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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북 Oct 18. 2018

문인들의 커뮤니티로서의 성북구
-성북/정릉을 중심으로

[11호] 우리 동네 작가를 소개합니다|글 김준현

지역 문인 연구의 새로운 방향


  성북구가 어느 지역보다도 문인과 예술인들을 많이 보유하고 있는 고장이라는 사실은 이제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한용운, 이태준, 박태원,  박경리, 조지훈, 이육사, 신경림… 이곳에 살았던 훌륭한 문인들의 이름만 해도 손으로 꼽는 데 한참 걸릴 정도이지요. 

  한일병탄 후 일본인들의 대량 이주가 발생하고, 사대문 안에서 살던 뜻 있는 지사들은 서대문 밖으로, 그리고 동대문 밖으로 흩어집니다(사대문 북쪽은 산으로 둘러 싸여서 막힌 것이나 다름없고, 남대문 밖도 일본인들이 차지하지요). 일본인들 등쌀에 견디기 어려웠던 것도 있고, 집값/땅값이 올라서 삶이 팍팍해졌던 것도 있고, 또 일본인들과 이웃 사이로 생활하는 것을 차마 견디기 힘들어진 것도 있지요. 

  그러다보니 뜻 있는 지사들이 동대문에 연해 있는 성북구로 많이 이주해오고, 그렇게 조성된 문화와 환경, 분위기 같은 것들 때문에 이 고장이 문인/예술인/지사들에게 각광받는 주거지로 거듭나게 됩니다. 그리고 1950년대부터는 많은 문화인들이 거주하고, 또 서로 교류하는 활발한 문화적 지역으로 그 이름을 날리게 되지요. 이러한 이미지는 지금까지도 잘 유지되고, 또 더욱 강화되는 것으로 보이기도 하지요. 

  그런데 지금까지 지역문인들의 발굴 · 정리가 활발하게 이루어졌지만, 그 방식에 대해서는 좀 반성해 볼 필요가 있어요. 바로 ‘거주사실’ 중심으로 지역문인들을 정리해온 경향에 대한 것이지요. 이 지역에 어떤 문인이 살았는가, 하는 것이 지역문인을 정리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기준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지요. 하지만 문인의 삶에서 중요한 사항들은 거주사실 말고도 많이 있지 않겠어요?   

  가령 그들이 어디에서 글을 썼는가, 어떤 직장을 다니고 무엇을 하며 생계를 유지했는가, 그리고 누구와 어떻게 교류했는가. 우리의 삶을 기억하고 복원하는 데 있어서 거주사실 말고도 이런 사실들이 역시 중요하듯이, 문인들의 삶에서도 이런 것들이 중요하지요. 이런 사실들을 두루두루 조사해야 그들의 삶을 보다 입체적으로, 복원하고 재구성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이런 조사는 그리 활발하게 이루어지지 못하고 거주사실 조사만 활발했지요.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거주사실’은 사실 아주 쉽게 조사할 수 있는 자료거든요. 주민등록 등본/초본만 검토해 봐도 금방 확인할 수 있지요. 

  “아, 조지훈 선생은 성북동에 이날 이주했구나. 박경리 선생은 이날 정릉동에 전입신고를 했네.”

  이런 식으로 말이지요. 지금까지의 지역문인 정리는 대체로 이런 식으로 이루어졌어요. 이것은 성북구에서만의 사정이 아니고요, 거의 전국의 지자체에서 예외 없이 이런 식으로 정리를 했지요. 그리고 아까 말했던 것처럼 성북구에서 거주한 사실이 있는 문인들의 수는 매우 많습니다! 그러니 이것만 가지고도 문인들을 거명하며 이 지역이 탄탄한 문인 명단을 갖고 있음을 알리는 데 어려움을 느끼지 않았지요.  

