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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하 SEONGHA Aug 12. 2024

바다의 사나이, 육지에서 표류기

01년생, 해기사, 졸업과 동시에 취업했지만 이별, 이를 극복한 이야기.


‘졸업 직후 이별’


대학을 졸업하고, 책과 가까워졌다. 계기는 단순했다. 나를 사랑했던 사람의 마지막 바램이 그것이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배신감과 모멸감이 나를 힘들게 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그렇게 멍청해 보여? 내가 책을 안 읽어본 줄 아나 본데, 나 공부 진짜 열심히 하거든?


그렇게 우리는 서로에게 사망선고를 내렸다. 실제로 그런 말을 한 건 아니였다. 지금은 느낄 수가 있다. 아마 날 가장 가까이에서 보려 했던 사람이기에 내 생각을 읽었을 거라 생각한다.


한 때, 나는 책을 사랑했다. 썸녀에게 아끼는 책을 선물하는 F 300% 인간이었다. 쌍둥이 우주 비행사들의 이야기. 소설이지만 공감했고,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감동을 느꼈기에 이 감정을 공유하고 싶었다. 지금은 그 친구들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 (이 기억 때문에 자존심이 상했나 보다)


내가 책과 서먹해진 계기가 있는 건 아니다. 초등학교 절친처럼 소원해져서 멀어졌다. 사는 게 치열했다. 그렇게 생각했었다. 고통스럽다고 이게 젊음이라면 “피곤하고 날 지치게 만드는 거 너나 하라고” 공감능력 결여된 이런 말 하는 꼰대에게 전해주고 싶다. 물론 그런 용기는 없었다. 독서와 손절하고 졸업을 하고 취업을 했다. 취업에 성공하니 그녀가 헤어지고 싶다고 솔직한 마음을 전했다. 사실은 통보였고, 그 후로 연락 한번 닿지 않는다. 정말 죽어 버린 건가 이제는 아련하기까지 하다.




‘방황’


취업한 이후에 시간이 정말 많았다. 4년 간 쉬지 않고 굴려갔던 내 인생은 관성처럼 새로운 일을 하려고 이곳저곳으로 굴려간다. 심지여 빠르고 묵직하다.


바쁜 일 하나 없는 하루인데, 아침 일찍 일어나서 방 밖을 나선다. 4년 만에 돌아온 내 방이, 하루 밤 머무는 쪽방처럼 답답하고 좁게 느껴져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지금 내 방은 도서관이자, 영화관이자, 카페로 상상력이 풍부해지는 소중한 공간이다.)


바쁜 일 하나 없는 하루의 시작은, 07시에서 시작해 모닝커피로 시작한다. 전날 가보려 했던 광주광역시 어딘가로 하루 종일 길을 헤맨다. 나도 내 방을 가지고 싶어서, 부동산도 열심히 뒤졌다. 영어공부, 회사 매뉴얼, 주식, 전기기사, 심지여 회계까지 2주를 못하고 분야를 바꿔가며 공부도 했다. 물론 성과는 없었다...


끝없이 헤매는 삶을 살다 보니 나의 업은 친구의 고민 상담가가 되어있었다. 취업 전문가가 되어서 자소서부터 면접까지 그 사람 인생을 대신 살아버렸다. 나에게 남는 건 경험. 오만하기 그지없는 생각이었다. 결국 자기만족으로 타인의 성취감을 빼앗아 버린 거 같아서 그때가 후회된다.


길을 잃었다. 막막했다. 발걸음은 빠른데 목적지가 없어서 앞으로 앞으로... 관성적으로...





‘독서’


다행히 그런 나를 누군가 구해주었다. 버스를 타고 가면서 책을 읽는 누군가를 보았다. 두툼한 책을 뚫어져라 보다가 갑자기 혼자 실실 웃는다. 부러웠다.


부러운 감정과 동시에, 예전 그녀의 말이 떠오른다. 소심한 그녀가 독서를 권하는 그 말 한마디가, 한 달이나 늦게 도착해 버렸다. 머리를 정말 씌게 얻어맞았다. 그때는 왜 몰랐는지, 후회할 시간도 없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언젠가 읽으려고 쌓아둔 책을 정신없이 넘겼다. 초반 30페이지 열심히 읽었던, 흔적 가득한 내구도 87%짜리 책이 이 여정의 시작이었다.


