가 운영하는 조그마한 한식당, ‘디미방’이 성북동에서 동소문동으로 옮겨 가면서 해야 할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평소 좋아하는, 새로 구입한 책자에서 뿜어져 나오는 인쇄 냄새가 거의 사라질 무렵이 되어서야 한양도성 편을 읽어 내려갈 수 있었다.


드디어 식당의 정기 휴일인 토요일에 한양도성 성북동 구간(북대문~동소문) 답사를 시작한다. 전날 늦게까지 읽은 정보들을 잊지 않기 위해 몇 번이고 되뇌었다. 이번 답사 경로는 아침 운동 코스이기도 했으니 거의 매일 같이 다니던 그 길이다. 하지만 답사를 목적으로 찾아가는 것은 그저 운동을 목적으로 뛰거나 걷는 것과는 사뭇 다르다.


아침 일찍 집에서 큰 길로 나와 걷노라니 성북로 대표보행거리 조성사업의 일환으로 인도 확장 공사가 한창이다. 공사 차량과 온통 땅을 뒤집어 헤쳐 논 지면을 피해 미로를 헤쳐 나가듯 성북동 북쪽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간송미술관이 위치한 삼거리에 이르러 좌 측편을 바라보니 한양도성이 보인다. 도시 건물 위로 불쑥 솟아난 한양도성은 이무기가 청룡이 되어 승천하기라도 하듯 하늘을 향해 있다가 도성 근처를 둘러싸고 있는 건물 속으로 다시 사라져 버린다. 유엔 빌리지를 지나 홍련사 가까이 다가갈 무렵 ‘숙정문 안내소 가는 길’이란 안내 표지판이 보인다. 그런데 영문 표기를 보니 시티 월(city wall)이란 용어를 사용하고 있었다. 이는 앞서 본 답사기에서 저자가 주장한 내용과 일치한다.

한양도성이란 본격적으로 방어용으로 축성된 것이 아니라 울타리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전투용으로 만들어진 것은 남한산성과 북한산성과 같은 것이지, 한양도성은 심리적으로 한양 도성 인들을 보호하고 수도의 권위와 품격을 높이기 위한 방편이란 것이다. 그럴까하는 의구심을 가지고 찾아보니 남한산성과 같은 산성은 마운틴 포트리스(mountain fortress)라는 단어로 영문 표기가 되어 있다. 중국의 만리장성은 어떻게 표기될까하는 생각을 가지고 찾아보니 ‘the great wall’이었다.

동대문이 옹성으로 만들어진 것은 단지 형세가 낮은 동쪽을 비보 차원에서 보완하기 위한 것이지 방호용으로 구축하기 위한 일이 아니라 한다. 그래도 이해가 안 된다. 단순히 비보를 하기 위한 것이라면 흙을 쌓아 둔덕을 만들거나 돌무더기나 수풀을 조성해서 땅의 약점을 강화하면 될 일인데 옹성을 만들어 지기를 보충한다는 말은 아무리 생각해도 잘 이해가 안 된다. 다시 말해 서쪽에 비해 산세가 약한 동쪽을 비보하기 위한 일이라면 땅의 지면을 높이기 위한 시도를 해야 하지 옹성을 만들어 비보를 한다 함은 다소 어색하다. 지세가 낮아 외부에서 침투하기 쉬우니 철저히 방호하려는 목적으로 옹성으로 만들었다 함이 차라리 합리적이지 않을까?

임진왜란 당시 왜군이 파죽지세로 한양까지 진격했다가 한양도성이 텅 빈 것을 정찰을 통해 확인했음에도 불구하고 동대문의 옹성을 보고는 무슨 함정이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이 들어 주춤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옹성(甕城)은 성문 앞에 설치되는 시설물로 모양이 마치 항아리와 같다고 하여 붙은 이름이다. 옹성은 성문을 공격하거나 부수는 적을 측면과 후방에서 공격할 수 있는 시설이다. 적이 아무리 많아도 옹성 안에 들어 올 수 있는 인원이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아군 쪽에서 공격하기가 쉽다. 이렇게 조성된 옹성이 동대문이었다. 왜놈 입장에도 보아도 동대문은 훌륭한 방호용 옹성이었던 것이다. 앞선 일화는 이런 좋은 방호기지를 포기하고 도망가기 바빴던 세력들의 변명은 아니었을까?