  하지만 이 단계에 만족하고 머무를 수만은 없지요. 이렇게 성북구에 많은 사람들이 살았는데, 그들이 교류하지 않았을까요? 이들 문인들이 활발하게 활동하던 당시, 성북구의 한 허름한 주점을 기웃거리고 들여다보면, 조지훈이 작곡가 윤이상과 막걸리 잔을 기울이는 광경, 혹은 이태준과 박태원이 잡지 <문장>이나 구인회 활동과 관련하여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는 광경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지 않았을까요? 정릉시장 앞의 어떤 포장마차에서 신경림 시인이 혼자 소주를 따르며 시를 구상하고 있는 장면을 볼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요.

  ‘거주사실’ 조사만으로는 이런 사실들을 충분히 복원해낼 수 없습니다. 물론, 이 정리는 당연히 꼭 필요한 작업입니다. 이런 명확한 사실관계의 확인은 향후 연구에 있어 필수적인 과정이 됩니다. 다만 거기서부터 출발해서, 이곳에 거주했던 문인들이 실제로 어떻게 살았는가, 어떻게 교류했는가를 살피는 작업으로 나아가야 할 필요성이 있다는 이야기지요. 

  하지만 이런 작업들은 사실, 굉장히 어려워요. 문인들의 회고록, 작품, 그리고 각종 매체에 기고한 잡문 등을 뒤져야 하지요. 하지만 이런 글들은 여기저기 흩어져 있고, 샅샅이 뒤져도 맑은 물에서 낚시를 하는 것처럼 큰 성과를 낚아내기가 쉽지 않지요. 글을 읽다가 글쓴이 행적에 대한 실마리가 나오면, 지역 문인들을 공부하는 연구자 입장에서는 반가워서 무릎을 치게 된답니다. 그만큼 언제 어디서 성과를 만나게 될 지 알 수 없는 일이지요.  

  지금까지는 우연히 발견되는 경우가 많았어요. 가령 제가 안수길 선생의 수필을 정리하던 중에, ‘어? 이분이 대표작 <북간도>를 성북동 암자에서 썼다고?’라는 사실을 예상치 못했다가 알게 되었을 때처럼 말이지요(암자에 머물렀던 것은 당연히 전입신고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기존의 방식으로는 알아내지 못했던 사실이지요). 하지만 지역 문화를 연구하는 데 들어가는 인력도, 자원도 늘어난 요즘은 이런 방식의 조사를 좀 더 체계적으로, 많은 에너지와 시간을 들여서 할 수 있는 상황이 마련되고 있습니다. 

  ‘문인들이 어디 살았는가?’에서 출발하여, ‘누구와 무엇을 하며 교류했는가?’로 옮겨가는 과정이지요. 현재의 지역 문인 연구는 바로 이러한 과도기의 과정 중 초입에 들어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글은 바로 이런 지점에 놓여 있는 성북구의 문인 연구의 성과를 지역 주민들과 공유하려는 의도를 갖고 작성되었습니다. 이 글은 2회 연재로 기획되었어요. 따라서 이번에는 성북구가 문인 커뮤니티를 활발하게 만들 수 있는 몇 가지 근거들, 그리고 계기들을 소개하고, 다음 회에서는 문인들 개개인의 교류 활동을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해방 이전 - <문장>과 구인회


  해방 이전 문인들은 주로 사대문 안의 출판사나 언론사에서 일하면서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작품의 고료만으로 윤택한 생활을 할 수 있는 문인은 예나 지금이나 많지 않았어요. 하지만 그들은 밤이 되면 사대문 밖으로 ‘퇴근’을 하곤 했지요! 그리고, 술을 마시고 문학을 논했어요(문인들은 누구보다도 술을 좋아하지요). 성북구가 바로 그들이 퇴근하던 대표적인 베드타운 중 하나였던 것입니다. 