그냥 읽었다. 11시 즈음 도착해서 씻지도 않고 밤을 새웠다. 충혈된 눈으로 해가 뜨는 것도 모른 체 집착했고, 마지막 문장을 읽은 순간 카타르시스와 함께 잠들었다.


처음 한 달은, 중독이었다. 이 카타르시스와 고독한 느낌 자체가 매우 중독적이었다. 카페에서 읽는 것도 안된다. 혼자 고독해야 했다. 읽는 속도가 점점 빨리 지는 것은 네가 성장하는 기분마저 느끼게 하며 독서의 즐거움보다는, 빨리 읽는 게 목적인 냥 하루에 두 권씩 해치웠다. 그 누구 와도 연락하지 않고 집에서 책만 읽었다.


필요한 건 밥과 책 이 두 개. 하루를 보내기가 힘들지 않았다. 외롭지도 않았다! 작가와 나는 단둘이 속닥속닥 대화 나누느라 정신이 없었다.


2주 정도 지나 친한 대학 동기에게 연락이 왔다. 나를 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정말 고마웠다. 하지만 나는, 대학시절 학과와 동아리, 동문, 논문팀을 진두 지위하던 대장부가 아니게 되었다. 내성적이라 사람 눈도 못 마주치는 사람이 되어있었다. 나부터가 머리가 복잡해서 ’이게 내가 생각한 건지 ‘ ‘어느 누군가의 이야기였는지’ 자꾸 의심이 들어서 함부로 음성을 낼 수 없었다.


특단의 조치로 기억에 남는 책들을 책상 위에 올려두고 자아를 분리시켜 보았다. 이건 쇼펜하우어, 이건 니체, 이건 베르나르 베르베르, 시몬 페레스...


일종의 기억과 자아의 분리였을 거다. 다른 사람들의 삶을 기억하느라 내 삶에 대한 기억이 희미해지던 어느 날.. 오랜만에 내 인스타 계정에 들어갔다…


힘들었던 순간들, 감정이 격양된 순간들, 즐거웠던 순간, 나를 대신해서 전부 기억하고 있었다. 갤러리도 한참을 봤다. 나 이런 사람이었구나... 나에 대해서 궁금해졌다…


나를 찾는데 오래 걸리진 않았다. 나와 시간을 나눈 사람들과 대화하고 사진을 보고 내가 쓴 글을 보면서 기억해 냈다. 오랜만에 주성하라는 캐릭터에 로그인한 기분이었다. (어릴 적에 메이플스토리를 좋아했다. 만렙도 찍어본 적 있다!)


나를 돌아보다가 관계가 소원해진 친구들이 그리워져서 만나고 다녔다. 그녀도 만나보려 했지만 연락이 닿지 않는다. 나를 찾으며 책도 읽기는 버거웠다. 시간이 부족해서 잠을 쪼갰다. 그때 만난 쇼펜하우어가 내게 조언을 했는데, 학이불사즉망 사이불학즉태였다. 서양 친구가 한자 섞인 말을 하니까 이상했다. 동서양의 철학이 이구동성 하는 게 그런 거라면 일리가 있는 말이겠지. 궁금해져서 무슨 말인지 이해해 보려 노력했고 지금은 내의 길잡이가 되는 말이다.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


논어 위정 편, 학이불사즉망, 사이불학즉태. 간단하게 말해서 공부만 하고 생각을 안 하면 어둡고, 생각만 많이 하고 공부를 안 하면 위태로워진다는 말이다. 정말로 공감했다. 내가 태어날 것을 염두에 두고 이런 말을 남긴 거 아닐까. 고맙고 존경스럽기까지 했다.


그러면 추구해야 하는 건. 중용! 간단하네! 부족하지도 과하지도 않게!! 자신 있지!  