한양도성을 방호용으로 중시하고 보호하려는 의지는 역사 기록에서 많이 찾아 볼 수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성북동에 인가들이 생기고 마을이 만들어진 경위를 보면 도성의 방어와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다. 당시 수도방어사령부 격인 어영청의 북둔이 위치한 곳이 성북동이었다.

도성을 방어하는 어영청 소속 군인들을 늘 이곳에 상주케 하여 이들로 하여금 인가를 형성하게 하였다. 물론 주변 산림이 무단 채취되고 훼손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도 있었겠지만, 이 지역을 근간으로 살던 군인들이 비상시 신속하게 도성을 중심으로 방어 태세를 구축하기 위한 이유도 있었으리라.


결론적으로 남한산성과 북한산성처럼 전문적으로 방호를 위해 구축된 포트리스는 아니라 할지 몰라도, 전적으로 풍수상 약점을 보완하고 이를 비보하기 위한 차원에서 만들었다거나 서울이라는 상징성을 높이기 위해 심리적 측면만을 고려하여 건설되었다는 주장에도 동의하기 어렵다. 서울을 수도로 결정하는 데 있어 풍수적인 측면이 가장 중시되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으므로 한양도성이 비보적인 차원에서 만들어졌다는 것도 틀렸다고 할 수 없지만, 성곽이라 명명한 만큼 방호적인 측면도 작용했다는 사실 역시 부정할 수 없다. 다만 처음 한양도성을 쌓을 당시만 해도 국내외적으로 방위 문제가 없었으므로 방호하기에 보다 효과적인 방식으로 만들어지지 않았다고 주장하면 이해할 수 있다.



그가 위치한 지형에 순응하도록 만들어진 우리의 성벽


삼청각 입구를 지나 안내소로 향하니 오른쪽에 ‘북악산 전면 개방 기념 조림’이라 각자가 새겨진 바위가 놓여있다. 보통은 대통령이 식재한 나무 앞에만 이런 안내판을 세우지만, 특이하게도 여기에서는 그냥 조림이라는 표현과 함께 소나무 일군이 보인다. 그로 보아 당시 같이 참석했던 모든 사람들이 같이 나무를 심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이런 표지석을 세운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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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정문 안내서에서 방문 신청서를 작성한 후 신분증을 제출하고 받은 방문 표찰을 목에 걸고 나면 비로소 자유롭게 걸음을 옮길 수 있다. 안내소에서 숙정문까지의 탐방로는 목재 계단으로 되어있다. 첫 계단을 오르려고 할 쯤 맞은편에서 젊은 청년이 뛰어 내려온다. 지금 숙정문 기와 공사를 하고 있는데 일정이 촉박하여 서두르고 있다 한다. 묻지도 않았는데도 친절하게 지금 공사를 하고 있는 내용을 대략 설명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올라가는 도중에 건축 자재가 있어 불편할 수 있으니 조심하라는 안내도 잊지 않는다.


숙정문은 한양도성 북쪽에 위치한 것으로 북대문이라 지칭할 수 있다.

당초는 이보다 다소 서쪽에 있다가 1504년에 지금의 장소로 옮겨 왔다한다. 이 북문의 이름, ‘숙정(肅靖)’은 말 그대로 ‘엄격하게 다스린다’는 뜻을 가지고 있으나 이전에는 숙청(肅淸)문이라 하기도 했단다. 그리고 누각도 없이 둥그런 아치, 홍예를 튼 성문만 있던 것을 1976년에 누각을 세우고 박정희 대통령이 쓴 글씨체로 현판을 만들어 부착했단다. 그러니 숙정문에서 누각이니 하는 것은 문화재적인 가치가 있다 하기는 좀 어렵다.

성문의 판문은 철판으로 만들어져 있었고 이 굳센 철문을 붙여 잡고 고정시키는 역할을 하는 암톨쩌귀는 화강석으로 만들어져 있어 무척이나 수려하다.