  <문장>은 해방 이전 최대 규모를 자랑하던 순수 문예지였습니다. 일본이 전시동원체제를 내세워 ‘조선어 말살 정책’을 펼치던 어려운 상황에서도, 민족문학의 보존과 발전에 뜻을 둔 문인들이 안간힘을 모아 간행하던 중요한 유산이지요. <문장> 간행에 담당했던 문인들과, 그 이전부터 문단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구인회’에 참여했던 문인들은 상당 부분 교집합을 이룹니다. 그리고 <문장>과 구인회에서 구심점 역할을 했던 사람들이 바로 성북동에 거주했었던 이태준과 박태원이었지요. 이들보다는 한 세대 뒤인 조지훈은 정지용에 의해 <문장> 추천으로 등단한 시인이랍니다. 

  이렇듯 <문장>이라는 문예지와, 구인회라는 문학단체는 문인들의 상호교류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거점이 됩니다. 그리고 여기에 참여한 문인들은, 다른 후배문인들에게도 영향을 주어서 더욱 많은 문인들이 이사 오게 되는 계기를 만들게도 하지요. 이렇게 활발한 문인들의 교류 조건은, 지금은 많이 잊혀진 일이지만 당대 문인들에게는 잘 알려진 사실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당대 최대의 베스트셀러 작가였던 김내성은 그동안의 고료를 모아서 성북동에 큰 집을 사서 이주하기도 하지요. 성북동을 중심으로 한 성북구가 ‘문인들의 고장’으로서 일찌감치 명성을 획득할 수 있게 되는 데는 이러한 교류 활동의 중심 거점이라는 조건이 숨어 있었습니다.


해방 이후 - <현대문학>과 <자유문학>


  해방이 되고, 한국전쟁을 겪은 후 우리 사회는 격변의 과정을 거칩니다. 문인들이 몸담고 있던 문단도 여러 가지 방향으로 재편성되지요. 당시 문인들은 문예지를 중심으로 문인 단체를 형성합니다. ‘문인단체’를 형성하려면 자신들의 문예지를 가져야 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당대 문인들에게 문예지 활동은 필수적인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1950년대 한국 문단을 양분하던 문예지는 <현대문학>과 <자유문학>이었습니다. 두 잡지는 ‘순수문학’과 ‘현실참여문학’을 각각 주창하면서 날카롭고 치열한 대립을 보여주기도 했지요.<현대문학>의 주요 참여 문인은 김동리, 서정주, 조연현, 조지훈 등이고, <자유문학>의 주요 문인은 김광섭, 안수길, 이헌구, 박연희 등을 들 수 있습니다. 아마 성북구 지역문인들에 관심이 있었던 독자들은, 이 이름을 들으면 대략 감이 오실 겁니다. ‘아, 대부분 성북구 문인들이네?’ 이렇게 말이죠.  

  맞습니다. 낮에는 종로나 명동의 출판사나 신문사에서 문단 활동을 하던 문인들이, 밤이면 퇴근하여 저녁의 삶을 꾸리던 이 고장에서 두 잡지 문인들이 활발하게 교류한 정황이 발견되는 것입니다. 

  한국전쟁 후, 성북동뿐 아니라 돈암동, 정릉동, 안암동과 종암동 등도 택지로 활발하게 계발되고, 인구가 급증합니다. 따라서 문인들의 커뮤니티는 ‘성북동’에서 ‘성북구 전체’로 넓어지게 되지요. 그 중에서도 문인의 고장으로서 정릉동의 성장은 주목할 만합니다. 정릉동에 살았던 조연현, 계용묵, 조영암 등은 <현대문학>의 필진으로 활발하게 활동하지요. 그리고 성북동의 조지훈 등과 교류하며 그 문예지 발간과 관련된 제반 사항을 논의했을 것이고요. 또, 성북동에서 살거나 활동했던 김광섭, 안수길 등은 정릉동에 거주한 박연희 등과 함께 <자유문학> 발간을 논의합니다. 한국문학의 대표 저작인 <광장>을 집필한 최인훈은 바로 안수길의 추천으로 <자유문학>에서 등단합니다. 이 두 작가가 사제 관계로 교류했던 곳도 바로 성북구이지요. 