우습다. 이게 간단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그때의 네 머리가 부럽다. 정말!! (귀멸의 칼날 중)


아무튼! “길잡이가 되어서 중용을 추구했다~” 그 정도만 알아주면 감사하겠다. 그때 당시 생각에, 지금은 과하게 공부만 했으니, 몸을 좀 써보고 싶었다. 유튜브 알고리즘은 그런 나의 니즈를 어떻게 또 알았는지 때마침 검도를 해보라고 한다. 자연스럽게 검도를 동경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검도를 배우고 싶었지만 집안 사정으로 부모님이 끝내 시켜주지 않았던 검도!


이종원 검사님의 '검도와 인생'이라는 책을 구입했다. 정말 구하기 어려웠다!! 검도에 관련된 책이 이렇게 없을 줄이야... 이종원 교사님도 책 중에 공감하셨다. 아무튼! 이 책을 산 이유, 읽은 이유는 간단하다. 24살 큰 덩치의 내가, 어린이들과 같이 검도를 배워도 된다는 말 한마디가 필요했다.




‘검도 1, 입문’


지금부터~ 4개월간 대한검도의 검도를 배우며 나름의 검도를 걷고 있는 사람으로서, 24살 해양대 졸업생이 느낀 검도 입문기를 소개합니다! 이렇게 나의 ‘검도 일지’가 시작했던 거 같다.

(검도 일지는 검도에 관한 이야기를 쓴 나의 책이다)


나는 검도 이야기할 때, 난 늘 설렌다. 누가 나를 띄어 주려고 “성하야 못하는 게 뭐야?”라고 말하면 나는 이제 자신 있게 말한다. 검도 못해! 종종 나를 좋게 상상하는 사람들이, 이런 부담스러운 말을 하면 이제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어서 좋다. (사실 못하는 거 엄청 많은데….)


내가 검도에 관심을 가진 계기는 나름 특별하다. 큰 덩치의 사람이다 보니, “복싱이나 주짓수를 하기에는 체급이 안 맞겠다”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그래서 검도는 시작하기 편안했다.


검도의 시작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처음 2개월간은, 호구(대련을 할 때 쓰는 보호장비)도 없었다. 그저 죽도 하나만 후리고 또 후렸다. 그게 뭐라고 엄청나게 힘들었다. (검도는 내리치는 걸, ‘후리다’라고 한다)


검에 대한 이해와 검을 잡는 법, 검사로써 마음가짐과 보법, 인내심에 대해서 훈련하는 시간이었습니다. 멀리서 보았을 때의 검도인은 큰 소리로 용맹할 뿐, 유도나 복싱처럼 땀 흘리며 고통을 인내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허나, 가까이에서 검도를 보았을 때, 2~3kg의 죽도(목검)는 마음처럼 움직여주지 않았습니다. 심지여 검을 들고 있는 맨몸 마저, 걸음마를 처음 배우는 아이처럼 이따금 발이 꼬여서 넘어질 것만 같았습니다. -검도 일지- (검도 일지는, 내가 쓴 검도에 관한 책이다.)


검도 또한 집착을 해버렸다. 이쯤 되면, 집착남이라 불려도 할 말이 없겠다 싶었다.


'검도’에 집착하기 시작한 것은, 시작 3주 차부터였다. 검도 도복을 처음 입고, 하루 종일 검도만 생각했다. 검도장을 가기 위해서 아침에 일어났고, 체력 회복을 위해서 잠을 잤다.


개인적으로 검도복(가루이)이 진짜 예쁜 거 같아서 마음에 든다. 가끔 검도복이 입고 싶어서 검도장을 찾기도 한다. 자주 나오겠습니다. 관장님 :>


손 발에 물집이 터지고 굳은살이 배기기 시작하자 뿌듯함을 느꼈다.


소란스럽게 느껴졌던 “머리!!!!!!”라는 소리가 단호한 기합이 되었을 때, 검사들의 사소한 몸짓이 아름답다는 찬사가 쏟아지는 디테일이었다는 게 느껴진다.


신비한 경험이었다.


검도를 배우기 시작한 지 5주 차, 승선근무를 위해서 3주 간 진해해군사령부에서 승선근무예비역 대상의 군사교육을 받으려 가야만 했다. 이미 중대장 훈련병을 할 생각에 들뜬 마음으로 갔다. 무료한 일상이 심심하게 느껴질 때 즈음, 해기사로 한 발 진보할 수 있다는 게 컸다.