이 성곽문은 조선시대 당시에는 출입이 금지된 북대문이다. 태종 13년에 ‘창의문과 숙정문은 경북궁의 양팔과 같아서 길을 만들어 지맥을 상하게 해선 안 된다’는 풍수설에 입각하여 문을 굳게 닫고 소나무를 심어 통행이 어렵도록 했다.

하지만 이 북대문이 열리는 경우가 있었으니 가뭄이 극심할 때이다.

음양 오행이론에 의하면 북방은 물을 의미하는 수(水)의 자리였고 숙정문 뒤 골짜기가 깊어 음습하다 여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을 의미하는 화(火)의 자리에 위치한 남대문은 닫고 물을 뜻하는 숙정문을 열어 수기(水氣)가 서울로 들어올 수 있게 했다는 것이다.

또한 음기가 가득한 이 숙정문을 열어두면 한양 여자들이 음란해지므로 항상 문을 닫아 두었다는 속설도 진해진다. 이와 더불어 우리나라 풍속을 소개하는 동국세시기에는 ‘정월 대보름 전에 민가의 부녀자들을 세 번 숙정문에 가서 놀게 하면 그 해의 재액(災厄)을 면할 수 있다’는 속설이 기록되어 있다 이는 성 주위를 머리에 돌을 이고 세 바퀴 도는 우리 전래의 풍속과 닮아있다.

이러한 북문은 청와대를 비롯한 수도 방어라는 명분으로 다시 출입금지 구역이 되고 말았다. 그러던 것이 앞서 보았던 개방 기념 조림을 하던 2007년 4월 5일에 일반인에게 공개되게 된 것이다. 숙정문을 지나 성 안쪽으로 들어서면 당시 기념식에서 낭독되었다는 ‘북악산 개방에 부쳐’라는 부제가 붙은 북악산 개방기념 축시가 있었다고 한다. 이 시의 앞부분만 보면 다음과 같다.


『뉴욕에도 도쿄에도 베이징에도 베를린,

모스크바에도 없는 山

단 하루도 산을 못 보면 사는 것 같지가 않은

산이 목숨이요 산이 종교인 나라에

…』


보통은 여기에서 북악 정상을 향해 올라가야하나 우리 마을, 즉 성북동에 위치한 한양도성을 살펴보려면 반대로 내려가야 한다. 본격적인 성벽 답사에 앞서 이 지역에 분포되어 있는 나무나 기타 식물군을 확인하는 것도 좋다. 오랜 세월, 출입금지 지역으로 제한되어 있었던 까닭에 보다 다양한 나무와 식물들이 자생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변을 둘러보니 팥배 나무니 단풍나무니 하는 나무 이름 표지판이 보인다. 팥배 나무 표지판엔 ‘5월에는 배꽃을 닮은 새하얀 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가 가을에는 그 자리에 수천수만 개의 팥알 크기 열매가 달립니다’ 하는 안내문이 있으나 아직은 그 열매가 설익어 푸르기만 하다.


지금부터는 본격적인 성벽여행이 시작된다. 성 안쪽에서 보면 정사각형의 총안(銃眼)만 보인다. 일반적으로 모든 성이 그러하듯이 바깥 쪽 성벽은 높고 안쪽은 사람 키만큼 되어 있다. 3개의 정사각형 총안이 모여 하나의 단위를 이루는데 이를 1타(垜)라고 한다. 안쪽에서 보면 3개의 총안이 정사각형으로 다 같이 동일하게 보이지만 가까이 다가가 살펴보면 조금 다르다. 양 측면에 있는 총안은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향하는 단면이 수평이지만 가운데 있는 총안은 밑에 있는 단면이 아래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성 밖에서 보면 보다 뚜렷하다. 양 쪽에 있는 원거리 사격을 위해 만든 원 총안(遠 銃眼)은 밖에 볼 때도 정사각형이나 중앙에 위치한 근 총안(近 銃眼)은 세로로 길게 늘어진 직사각형의 모양을 하고 있다. 성벽이란 것이 거의 같은 구조로 반복되는 것처럼 보이나 이처럼 기능상 필요에 따라 만들어진 구조가 설치 미학적인 아름다움을 더하고 있다.

