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 데 없는 아이템이라고
버릴 뻔했네"

정맥 동맥과 모세혈관

by 한성호

돌이켜보니 참 다이내믹한 삶이었다.


나는 로케이션 매니저 일을 그만둔 지 만 4개월이 되었다. 이 4개월이라는 시간 동안에, 아직까지 '글'에 머물러 있는 나의 여행기를 '원고'로 바꾸기 위해 다시 열심히 손보고 있다. 그 외에 다른 다이내믹한 일은 아직 펼쳐지지 않았다. 아, 그렇다고 로케이션 매니저가 나의 마지막 돈벌이는 아니다. 나는 지금 친구가 매니저로 일하고 있는 중식 레스토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오전 10시에 출근해서 오후 3시가 되면 끝나는 일. 요즘 같은 시대에 아주 찾기 어려운 황금 같은 시간대의 아르바이트 자리리를 친구 덕분에 얻어 아주 꾸준히 하고 있다. 그리오 오후 3시 이후로 남은 시간에 이렇게 글을 쓴다던가, 영상을 편집한다던가 하는 삶을 살고 있다.


이 삶은 한편으론 안정적이면서, 다른 한편으로 아주 불안정한 삶이다.

적은 돈이지만 생활하는 데에 큰 지장이 없을 만큼 벌면서, 하고 싶은 일인 글쓰기를 하고 있다는 것. 이렇게 생각한다면 아주 안정적인 삶이다. 그러나 전문성이라곤 키울 게 없는, 음식을 서빙하는 일을 하면서 적은 급여를 받고, 돈도 되지 않는 글쓰기를 삶의 주된 일로 생각하며 사는 것. 이렇게 생각하면 아주 불안정한 삶이 된다.

불행하게도 나는 후자에 마음이 많이 기울어 있다. 멀쩡한 직장을 다니고 있는 내 또래의 친구들보다 적은 급여를 받는다는 것이 만족스럽지 않고, 그렇다고 글을 쓰는 행위가 그 모든 걸 다 뛰어넘을 만큼 내가 좋아하는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글쎄, 만약 내가 글을 쓰는 걸로 돈벌이를 하고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아직은 그저 취미에 준하는 수준이니까 뭐.


그래서 나는 지금 인생의 갈림길에 서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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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사방으로 수평선이 펼쳐져있는 바다 한가운데에 부표를 안고 떠 있는 기분이다. 어느 쪽으로 헤엄쳐야 육지가 나오는지, 아니 육지까지는 아니더라도, 나무 널빤지라도 나오는 쪽으로라도 가고 싶은데 도무지 방향을 잡을 수가 없다. 이렇게 바다 한가운데에서 낙오될까 봐 나는 지금 굉장히 두려운 상황이다.

이럴 때면 나는 내가 지금까지 살면서 체득한 기술이 어떤 것들이 있나 되짚어보는 시간을 가진다. 혹시나 지금 현재의 상황을 타개할 좋은 무기가 내 안에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번엔 상황이 좀 다르다. 이제는 이 상황을 타개할 만한 마땅한 기술이 없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가구제작 과정을 막 마쳤을 때는, 톱질이나 컴퓨터 프로그램에 어느 정도 능숙했지만 지금은 그럴만한 게 없다. 배우를 막 그만 뒀을땐, '다시 연기를 해도, 하면 하겠다'싶은 마음이 들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 시간이 너무 많이 흘렀다. 여태까지의 나는 잔기술이 진정한 기술이 되는, 그 물리적인 시간을 버티지 못하고 전부 도망쳤기에 이런 결과를 낳았나 보다. 돈벌이로 삼을만한 기술이 없다는 게 이렇게나 사람을 불안하게 만드는 것이구나. 이 생각이 요새 들어 자꾸만 나를 집어삼킨다.

어렸을 적부터 어머니가 하시던 미용일을 배워뒀더라면, 지금 내 삶이 조금 다를까? 대학 내내 연마했던 연기술로, 연극을 계속해서 했더라면 지금 내 삶이 조금 다를까? 요리를 배우면? 바리스타 자격증을 따면? 그래, 코딩이 대세니까 코딩을 배운다면? 아니지, 이제부터라도 공무원 준비를 해볼까? 글쎄, 이제는 잘 모르겠다 여태껏처럼과 마찬가지로 나만의 3,6,9 법칙에 따라서 무슨 일을 하더라도 3개월 만에 권태를 느끼고, 6개월 만에 그만두기를 결심하고, 9개월 혹은 12개월 차에 그 일을 두게 될 것만 같다. 나는 그런 사람이니까. 도무지 꾸준하게 일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니까.