하지만 순탄치가 않았다. 입영 일주일 전에 검도를 하며 힘을 쓰는 발(왼발) 발등에서 통증을 느꼈다. 일상생활이 불편했다.


훈련소에서 내 칼이 녹슬 거라는 노파심에 너무 무리해서 그렇다. 힘줄에 문제가 생겼어!.라고 생각해서, 가정통증의학과를 가서 고주파 충격을 주어 힘줄을 치료하는 시술을 받았다. (사실 미세골절에 의한 통증이었기에 이건 독이었다).


치료를 받으며,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군사교육을 받는 3주 동안 휴식기를 가지고 다녀온 다음에 검도를 열심히 하면 되겠다는 계산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그렇게 미세골절은 상상도 못 한 체, 입영통지서를 들고, 5월 27일 설레는 마음으로, 해군 훈련소에 입소했다.





‘해군 훈련소 입소’


훈련소 입소 후 계획대로 중대장 훈련병에 지원했다. 내가 중대장 훈련병이 되어야 하는 이유!

10가지를 준비해서 취업 면접 준비하듯 면접관 입맛에 맞을 답변을 준비해 놨지만, 아무도 그 이유를 물어보지 않았다. 그냥 내가 적임자였다. 그렇게 나는 훈련소 동기들을 열혈이 향도하는 에너지 넘치는 중대장 훈련병이었다.


훈련소 7일 차, 사건이 터졌다. 훈련소 입소 후부터, 점점 커져가는 통증이 버티기 힘들어졌다. 아프다고 하면 심각하게 여길 까봐. 말도 못 하고 꾹꾹 참아가며, 몰래 들고 온 파스로 연명했다. (이게 없었으면 3일 차에 알았을 텐데…)


7일 차 오전, 첫 주 훈련이 끝나고, 야전교육 대대로 이동하여, 각개전투와 유격, 행군을 할 참이었다. 사실 무리였지만, 중대장을 지원한 책임 때문에 통증을 꾹 삼키고 각오를 했다. 4일 정도만 버텨 보리라…. 각오를 다지며, 발등에 파스를 뿌리고 스스로 괜찮다고 격려도 했다. 옆자리 동기도 모를 정도로 철저히 아픈 걸 숨기고 밝은 척했다.


7일 차 오후, 이동을 위해 짐을 꾸리고, 야전교육 대대로 이동하기 위해, 우리 승근 93기는 짐과 총기를 챙겨 트럭에 싣었다. 어느 정도 정리가 끝나고, 나는 마지막 확인을 위해 생활관 3층으로 부소대장 훈련병과 함께 특이사항을 점검하려 계단을 올랐다. (약간 긴박한 상황이었다)


그때가 변곡점이었다. 누적된 통증과 생각할 것이 많아 압박받는 상황에서 계단 마지막 한 칸에서 발을 굴렸다. 평소라면 사소한 해프닝일 법한 충격이었다.


다시 자세를 바로 잡고, 3층 바닥에 발을 딛는 순간, 발등에 뼈가 ‘박살’ 나 있음을 직감했다. 그 직후 앞으로 꼬꾸라지고, 등골 깊숙한 곳에서부터 서늘한 기운이 온몸을 장악했다. 전년도 오른발목이 골절된 적이 있는데, 그때의 악몽이 떠오르며, 승선을 앞둔 상황에 꿈을 위한 한 발을 두고 절벽으로 떨어지는 심정이었다.


현실을 부정한 체, 훈련을 끝내고 싶은 욕심과 지금까지 통증을 무시한 어리석음 사이의 팽팽한 줄다리기가 시작되었다. 막상 막하의 싸움 끝에, 합의점으로써 의무대에서 치료를 받은 후 훈련을 계속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별일 아니겠지 라는 마음으로 진료를 받았고, 진료 결과는 뜻 밖이었다!

 지금 당장, 의사는 나에게 퇴소해야 한다고 말한다.




‘퇴소’


솔직히 인정할 수 없었다. 정형외과 전문의도 아닌 안과 전문의의 진단을 따르기 에는 지금까지 7일간의 훈련과 이제 막 신뢰받기 시작한, 중대장 훈련병 자리가 아까웠다.


“솔직히 인정할 수 없습니다!”