시작부터가 가파르다. 우리 성곽이란 것이 대체로 산에 기대어 만들어지기 때문에 성벽은 그 지형에 따라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오도록 되어 있다. 그러니 성벽도 지형 위에 그 경사를 거부하지 않고 순응하도록 만들어진 것이다. 하나의 단위에 속한 성벽도 경사에 따라 그 높이가 다르다. 성벽은 돌 축대 위에 총안을 새기고 그 위에 맞배지붕 형식으로 덮개 석을 만들어 올리는 방식이다. 이를 순수 우리말로 성가퀴라 하는데 모두 3개의 총안이 모여 한 단위를 이룬다. 경사가 가파른 지역에서는 근 총안과 원 총안의 높이가 달라진다. 평지에서는 하나의 단위인 1타 위의 덮개석이 하나이다. 이런 성가퀴의 지붕은 각이 넓은 이등변 형태를 양 측면에 둔 갈쭉한 육각형이다. 그런데 가파른 장소에서는 각 총안마다 다른 높이의 지붕을 가지게 되지만, 중간에 잘린 단면은 이등변 삼각형이 아니라 수직으로 곧게 자른 단면이다. 이런 식으로 성벽은 내려가기도 하고 올라가기도 한다. 즉 산세의 흐름을 거부하거나 저항하는 것이 아니라 산세가 올라가면 성벽도 따라서 올라가고 지형이 내려가면 성벽도 여기에 순응하여 내려간다. 이젠 성벽 밑에 있는 성 돌은 땅속에 묻혀 오래된 나무처럼 대지에 뿌리를 두고 그들과 하나가 된 듯하다. 이것이 한국인의 마음이고 한국의 성곽인 것이다.

또 산세가 안으로 굽으면 성벽도 안으로 굽어 들어가고 밖으로 크게 원을 그리며 돌아 나가면 성곽도 같이 돌아서 나간다. 이를 가리켜 곡장(曲墻)이라 한다. 성벽의 특성이 여기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이렇게 성벽을 따라 지나고 보니 싸리나무 꽃이 예쁘게 피어있다. 말 바위 안내소에서 방문 표찰을 반납하고 조금 더 나아가면 전망대가 나타난다.


이 전망대를 기점으로 성 밖으로 나가게 되어 있다. 성벽 위로 설치된 가교는 전망대의 역할도 하게 되는데 성북동의 모습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장소이기에 그러하다. 이젠 성 밖의 성벽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성벽의 크기는 한창 커져 있었고 그 웅장함도 한결 더해진다. 성벽 안쪽에서는 돌 축대가 거의 보이지 않고 총안이 있는 성가퀴만 있는 것이 보통인데 성 밖에서 보면 돌 축대가 훨씬 높게 축성되어진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성벽 옆으로 만들어진 산책로를 따라 가다 보면 커다란 바위 위에 놓인 성벽도 만나게 된다. 큰 바위를 만나게 되면 그를 피하거나 제거하지 않고 그를 지반으로 삼아 위에 축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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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더 나아가면 오랜 세월을 버티어 낸 성벽들을 볼 수 있다. 긴 시간을 보내면서 이를 견딜 수 없는 성벽들은 배불림 현상을 보이며 언젠가 곧 무너질 준비를 하고 있는 듯하다. 곳곳에 계측기를 설치해 둔 것으로 보아 치밀한 감시를 소홀히 하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 옛날 조성된 성벽들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즉 시대별로 축성방식이나 성 돌을 다듬는 방법이 다른 성벽들을 만나게 된다. 조선초 태조 때에는 자연석을 거칠게 다듬어 하단부에는 큰 돌을, 위로 갈수록 작은 돌을 쌓아 조성하는 방식으로 성벽을 만들어 갔다. 이어 세종 때에는 무너진 도성을 다시 쌓을 때 돌을 장방형으로 다듬어 사용했다 한다. 이보다 좀 더 세월이 지나 병자호란의 아픔을 몸소 체험한 이후에는 일정한 규격에 맞게 다듬어서 보다 정교하게 축성했다.

