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순례길, 까미노 데 산티아고 / Day 0 / 0km
앞으로 내가 걷는 길에 이름이 필요하겠다.
이 길은 여러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산티아고 순례길’, ‘스페인 순례자의 길’, ‘까미노 데 콤포스텔라’ 등 비슷하긴 하지만 이 길을 일컫는 말이 정말 많다. 글쎄, 나는 종교적인 의미를 가지고 이 길에 오지는 않았으니 순례자의 길, 순례길이라는 표현이 조금 과분하고 죄송스러운 기분이 든다. 행색은 순례자의 행색일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그저 이 길을 ‘걷고 싶어서’ 이곳에 왔다. 이 길을 전부 완주하고 나면, 정신적인 무언가를 얻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과 함께 말이다. 그래, 그런 의미라면 순례길이라는 표현이 또 맞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이 길이 이렇게나 여러 이름으로 불리고 있나 보다.
앞으로 나는 이 길을 그냥 까미노라고 부르기로 하였다. 까미노는 스페인어로 길이라는 뜻이다. 평범한 길에, <길>이라는 이름을 붙인다고 생각하니 뭔가 묘한 기분이 든다. 글쎄, 이 <길>의 끝에 서있는 나는 도대체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스페인에 이런 길이 있다네? 너 한 번 가보면 인생에 도움이 되겠다.’
까미노를 처음 알게 된 건 아버지를 통해서다.
그 당시의 나는 고등학생이었는데, 고작 길을 걷는 것 따위가 내 인생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이 길이 나를 부르는 소리를 나는 느꼈다. 글쎄, 언제부터 이 길이 나를 부른 것일까?
돌이켜 생각해보면, 내 인생의 방황이 시작된 때부터, 그러니까 대학교를 졸업하고 난 이후부터 이 길이 나를 부르기 시작한 것 같다. 뭔가 이렇게나 큰 도전을 하고 나면, 나의 방황을 끝내줄 인생의 이정표가 갑자기 생겨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나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부름에 곧장 응하지는 못하였다. 한 달이라는 시간을 내기가 참 겁이 났고, 그 당시의 난 혼자라는 것에 익숙한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인생을 그저 ‘살아내고’ 있을 무렵 갑작스럽게 세계 여행을 시작했다. 더 이상 인생을 ‘살아내는 것’이 아닌, ‘살아가는 것’으로 바꾸기 위해서 아주 긴 여행을 계획한 것이다. 그리고 그 끝에는 까미노가 계획 되어 있었다. 아니, 어떻게보면 까미노를 위한 긴 여정을 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지금 나는 나의 세계 여행의 끝의 시작에 서있다.
나는 계획대로 장기여행을 떠났고, 그 여행은 일단락 되었으며, 까미노를 시작하려 하고 있다.
나는 과연 지난 시간을 통해서 나의 인생을 살아내야 하는 존재에서, 살아가야 하는 존재로, 제대로, 잘, 바꿨을까?
변화를 얻고, 그 변화가 어떤 길로 가야 하는지 알려 줄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삶의 이정표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아서 이 여행을 시작했다. 물론 이것이 막연한 기대라는 것을 잘 안다. 실제로 나는 어떠한 변화를 얻고 싶은지, 구체적으로 생각한 것이 없었다. “웃음이 많아졌다.”,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행복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같이 기대하고 있는 것 또한 없다. 나는 그저 단순히, 막연하게 ‘무언가 변하겠지’라는 생각만을 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어떠한 변화가 필요한 타이밍인 것만큼은 확실하다. 근 1년간 나는 직업도 잃었고, 집도 잃었고, 연인도 잃었고 다 잃었다. 내가 자초한 잃음이었을 테지만,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기분이 드는 이 타이밍에, 지난 세계여행을 통해, 그리고 그 세계여행의 종착지인 까미노를 통해, 새로운 시작을 여는 것이 딱 좋은 타이밍이겠다.
오늘부터 1일로 세면 좋을까, 아니면 오늘은 걷지를 않았으니 0일로 치는 것이 좋을까.
아무튼, 오늘은 순례자 길 첫날이고, 걸은 거리는 0km이다.
Bayonne(바욘)에서 짧은 휴식을 취하고 Saint-Jean-Pied-de-Port(생장 피에드포르(생장))으로 넘어왔다. 바욘에서 부터 기차를 타고 생장으로 넘어오는 그시간은 참 기분이 묘했다. 긴장과 설렘, 그 감정들 속에서 좌불안석이었다. 수 없이 많은 기차에 앉아 봤으나, 이만큼이나 기차의 좌석이 불편했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결국엔 다 같은 여행일 테지만, 시작이라는 것이, 또 도전이라는 것이 기분을 묘하게 만들었다.
겨울철의 이곳은 나름 비수기라 문을 닫은 알베르게도 많고 순례자들도 많지 않다고 한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스페인 사람이거나, 혹은 한국사람(미디어의 영향이 이렇게나 무섭다.)이라던데, 생장으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실은 한국인은, 기차 안에서 우연히 만난 성준이와 욱희 우리 셋이 전부였다.