훈련소 입소 직전까지, 수도 없이 CT를 찍으며 “골절은 아닐 거야…” 그렇게 생각했기에 나는 주장했다. 그렇게 나의 고집으로 목발을 짚으며, 야교대로 이동했다. 다음 날 정형외과 전문의의 진료를 받기로 했다. 하지만, 드라마틱한 반전은 없었다. 나는 몸을 함부로 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다음 날 아침, 정형외과의 진료를 받았고 강제 퇴소 명령을 받았다. 제발 한 번만 다시 고려해 달라고 부탁했지만, 끝내 귀가 절차를 밟아야 했다.

 

귀가 준비를 위해, 이미 전역 증표를 달고 있는 전투복을 반납하며, 처절한 절망감을 맛보았다. 집에서 3시간 거리를 한 걸음에 달려온, 부친과 동생에게 상황을 설명하며 안심시켰다. 사실 격려가 필요한 건 나였다. 집에 가는 길 상황을 잘 정리하고 또 정리했다. '데일 카네기'가 말을 걸어주었다. 상황을 잘 정리해 보니 고민할 것이 없었다. 내가 해야 하는 건 받아들이는 일뿐이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회사에 보고를 통해서 승선과 다음 군사교육에 대한 정보를 공유받았다. 현재 나의 상황과 군의 이해관계 또한, 공유했다.


퇴소 직후, 검도… 그 당시에도 검도뿐이었다. 거동이 불편한 상황이지만 검도를 하고 싶었다. 뭐라도 ‘추구’ 해야 했다. 도피처였던 거 같다.


하지만 좌절감 때문에 다시 검도장을 찾아갈 수는 없었다. 훈련이 끝나고 와서, “훈련 별거 아니였어” 말하고 싶었기에 ‘용기’가 필요했다. 훈련소 입소 전,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냐는 관장님의 조건이 떠올라서, 나를 더 힘들게 했다.

 

다리에 골절 경험 있다면 이 순간을 공감할 수도 있다. 이성적으로 생각한다면, 뼈가 회복된다면, 다시 걷고 뛸 수 있다. 하지만, 골절 당시에는 왠지, 평생 불구가 된 거 같은 기분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작년과 달랐다. 내가 해야 할 것은 간단했다. 정형외과 전문의의 조언을 따른다. 조언에 따라, 나는 회복에 전념했다.


골절에 대한 가능한 많은 정보를 모아서 그대로 따랐다. 이때부터 지금까지 금연한다. 고작 미세골절에 불과한 조그마한 균열이 나의 온갖 정성에 화답하듯이, 2주 만에 조금씩 걸을 수 있게 되었고, 집 앞의 카페 정도는 목발 없이 다녀올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카페인도 안 먹었다.)


이제 좀 살만 해졌는지, 다시 검도를 하고 싶었다.


병무청과도 원활한 일정 조율이 끝나고, 마음에 평화가 다시 찾아왔다. 이제 검도를 다시 할 용기만 있으면 됐다. 이종원 교사님이 또 말을 건다. “보는 것도 검도다” 정말 나에게 필요한 말이었다. 용기를 주었다.




‘용기’


원래라면 훈련소가 끝났을 시기, 귀가 후 2주라는 시간이 흘려갔다. 자연히 나는 집에서 독서를 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이때 관장님의 조언에 따라, 광주 검도동호회 리그전을 관전하게 되었다.


검도를 하며 비슷한 시기 시작하여 친해진 누나가 리그전에 참여한다는 것은 응원과 동경의 대상이었다. 솔직히 부러웠다. 차량 문제로, 내 차로 선수들과 함께 이동했다. 자연히 내 옆에 앉은 그녀는, 내가 검도를 다시 할 수 없는 이유 100가지를 전부 받아쳤다.


 T 90%인 그녀이기에 가능한 말들이었고, 내게는 응원이었다. ‘용기’가 생겼다. 발에 골절이 있는데 꾹 참고 하란다. (관장님이 학생부에게 자주 하시던 말, 힘들어도 목말라도 참고하세요)


참으로 상냥하면서도 무서운 말이다….


리그전이 끝날 때, 나는 이미 맨발로 경기장에 서 있었다. 당장 검도를 시작하고 싶은, 입문 초기 초심이 되살아났다.