성벽에 따라 그 축성 시기를 뚜렷하게 구분할 수 없는 것은 보수 과정에서 그 이전에 만들어진 성 돌이나 남겨진 성벽을 그대로 사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비탈진 지역에서는 성 돌 가장자리에 요철을 만들어 톱니바퀴가 맞물려 미끄러지지 않게 하는 원리를 활용하여 밑으로의 쏠림을 방지하고 있었다. 또 크게 반원을 그리며 밖으로 돌아나갔다가 안쪽으로 휘어 들어가는 곡장의 아름다움도 여기에서 절정을 이룬다. 검고 푸른 이끼가 세월의 두께만큼 성벽에 머물러 있다.

와룡 공원을 밖으로 두고 안쪽으로 좀 더 걸어가게 되면 계단을 만나게 된다. 성벽도 계단을 따라 급하게 물결치며 내려가고 있다. 이런 광경을 보고 있노라면 우리의 성곽을 가리켜 또 다른 아름다운 설치 미술 작품이라 말한 까닭을 알게 해 준다.



노동으로 지친 도시민의 쉼터가 된 한양도성


내리막길이 끝나는 지점에 이르면 평상시 성 밖에서 안으로 통행할 수 있도록 만든 암문이 나타난다. 별다른 장식도 없이 지극히 실용적으로 만들어진 이 사각형 석문을 기점으로 성안 쪽의 산책로는 끊기고 만다. 성벽은 사람들의 삶의 터전인 인가의 담벼락이 되기도 하고 후원이 되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른바 북정동이다.

6·25 한국전쟁 이후에 피난민들이 이곳으로 몰려 들어와 판잣집을 짓고 살기 시작했다. 그러다 1960년대 산업화가 추진되면서 농촌 사람들이 모여들어 이 성벽 주위에 또 다른 판잣집들이 고단한 몸을 성벽에 기대어 살게 되었다. 이때부터는 한양도성은 방호나 풍수 상 비보 차원에서 만들어졌다는 역사적 의무를 다하고 그의 허리를 가난하고 힘든 노동으로 지친 도시민에게 내어 주어 쉼터가 되고 그들을 지켜 주는 수호신이 되었다. 성북동에 사셨던 제4대 국립 중앙 박물관장님의 회고를 들어 본다.


《벌써 20여년이나 지난 일이지만 박물관에 수위자리가 비어 있어서 공채시험을 본 일이 있었는데, 그때 1등으로 합격해서 채용된 젊은 청년이 있었다. 이 젊은이가 그 후 20년 가까이 박물관 식구 노릇을 하는 동안 충직한 수위로서 남긴 이야깃거리가 한둘이 아니지만, 집이 없어서 성북동 산마루에 어설픈 판잣집을 지었다가 뜯기고 뜯길 때마다 노숙을 해야 하는 고초를 겪으면서도 박물관 근무를 거른 일은 없었다. 어느 해인가 장마철에 집이 뜯긴 정상이 하도 딱해서 발굴 때 끌고 다니는 작고 허술한 천막 하나를 빌려 준 일이 있었는데 장마가 갠 후에 돌려주러 온 천막 꼴을 보고 나는 눈시울이 뜨거워졌었다.》


이처럼 한양 도성은 또 다른 사명을 가지고 서민들의 아픔을 보듬어 주고 위로하는 보금자리가 되었던 것이다. 이런 사정으로 성 밖으로의 산책로, 즉 성북동내에서의 도성답사는 여기에서 끊긴다. 암문을 통해 명륜동, 즉 성 안쪽으로 들어가 다시 큰 길을 따라 내려간다. 성 안 쪽에서는 역시 돌 축대는 보이지 않고 성가퀴만 보인다. 가파른 경사로에서는 성벽도 바삐 내려가지만 평지에 이르러서는 성벽 위에 있는 맞배지붕 형식의 덮개석이 나란히 어깨를 맞대고 사이좋게 서 있다. 자세히 보면 평지처럼 보이나 약간 오른 지형에 따라 성벽도 잠깐 올라왔다가는 다시 내려가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조그마한 파격이 더욱 아름다워 보인다. 다시 성벽은 급한 경사계단을 따라 내려가다가 서울과학고등학교 후문에 위치한 대로를 만나면서 실종되고 만다.