  이렇게 당대 한국 문단을 양분했던 두 문예지의 핵심 멤버들을 보유했던 성북구, 문인의 고장으로서의 위상은 점점 더 탄탄해지기만 합니다. 성북동과 정릉동을 중심으로, 성북구 전체에서 여러 층위에서 문인들의 교류가 활발해지는 계기가 마련되는 것이지요. 


그 밖의 문인 커뮤니티


  지금까지 해방 이전과 이후로 나누어서 성북구의 문인 커뮤니티가 활발하게 이루어질 수 있었던 조건과 환경에 대해 이야기해보았습니다. 문인들의 교류 관계는 매우 복잡하지요. 낮에는 치열한 지상논쟁을 벌이면서도, 밤에는 동네 술집에서 반갑게 만나 서로 술잔을 기울이기도 하는 글동무들이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그들의 구체적인 삶은 앞으로 차차 복원이 되겠지요. 그리고 그러한 커뮤니티는 지금도 성북구를 기반으로 하여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문인들과 예술가들에 의해 더욱 더 다채로워지고, 새로워지겠지요.

  산업화 시대를 겪으면서, 지역 문인들의 커뮤니티는 그 양상이 더욱 다양해졌습니다. 지역 기반 문학 활동의 중요성이 강화되면서, ‘성북 문인 협회’의 활동이 점점 더 왕성해지기도 하고, 문인 최정희의 제자 등이 결성한 ‘정릉클럽’이 함께 수필집을 간행하기도 하는 등, 다채로운 성격과 규모를 가진 지역 기반 문인 커뮤니티들이 탄생하고, 운영되었습니다. 

  학교를 중심으로 한 문인 커뮤니티도 빼놓을 수 없지요. 성북구에는 많은 대학이 자리하고 있고, 고려대학교와 1972년까지 돈암동에 위치해 있었던 서라벌예술대학교에서는 많은 문인이 배출되고, 또 그곳에서 교편을 잡았습니다. 조지훈, 안수길 등 많은 성북 문인들이 학교에서 제자 문인들을 키워냈지요. 

  문인 스스로 ‘단체’임을 강조하지 않아도, 각각의 문인들의 공통점을 강조하여 연구자나 평자들이 그들을 커뮤니티로서 호명하는 경우들도 있습니다. 가령 정릉동에 ‘여성 문인’들이 많은 것을 주목하여 그들의 집단으로서의 성격을 강조한다든가, 성북구 전체에 지사적인 성격을 가진 문인들이 많아서 한용운과 이육사 같은 분들을 하나로 묶어서 논의한다든가 하는 식으로 말이지요. 

  앞에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이제는 문인들의 개인 행적과 함께 그들의 교류활동도 구체적으로 알리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의 교류는 학교, 성별, 잡지, 출신 지역 등 실로 다양한 종류의 구심점을 갖고 이루어졌기 때문에, 앞으로 조명하고 복원해야 할 사실과 기억들이 무궁무진하게 남아 있답니다. 

  이번 회에서는 성북구의 문인 커뮤니티가 활발하게 이루어질 수 있는 조건에 대해 크게 일별하였습니다만, 다음에는 좀 더 구체적으로, 커뮤니티 각각의 활동 양상을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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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현은 성신여자대학교 문화내러티브 전공교수이다. 고려대학교에서 현대문학/소설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상허학회 총무이사, 한국여성문학학회 연구이사 등을 역임했다. 현재 상허학보 편집위원이다. 주요 논문 및 저서로는 <전후 문학 장의 형성과 문예지>, <해방이라는 한국문학의 경계와 이태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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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동 사람들의 마을 이야기> 11호는 서울마을미디어지원센터 2018 마을미디어 활성화사업에 선정되어 사업비를 지원받아 간행되었습니다. 소개된 글은 2018년도에 쓰여져 잡지에 실렸으며, 2018 동 사업을 통해 웹진으로 발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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