그럼에도 검도장을 찾는 길은 마음이 불편했다. 내가 신성하다고 느끼는 검도장이, 나로 인해서 더럽혀진다는, 오만함이 있었다.


관장님은 그런 나를 꿰뚫어 보신 거 같다. 그리고 나에게 필요한 말을 정말 가볍게 해 주셨다. “기본을 다시 하기 좋은 시기 내요?


"내일도 나와요 성하 씨” 평소 호탕하신 관장님이지만, 그 말은 내일도 나오라는 말이다. 진짜다…. (정말이다…) 옆에 계시던 사범님도 당연하다는 듯이 같은 말을 하신다…. 내가 이상한가 싶었다.


진짜 갔다.

(정말로 가는 나도 좀 이상하다.)


정말 나에게 중요한 시기였다. 나는 한 분야를 정통한 사람을 존경한다. 관장님은 검도를 정통하셨다. 틀린 말을 하시지 않았을 거라 믿었다.


'발동작에 집중하던, 나의 시선'을, 손으로 옮겨 볼 수 있는 말이었다. 앉아서 검도를 하면서도 나는 행복했다.


"근력이 좋은 사람이기에 간과할 수 있었던 손동작을 더욱 엄격하게 수정했습니다."

-검도 일지-





'검도 2, 리그전 참여'


시간이 더욱 흘렸고, 퇴소 이후 4주가 지났다. 앉아서 하는 검도 덕분에 더 좋은 검도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그분을 믿었고, 그분은 나에게 리그전 참가를 권했다. 내가 동경했던 그 대회다.


사실 엄청 고민했다. 나도 하고 싶은데, 아직 부족한 거 같아서, 선뜻 참가자 명단에 이름을 올릴 수 없었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내 이름은 이미 참가자 명단에 올라가 있었고, “성하 씨 이번 리그전 참여 하실 거죠?”라는 물음에 “네!!!”라고 대답하기 전부터 이미 내 마음을 알고 계신 거 같았다.


"그렇게 나는 그곳으로 갔다."






‘진짜 검도’


진짜 검도는 대련이었다. 상상 속의 상대를 후리는 기본기와는 너무나도 달랐다.


상대와 나의 수 싸움이었고, 기세와 경험이 중요했다.


첫 경기 참가라 큰 기대는 없었지만, 낙담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나름 열심히 준비했다고 생각했기에, 실점 한 번에 마음이 크게 요동쳤다.


내 감정이 눈빛을 타고 상대에게 전해지는지. 마음이 약해질 때마다 상대가 나를 압박한다.

숨 막히는 긴장감이었다.


“숨이 그렇게 찰 수가 없었다.”



경기를 하면서 기억에 남는 순간이 많다. 상대의 키, 눈빛, 검의 움직임, 발의 움직임, 어깨를 으쓱 이는 습관…. 너무나 생생하다.


'첫 키스의 순간처럼 강렬하고 짜릿했다. 그리고 짧게 느껴졌다.'


검도 경기에 참여하고 나니, 나의 올해의 버킷 리스트 하나가 채워졌다. 이로써, 검도에 대한 집착이 끝났다. 좀 더 여유롭게 검도를 할 수 있게 되었고, 이따금 영화나 전시회를 보려 검도장을 땡땡이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


나는 이를 바람직하게 보고 있다.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즐기는 검도를 시작한 거라고 생각한다.





‘이별에 대한 상처’


이별에 대한 상처가 어느 정도 치유된 거 같다. 사실 마지막 연애에서 큰 상처를 받았다. 정말 진심을 다해서 사랑했던 사람이었다. 승선하는 나를 꼭 기다려 줄 것이라고 말했었다. 그 말을 믿었고, 이 사람이라면 먼 미래를 함께 드릴 수 있을 거라 기대했다. 그런 사람이 떠났으니, 사랑을 다시 꿈꾸기는 쉽지 않았다.


지금은 지인에게 소개팅도 받고, 썸 비슷한 것도 가진다. 상처에 대한 회복기에 접어든 것이다. 하지만, 이제 연애가 절대적으로 필요하기보다는 삶의 부수적인 것으로 보인다.