이 도로는 성북동과 혜화동을 이어주는 도로로, 이전에는 성북동 사람들이 서울 도심으로 출퇴근할 때 가장 빈번하게 이용했던 길이다. 큰 대로를 지나 경신고등학교 담벼락에 이르면 성벽은 학교의 담장이 되어 버린다.

그 즈음에 ‘강릉’이라고 새겨진 각자석이 있다는 자료를 본 사실이 있어 몇 번이고 왔다 갔다 하며 찾아보려 했으나 확인할 길이 없었다. 처음 성벽을 조성하던 태조 때에는 전 도성을 97개 공사구역으로 나누고 천자문에 나오는 글자를 가지고 구역 명을 정해 표기했다. 예를 들면 천자문의 첫 번째 자인 하늘 천(天)자를 이용하여 북악 정상 시작점에서는 천자 시면(始面)이라 표기하고 끝나는 지점에는 천자 종면(終面)이라 표기하는 방식이다. 그러던 것이 세종 때는 그 공사를 담당하는 지역명을 기재하는 방식으로 변경되었다. 이 공사는 특정 구역에 부실이 있어 성곽이 무너지게 되면 그 지역의 주민들이 다시 동원되어 그 성벽을 수리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한다. 성축 공사뿐만 아니라 사후 서비스도 책임져야 할 지역을 표기한 진정한 의미에서의 실명제이었다. 그 당시 경신 고등학교 담장이 된 성벽의 공사를 담당한 고을이 강릉이었던 것이다.

지금 이 시점에서 볼 때 그들이 담당했던 성벽이 망가졌으니 강릉 사람들에게 책임을 물어 수리하라 해야 하겠다. 하지만 이젠 그 표지석마저 보이지 않게 되었으니 그리 할 수도 없게 되었다. 다만 담장 옆으로 예쁜 화초를 심어 오가는 사람을 반기고 있다는 사실만 확인할 수 있었다. 또 누군가는 이 공지를 활용하여 채소를 심었나 보다. 성곽과 축대 보호를 위해 빈 공터에 채소 등을 가꾸지 말라는 말뚝 안내판이 세워져 있어 그런 사실을 추정케 만든다. 빨간 맨드라미도 보이고 보라색 나팔꽃도 있다. 노란 담황색 꽃은 너무나 화려해 보인다. 이런 작은 정원은 성북동 마을계획단의 작품이다. 조금 더 나아가니 주택가 쪽에도 화단이 조성되어 있다. 담벼락 옆에 판자 두 개 높이로 경계를 만들고 그 사이 공간에 화초를 심었다. 너무나 예뻐서 그 꽃들의 이름을 확인해보았더니 국화과에 속하는 것들로 천수국, 금잔화 또는 백일홍 등이라고 한다. 성곽이 사라져 아쉬움이 남는 자리에 이런 예쁜 꽃으로 위로해 주시는 그 고운 마음에 감사드린다.

여기서부터는 성벽이 완전하게 사라져버린다. 한양도성은 모든 것을 시민들에게 내어주고 해체되고 사라져 버렸다. 우리의 중요한 문화재가 훼손되고 망가진 것에 대해 아쉬움도 있지만 혹독한 가난과 노동에 지친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고 그런 사람들의 쉼터가 되었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이해되는 측면도 있다. 6·25 동란 때 만들어져 많은 사람들에게 애창되던 가곡, 명태가 생각난다.


“검푸른 바다, 바다 밑에서

내 사랑하는 짝들과 노상

꼬리치며 춤추며 밀려다니다가

어떤 외롭고 가난한 시인이

밤늦게 시를 쓰다가 소주를 마실 때

그의 안주가 되어도 좋다.

그의 시가 되어도 좋다.

짜악 짝 찢어지어

내 몸은 없어질지라도

내 이름만 남아 있으리라.

‘명태’라고 이 세상에 남아 있으리라.”


이를 슬쩍 개사를 하여 이렇게 적어본다.