처음엔 그들에게 말을 거는 것이 한편으론 껄끄러웠다. 혼자서 이 길을 견뎌내고, 오롯이 혼자만의 깨달음을. 얻고 싶다는 욕심 때문에, 어느 누구와도 교류하지 않을 계획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성준이의 너스레에 홀랑 넘어가버리고 말았다. 나는 그저 ‘생장에 도착하면 순례자 여권(크레덴샬)을 발급해주는 사무소부터 가실 건가요?’하고 물었을 뿐인데, 일본인인 줄 알고 무서워서 말을 붙이지 못했다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금세 마음의 벽이 허물어졌다. 이렇게 우연히 만나게 된 성준이와 욱희. 그들과 초반의 일정을 함께 하게 될 것 같다.
생장의 모습은 굉장히 만족스럽고 앞으로의 날을 설레게 만들었다. 지난번 루마니아의 ‘Sinaia(시나이아)’처럼, 생장은 내가 생각하는 유럽의 시골 풍경을 하고 있었다. 자연과 어우러진 한적함. 그리고 따뜻한 햇살과 자그맣게 마을을 가로지르는 천까지, 내가 머릿속으로 상상하는 모습과 비슷했다. 게다가 밤 중에 잠깐 숙소 밖을 나갔을 때 마주한 수 많은 별들도 너무 아름다웠다. 앞으로 이런 풍경을 가진 마을들을 계속해서 방문하게 될 테다. 그러니 나의 앞날에 설렐 수밖에 없겠다.
그런데 시작하자마자 문제가 생겼다. 나의 짐은 까미노를 위해 최적화 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성준이의 가방과 욱희의 가방은 까미노를 걸으며 필요한 물건들로만 가득했지만, 나의 가방은 지난 10개월간의 떠돌이 생활동안 나를 버티게 해 준 짐들로 가득했다. 안 쓰는 물건들은 한 가방에 모아 산티아고로 미리 보내 놓을 생각으로 짐을 정리하긴 했지만, 하필이면 오늘이 주말이라 생장에 있는 우체국이 문을 열지 않은 것이다.
하는 수 없이 앞뒤로 가방을 메고, 몽땅 짊어진 채 시작해야 하나 싶었는데, 마침 다음 마을까지 짐을 옮겨주는 '동키 서비스'가 생각났다. 어떻게하면 이용을 할 수 있는지 알베르게 주인분께 여쭸더니, 정말 친절하게도 본인이 내일 론세스바예스에 볼일이 있어서 본인의 차로 나의 짐을 옮겨주신다고 했다. (영어가 통하지 않았지만 그런 뜻인 것 같았다.) 왠지모르게 걱정이 들긴 했지만 그래도 한시름 놓았다. 그런데 오늘은 토요일, 그러면 내일은 일요일, 그러니까, 주말인데... 다음 마을에 우체국이 문을 열까...? 아, 그전에 우체국이 있긴 있으려나...? 정말 나, 이걸 다 짊어지고 걸어야 하나...?
생장에 있는 순례자 사무소에서 가방의 무게를 측정해 볼 수 있었다. 산티아고로 먼저 보낼 짐이 10kg, 그리고 까미노를 함께 하게 될 가방이 15kg으로 총 25kg이었다.
이곳 까미노에는 이런 짐의 무게와 관련한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었다. 몸무게의 10분의 1이 가방의 무게로 적당하다는 현실적인 이야기에서부터 ‘까미노의 가방 무게가 인생의 짐이다.’ 같은 철학적인 이야기도 있었다. 재밌게도, 어제 나는 분명 짐을 싸면서 ‘너무 가볍다.’, ‘나의 인생의 무게는 가볍구나’, ‘욕심 없이 여행하는구나’하며 자랑스럽게 생각했는데, 처음으로 가방의 무게를 재고, 나의 짐이 수치화되니까 15kg 숫자가 참 무겁게 느껴졌다. 분명 가벼운 가방이었는데, 저울에 올라가서 내게 15kg이라는 숫자를 보여주고 나더니 전과 다르게 무거워졌다.
그리고 그걸 매고 있는 나의 마음의 무게 또한 무거워진 것이 느껴진다. 나는 짐을 더 줄일 수 없다. 내게 짐을 줄이는 방법이라곤 버리는 것뿐이다. (실제로 첫 번째 알베르게엔, 순례자들이 놓고 간 버리는 물건들이 많다.) 하지만 나는 까미노 이후에도 여행을 이어가려는 사람이다. 그런 내가 까미노에 맞춰서 나의 짐을 버리기에는 위험부담이 너무 크다. 그렇다면 나는 어쩔 수 없이 남들보다 훨씬 많은 무게로 까미노를 걸어야 한다. 그런데 이런 와중에 ‘까미노 가방의 무게가 인생의 짐이다.’라는 말을 들으니, ‘여전히 내가 욕심이 많은가’하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내 인생의 무게가 이렇게나 무거웠나?
포기하지 못하는 것들이 이렇게나 많았나?
분명 잃을 게 없다는 생각으로 시작한 여행인데, 고작 10개월 만에 지키고 싶은 것들이 많이 늘었나 보다.
버리지 못하고, 포기하지 못하는 것들이 벌써 많이 늘었나 보다.
‘업보다’
우선 버리지 않고 전부 안고 가기로 한다.
그러니 이 까미노를 통해서 다시금 비워내는 시간을 가질 수 있기를 한편으로 바라 볼뿐이다.
인생의 짐을 많이 덜어 내며 스스로의 변화를 만드는 까미노가 되기를!
Buen Camino, HanSol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