특히, 사람 보는 눈이 전과는 달라졌다는 게 느껴진다. 결정적으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찾는다는 게 다르다.




‘유대인’


책을 읽으면서도 특이한 점을 찾았다. 내가 읽는 책들에 꼭 유대인이 얼굴을 비춘다. 스쳐 지나가듯이 인사를 건넨다. 내가 주로 읽는 책들의 저자들이 꼭 한 번씩 유대인을 언급한다.


우리와 같이 단일 민족 국가인 점, 2,011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국가가 없었지만, 다시 국가를 건립할 정도로 단단한 유대감, 그들의 윤리, 도덕관, 학습에 대한 열정. 내가 보는 유대인에 대한 이미지는 이러했다. 자연스럽게 ‘유대인’을 동경하게 되었다.


이 특이점을 찾은 후에, 나는 이 호기심을 채우고 싶었다. 그렇게 유대인에 관해 책을 샀다. 이런 책을 구할 때는 ‘교보문고’ ‘영풍문고’ 보다는 알라딘에서 찾는 편이 더 빠르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오래된 책이 많이 있는 곳이라는 점'과 ‘유대인에 관심 있는 사람이 얼마 없다는 점’에서 그런 책을 쉽고 싸게 구할 있다는 장점이 있다.


 유대인에 대한 서적 5권을 구입한 후에 정말 재미있게 읽었다.


자연스럽게 유대의 역사와 가치관을 배웠고, 감정이 이입된다. 종교에 관해서도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무교라고 주장하고 다녔지만 지금은 그리스도교라고 말하고 다닌다. 나는 ‘모태 신앙’ 이지만 교회는 다니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주일에 교회를 가는 건 당연한 일이 되어버렸다.


“갑자기 왜 교회를 다녀?”라고 누가 물어보면 이렇게 답변할 생각이다.


"그리스도교와 나의 이해관계가 괜찮아서" 그게 이유다.


나는 절대자가 필요하다. 추구해야 하는 도덕적 절대자. 평화를 지향하고, 너무 자주 간섭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신이 있다면, 유일신 하나만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 종교활동 하면서 읽을거리가 많았으면 좋겠다. 나와 그 종교는 이해관계가 정확히 일치한다. 그래서 교회를 다닌다.


아마 중대장 훈련병 사태처럼 아무도 이유를 물어보지 않을 거 같다. 하지만 이러한 이유를 만드는 것은, 스스로를 설득시키는 나의 굳어진 오랜 습관이다.


이러한 습관이 내가 ‘글을 쓰게 된 이유’이다.




‘글쓰기’


시작은 사소했다. 나는 혼자 생각을 많이 한다. 복잡하고 정리되지 않는 사건들... 무엇이 옳은가... 어떤 게 선한 것인가... 내가 해도 되는 일인가...


정리되지 않던 생각이 머릿속에서 번쩍 하고 정리되는 순간들이 있다. 이런 일들은 꼭 잠들기 전에 일어난다. 그래서 나의 밤잠을 늦춘다. 안심하고 잠을 자기 위해 메모를 쓰기 시작했다. 그게 글쓰기의 첫 시작이었다.


메모를 하다 보니 글이 점점 쌓이고, 분량이 5페이지, 10페이지가 되더니, 이렇게 긴 글이 되어버렸다. 번득이는 아이디어를 나만 간직할 수 없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적었고, 그걸 가까운 사람들에게 공유하기 시작했다. 반응이 괜찮아서 조금씩 재미를 붙였다.


책을 많이 읽다 보니, 글쓰기가 어렵지 않아 졌다. 오히려 평서문을 쓰는 게 낯설게 느껴져서, 썸 타는 사람이랑 카톡 내용을 보면, 정말 오그라든다. (그걸 이해해 주는 거 같아서, 나는 마음 따뜻한 그분이 너무 좋다. 혼자만의 착각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나의 경험을 솔직하게 술술 불어버리는, 이 필체를 가진 계기는 따로 있다. 아버지였다.