“드넓은 한양, 서울 속에서

내 사랑하는 사람들의 파수 군이 되어

그들을 지켜주며 때론 그들과 함께 춤추며 노닐다가

어떤 외롭고 가난한 노동자가

밤늦게 일을 하다가 깊은 잠을 잘 때

그의 따뜻한 온돌이 되어도 좋다.

그의 울타리가 되어도 좋다.

짜악 짝 찢어지어

내 몸은 없어질지라도

내 이름만 남아 있으리라.

‘한양도성’이라고 이 세상에 남아 있으리라.”


이렇게 사라진 성벽은 동소문 가까이 가서야 다시 나타난다. 어느 성벽은 개인 주택의 담장으로 활용되고 일부는 허물어져 온돌방의 구들장으로 쓰이기도 했겠지만 그 증거를 성북동이 끝나는 지점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옛 성벽이 집단 가옥의 담장이 되어 있는 것이다. 옛 성벽의 흔적이 남아 있는 지점에서 우측으로 돌아가면 서울시장 공관에 다다른다. 지금은 한양도성 안내소 및 전시관이 되었지만 이것은 1941년 일본인에 의해 지어진 일본식 2층 목조건물이다.

흰색 벽이 목재 건물과 잘 어울린다. 개방식 유리창이 많고 수직과 수평선으로 건물을 분할하고 있는 단순함이 건물을 더욱 단아해 보이게 한다. 1층으로 들어가니 밖으로는 커다란 유리 창문들이, 그 안쪽으로는 일본식 격자무늬 방문들이 우리를 맞이한다. 안쪽 방문도 활짝 열어두어 밖의 조경을 방 안까지 끌어들였다. 일본식 잔디 밭 너머로 서울 성벽이 보인다. 우리의 한양도성이 개인 주택의 울타리가 되고 정원의 아름다움을 더해주는 장식물이 되었다. 2층은 전형적인 일본식 목조 건물이다. 천정은 대들보가 드러나고 서까래가 씨줄과 날줄로 잘 짜여있어 지붕의 무게를 지탱하고 있다. 그 위로 지붕 판목도 보인다.

우리의 중요 문화재인 한양도성이 허물어지고 그들의 울타리가 되어 그들을 지켜주고 있었다는 사실에 당혹스럽기도 하지만, 그 건물이 주는 편안함도 같이 느껴진다. 이것도 우리의 역사이다. 아픔도 역사이고 이 건물 역시 그러한 역사의 산물이다.


드디어 동소문에 도착했다. 당초 홍화문(弘化門)이었던 것이 창경궁이 만들어지면서 그 이름을 헌납하고 혜화문(惠化門)이 되었다. 그러나 이 문은 한양 북쪽으로 가는 중요 관문이었다. 북문인 숙정문이 폐쇄되어 있던 관계로 북으로 가려면 이 문을 이용하여 돌아가야 했기에 동쪽에 있는 또 다른 작은 문이라는 의미에서 동소문이라고도 했다. 지금의 누각도 당초에는 없었던 것이다. 겸재 선생이 그리신 동소문 그림을 보면 둥근 아치 형태로 홍예 튼 석문만 있을 뿐이다. 그 위치도 바뀌어 옆에 있는 큰 도로인 동소문로 위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일제 강점기에 전차를 만들기 위해 해체시키면서 여기에서 나온 목재는 개인에게 매각했다. 그렇게 우리의 동소문은 사라진 것이다.

지금의 혜화문은 1992년 다시 복원한 것으로 천정에는 봉황을 그려 두었는데 성북동을 비롯해 주변 지역이 새들에 의한 농사 피해가 심한 까닭에 이를 제지하기 위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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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하는 성북동의 명소인 작은 식당 ‘디미방’을 부인과 함께 운영하고 있고, 요가와 명상 전문가이기도 하다. 우리 잡지의 편집위원으로 성북동을 사랑하는 마음을 늘 간직하고 있는 진정한 성북동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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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북동 사람들의 마을 이야기> 10호는 서울마을미디어지원센터 2017 마을미디어 활성화사업에 선정되어 사업비를 지원받아 간행되었습니다. 소개된 글은 2017년도에 쓰여져 잡지에 실렸으며, 2017 동 사업을 통해 웹진으로 발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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