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을 쏘는 전사, 칼을 휘두르는 마법사
어렸을 적에 나는 메이플스토리라는 게임을 즐겨했다. 그 당시 내가 키우던 캐릭터의 직업은 궁수였고, 나름 서버 내에서 1000등 안에 들 정도로 참 열심히 캐릭터를 키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캐릭터는 같은 레벨의 다른 궁수들 보다 약했다. 궁수 같지 않은 궁수였기 때문이다. 다른 궁수들은 궁수에 걸맞은 능력치와 스킬을 개발했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던 것이다.
그 당시 내 캐릭터 얘기를 조금 더 하자면 나는 궁수임에도 불구하고, 마법사와 비슷한 능력치를 가지고 있는 캐릭터였다. 어린 마음에 내 캐릭터가 마법도 좀 쓸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마법사와 똑같이, 마력과 지능에 능력치를 투자했다. 그러다 보니 같은 레벨의 다른 궁수들에 비해 공격력이 현저하게 떨어진 것이다. 궁수들에게는 마력과 지능이 굳이 필요가 없었으니까 말이다. 처음부터 궁수의, 궁수에 의한, 궁수를 위한 육성법으로 키운 궁수들은 본인들의 능력치 포인트와 스킬 포인트를 낭비하지 않았다. 하지만 난 그러질 않았고, 나는 망한 캐릭터, 이른바 망캐였던 것이다.
나는 종종 내 인생을 이런 RPG 게임에 비유해서 생각하곤 한다. 다른 점이 있다면, 게임에서는 몬스터를 잡거나, 퀘스트를 완료하는 것으로 경험치를 쌓아서 레벨업을 하지만, 현실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다는 점이 있다. 매 순간순간이 우리에겐 경험이니까 몬스터를 때려잡지 않아도, 굳이 퀘스트를 완료하지 않아도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레벨업을 했다.
그다음은 게임과 비슷하다. 레벨업을 할 때마다 우리는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예를 들어 이과를 갈지, 문과를 갈지 선택했던 고등학교 때처럼 말이다. 여기서 이과를 고른다면 대학도 이공계로 가게 될 것이고, 문과를 고른다면 인문계로 가게 될 것이다. 이것이 게임에서 레벨업을 하고 능력치 포인트와 스킬 포인트를 얻어 어디에 투자할지 고민하는 모습과 닮아있다. 힘과 체력의 능력치를 키운다면 전사가 될 것이고, 지능과 마력의 능력치를 키운다면 마법사가 되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 인생에도 이런 상황들이 종종 있다. 누군가는 본인의 미래를 남들보다 일찍 계획했고, 그에 걸맞게 능력치와 스킬을 개발한 사람들. 바로 스포츠 선수들이다. 예를 들어 수영 선수들은, 어렸을 때부터 수영선수가 되기 위해서 심지구력에, 어깨 근육에, 기타 등등 수영을 잘하게 만들어 줄 수 것들에게 포인트를 남김없이 투자했을 것이다. 자폐증이라는 특수한 경우 덕분에 다른 것들은 신경 쓰지 않고 오롯이 수영과 관련한 포인트에 투자할 수 있었던 마이클 펠프스는 그래서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수영 선수가 될 수 있었던 것일 테다.
그러고 보면 나라는 사람은, 어렸을 적의 내 메이플스토리 캐릭터처럼 일종의 망캐다. 나는 이과를 선택했음에도 예술계로 진학한 아주 특이한 케이스다. 이공계에 갈 것처럼 능력치와 스킬을 키워놨더니, 갑작스럽게 배우가 되겠다고 생각했다. 또, 배우가 되겠다고 마음먹었으니 그에 걸맞게 능력치와 스킬을 키워 왔는데, 갑작스럽게 무대 디자이너가 되겠다며 그동안 투자했던 능력치와 스킬을 무용지물로 만들었다. 이렇게 내가 하고자 했던 일이 수없이 바뀌는 바람에, 내 능력치와 스킬은 중구난방이었고, 그렇게 난 점점 망캐가 되었다.
그래 좋다 내가 망캐라는 걸 인정하겠다. 하지만 그래도 내가 투자한 능력치가, 내가 개발한 스킬이 분명 남아 있을 텐데, 이것들은 대체 어떤 일과 어울릴까? 나는 전사일까, 마법사일까, 궁수일까?
내 친구는 벌써 전사가 되기로, 그것도 두 손 검을 사용하는 전사가 되기로 마음을 먹고 능력치와 스킬을 그게 걸맞게 개발하기 시작했다. 엄마 친구 아들은 불꽃을 쏘는 마법사가 되기로 마음먹고 벌써 용 모양의 불꽃을 발사하는 마법사가 되었다고 했다. 그런데 나는? 나는 늘 상황에 맞춰 능력치를 키웠고, 스킬 또한 재밌어 보이는 것들 위주로 개발한 사람이다. 그러니 나는 아직도 초보자 마을을 벗어나지 못했나 보다. 여전히 나는 초보자 마을을 어슬렁어슬렁 서성이고 있다. 나는 전사도 아니고, 궁수도 아니고, 마법사도 아닌 어중이떠중이일 뿐이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이건 게임이었을 경우의 이야기이다. 현실은 다르다. 현실엔 정답이 없다. 어떻게 키운 것이 좋은 캐릭터인지, 더 강한 캐릭터로 키우려면 어느 타이밍에 어떤 능력치를 키우고, 어떤 스킬을 개발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공략집 따위는 이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이곳에서의 나는 전사이면서 궁수이기도 하고 마법사이기도 하다.
나는 칼을 휘둘러 파이어볼을 발사하고, 마법으로 화살을 만들어 쏘는 궁수다.
왜? 나는 골고루 찍었으니까.
나는 엄마 친구의 아들처럼 용 모양 불꽃을 발사할 수는 없지만, 나는 아이스볼과 파이어볼 두 가지를 발사할 수 있는 사람이다. 또한 친구처럼 두 손 검을 능숙하게 휘두를 수 있게 능력치를 키우진 않았지만, 장검도, 단검도, 두 손 검도, 창도, 능숙하지 않더라도 다룰 줄은 아는 사람이다. 물론 나의 파이어볼은 남들보다 약할 테고, 여러 검을 다루는 능력도 부족할 테다. 그러나 나는 근접전도, 원거리 전투도, 마법을 주고받는 전투도 가능한 사람이다.
현실 속에선 오히려 망캐라서 특별하다. 그러니 스스로를, 그리고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을 다독이며 말하고 싶다.
"망캐여도 괜찮아"
아니 칼을 휘둘러서 불꽃을 쏜다니까?
이거보다 특별한 게 어딨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