'나의 첫 책, 바다 사나이, 육지에서 표류기'


이 책을 쓰게 된 계기는 아버지 영향이다. 그렇다고 아버지가 책을 쓰시는 건 아니다. 도전적인 삶을 살아왔기에 남들이 흔히 할 수 없는 경험을 많이 했다고 자부한다. 그런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의 헌신 덕분이다. 그런 아버지는 내게 아낌이 없는 지원을 해주었다.


다만, 나의 경험을 꼭 이야기해달라 하였다. 계약 아닌 계약인 것이다. 대학시절, 오랜만에 집에 오면, 아버지와 술과 함께 이야기를 하며 밤을 새웠다.


그런, 내가 오랜 기간 집에 머물게 되었다. 졸업 이후 승선 전까지 시간이 많이 남았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단둘이 많은 시간을 보내었다. 우리는 단둘이 점심을 먹거나, 카페를 가곤 했다. 아버지에게 나의 경험을 대부분 공유하고 나서야, 우리는 말없이 식사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는 같은 것을 보고 이야기를 나눈다.


그런, 아버지가 어느 날부터, 나에 대해서 버릇처럼 자주 하는 말이 생겼다. "왜 이렇게 헤매냐" 이 '자주 듣는 말'을 곱씹게 되었다. 자각하지 못했지만, 나는 방황하며 헤매고 있었다. 마치, 육지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 지평선에서 표류하는 것과 같은 느낌을 받았다. 정신이 또렷해졌다. 이따금 강가를 찾아 산책하며, 물을 보며 바다를 그리워하는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러한 생각을 정리하다 보니, 이 책이 완성되었다. 그렇게 '바다 사나이, 육지에서 표류기'라는 책이 완성되었다.




이제, 나의 꿈은 ‘작가’이다.


어느 순간부터 누군가 읽어줄 거라는 기대를 안고 글을 쓴다. 너무 재미있다. 나는 책을 특별하다고 느끼고 많은 영향을 받았다. 지금의 나를 만들어준 누군가가 들려주는 경험이 너무나도 소중하기에 책을 다 읽고 나면 작가에게 나만의 편지를 남몰래 마지막 페이지에 쓴다.

(당신의 삶을 제가 기억할게요! 편안히 안식하시길... 시몬 페레스...)


누군가는 나의 경험 듣고, 그렇게 말해주는 날이 오지 않을까? 그런 마음에 좋은 책을 남기고 싶다.


그리고, 내가 나를 잃어버렸을 때, 다시 나를 찾게 해 준 인스타와 같은 길잡이가 될 것을 기대한다. 그때는 이런 감정으로 글을 쓰곤 했지. 므흣함을 느끼며, 승선의 고됨을 삭일 나를 위해서!


오늘도 글을 쓰느라 뜬 눈으로 밤을 새워버렸다. 처음 독서에 재미를 붙였던 그 공간, 그 시간에 한층 여유롭게 내 수명을 줄인다.


너무나 재미있다. 쓰고 싶은 글이 생기면 다시 열렬이 또 다른 밤을 새워야지!




'표류에서 해방'


이제 승선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이제야 집이라 생각되는 내 '공간'을 떠나기가 싫은 마음도 있다. 하지만 동시에, 다시 바다로 돌아갈 생각을 하니 가슴이 뛴다. 오래된 고향으로 돌아가는 기분이다.


이 글을 바다에서 고됨을 삭이는 해기사들에게 바친다. 간절히 육지를 바라지만, 또 바다를 집이라 생각하는 우리에게...


'우리 언젠가는, 다시 만나리'





‘독자에게’


긴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독자가 있기에, 작가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신 같은 독자는, 저에게 정말 큰 원동력이자 자부심이 됩니다. 저의 글쓰기에 약점이 있다면 과감 없이 말씀해 주시면 감사합니다.


초보 작가인 만큼, 표현이 서툴어 매끄럽지 않은 부분이 있을 겁니다. 약점을 수정하면서 발전하고 싶습니다.


또한, 이번 글은 재미를 위해 과장한 부분이 조금 있을 수 있습니다. 너그러운 마음으로 읽으셨으리라 기대하겠습니다..! :>


더 좋은 글로 찾아뵙기를 고대하며, 더 재미있는 이야기를 쓸 수 있도록 많이 느끼고 경험하고 오겠습니다. 감사합니다.


August, 12, 2024 주성하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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