그런데 문득 내게 돈벌이를 할만한 굵직한 기술은 없더라도, 그동안 쌓아둔 잔기술들은 잔뜩 있다는 걸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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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기술은 모세혈관들과 같다. 동맥 정맥처럼 굵직 하진 않지만 여기저기 피를 흘려보낼 수 있다는 점은, 그러니까 밥벌이를 할 수 있다는 점은 똑같다. 물론 한 번의 펌핑으로 수 리터의 피를 움직여대는 동맥과 정맥이 훨씬 멋있어 보일 수 있겠다. 그러나 오히려 모세혈관들은 너무 굵직한 탓에 동맥과 정맥이 닿지 않는 손 끝, 발 끝까지 존재하며 세포들이 살아 숨 쉴 수 있게 피를 운반한다. 너무 얇아서 쉽게 터져버리고 쓸모 없어지는 경우도 다분히 발생하지만 금세 다시 회복하여, 다른 모세혈관들과 함께 피를 흘려보낸다. 밥벌이를 한다.

이처럼 나는 많은 경험들을 하면서 잔기술들을 체득 해왔다. 글쎄 이 잔기술들의 응집체인 내가 도대체 무슨 일을 하게 될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걸로도 충분히 밥벌이가 가능할 것이라는 점은 믿어 의심치 않는다.


사람들마다 어느 정도 어울리는 일을 한다고 생각한다. 그 사람만이 가진 선천적인 아이덴티티에 따라 직업을 갖게 된다는 이야기다. 그 사람의 정체성에 따라 꿈이 결정되고, 직업이 결정된다. 본인 스스로는 아니라고 부정하더라도, 선천적인 정체성과 본인이 하고 있는 일이 잘 맞지 않는다면 오래 일하지 못하는 걸 이 말은 꽤 맞는 말이다. 당연히 일에 재미도 느낄 수 없기 때문에 그런 일은 쉽게 그만두게 될 것이고, 결국에는 모든 사람들이 어느 정도 본인의 정체성과 잘 맞아떨어지는 일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의 아이덴티티는 도대체 무엇일까? 나도 선천적으로 어떠한 아이덴티티를 분명 가지고 있을 텐데 그게 도대체 뭘까? 어떤 아이덴티티이길래 아직까지도 나에게 꼭 맞는 일을 찾지 못해 여전히 방황하고 있는 것일까?


'Dolce Stil Novo'


내 몸에 새긴 두 번째 타투다. 이 문장은 이탈리아어로 '달콤한 새로운 스타일'을 뜻하며, 이탈리아 문학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표어이다. 그 당시에 예술을 하는 사람들에게, 늘 달콤한 새로운 스타일을 쫓을 수 있게 힘을 실어주어,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시대를 열어준 말이다. 나도 이 타투를 새기며 내 인생의 르네상스를 시대를 열고자 했다. 늘 달콤하고 새로운 스타일을 추구하며 더 다이내믹한 인생을 살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러니 어쩌면 늘 새로운 것을 쫓는 것, 이 자체가 나의 아이덴티티가 이날까 하는 생각이 스친다.

그래, 새로운 일을 찾고, 그 일에 늘 빠르게 적응하는 거, 그거 내가 잘하는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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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 생각은 조금 위험하다. 자위일 수도 있고, 자기 합리화 일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래 맞는 말이다. 이것은 제대로 된 기술을 갖지 못한 사람의 자위이면서, 동시에 제대로 된 기술을 갖지 못해서 자꾸만 멀리 돌아가는 사람의 자기 합리화다.

그런데 방금 자위, 자기 합리화라는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인 사람 중에, 나처럼 일을 잘해서 퇴근 시간이 앞당겨지는 바람에 적은 일당을 받아본 적 있는 사람이 있을까? 3개월 후에 정직원으로 전환되는 걸 1달로 앞당겨 본 사람이 있을까? 입사한 지 6개월 만에 팀장이라는 직급을 달아본 적 있는 사람이 있을까?


거 봐 나 잘한다니까?

자신감 좀 갖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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