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새로운 일을 주신면 어떡해요?"
오대리에게 일을 하나 맡겼는데 반발이 심하다.
“부장님, 갑자기 이렇게 새로운 업무를 주시면 제가 일정이 다 꼬여요.”
“야, 이것도 다 니 일의 연장이야. 큰 틀에서 보면 다 니 일이라고.”
“근데 제 일정도 있는데, 최소한 미리 얘기는 해주셔야죠.”
“야, 오대리, 회사 일이 다 그렇지. 회사 일이 맨날 계획 대로 되는게 어디있노, 너는 다 알만한 연차에 그러냐.”
“그건 아는데요, 이러면 제 업무의 우선순위가 완전히 엉키잖아요.”
“야, 그래도 니가 제일 잘 하니까 내가 니한테 맡기잖아.”
“그건 감사한데요, 그래도 조율은 좀 해주셔야죠.”
나 때는 이렇게 구구절절 변명하는 상사도 없었다. ‘내니까 이 정도 설명이라도 해주지, 쟤는 그걸 모르네’
짜증이 확 밀려오는 게, 독한 술이 필요하다. 시계를 보니 퇴근 시간이 훨씬 지났다. 회사를 나선 주부장의 발걸음은 신라시대 화랑의 말이 스스로 유곽을 찾아갔다는 일화처럼 자연스럽게 무교동의 단골 바(Bar)로 향했다.
“아이고, 주박사님~” 언제나 그렇듯, 어제도 봤지만 몇 년 만에 처음 보는 사람처럼 바 사장님이 맞아 주신다. 주부장은 단골들이 그렇듯 선반에서 본인 이름이 적힌 킵(보관)해 둔 위스키를 꺼내 온다. 쥐포와 마른안주가 세팅되고, 주부장은 늘 그렇듯, 소주나 소맥처럼 쭉~ 위스키 잔을 비운다. 좋아하는 노래가 흘러 나온다.
‘내가 명색이 인사조직 박산데, 다 지 잘되라고 그러는 거지.’
MZ의 입장에서 이 갈등의 원인은 여러 가지이다. 첫째는 ‘통제감 상실’이다. MZ는 ‘내 일정은 내가 관리’하는 자율성을 매우 중요시하는데, 부장의 업무 지시가 그걸 깼다. 둘째는 ‘예측 가능성의 부재’다. 갑작스러운 업무는 준비 되지 않은 ‘스트레스’다. 셋째는 ‘역할 경계의 애매함’이다. 갑작스러운 업무가 주어지면 ‘이게 내 업무인가?’라는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하지만 주부장이 ‘욱’ 했던 부분은 따로 있다. 넓게 보면 다 오대리의 일인데, 지금 진행중인 일만 자기 일로 생각하고 새로운 일은 ‘내 일이 아니다’고 생각하는 ‘업무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이다.
과연 이것이 오대리의 잘못인가?
독한 술에 취하기 전에 시간이 없으니 빨리 결론부터 얘기하면, MZ의 업무 태도가 잘못된 게 아니라, 역할이 명확히 정의되지 않은 구조적인 문제다. 즉, 주부장의 잘못이다.
우리나라 대기업은 업무를 너무 쪼개어준다.
예를 들면, ‘곰인형 눈알 부착1팀’에서는 곰인형의 왼쪽 눈알을 붙인다. ‘부착2팀’에서는 오른쪽 눈알을 붙인다. 1팀, 2팀은 누가 눈알을 더 효율적으로 붙이는지 경쟁한다. 교육 훈련에도 매진한다. 팀원들을 곰인형 눈알 붙이기 전문가로 길러 낸다. 다른 팀에 팀원을 뺏기지 않으려고 애쓰고, 눈알 붙이는 실력을 인정받아 승진을 시키려 애쓴다. 가끔 혁신도 일어난다. 왼쪽 눈알을 반시계 방향으로 15도 틀어서 붙이면 ‘슬픈 표정’을 묘사할 수 있다. 이 사실을 발견한 1팀원들은 모두 흥분했다. 1팀원들은 ‘눈알 15도 틀어 붙이기’의 해외 유사 사례를 검색한다. 임원의 승인을 받으려면 해외 유사 사례와 벤치마킹 가능한 성공 사례가 있어야 한다. 물론 유사 사례는 없다. ‘와! 우리가 세계 최초다!’ 팀원들은 불안해하면서도 또 최초라는 생각에 흥분한다. 임원 보고를 하고 승인을 받았다. 하지만 부착2팀에서 협조를 안해준다. 2팀은 기존 대로 눈알을 붙이겠단다. 부착1팀 팀장이 열 받았다. ‘야! 그냥 우리는 승인 받은대로 해! 상무님한테 혼나면 걔네들도 따라오겠지.’ 결국 왼쪽 눈알만 15도 틀어진 곰인형이 만들어 진다.
이 얘기가 황당해 보이겠지만, 우리나라 대기업의 현실이 정확히 이렇다. 팀의 역할이 ‘곰인형 왼쪽 눈알 붙이기’로 정의되면, 팀원 눈에는 곰인형 눈알밖에 보이지 않는다. 아무리 시각을 넓게 가지고 효율성을 높이려 해봐도 그냥 눈알만 보인다.
그런데 인형 영업본부 전체로 보면, 곰인형 시장은 줄고 바비 인형 시장이 커질 수도 있다. 하지만 부착1팀은 그걸 모른다. 알더라도 ‘내 알 바 아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인형 시장 분석’은 다른 팀 업무이기 때문이다. 괜히 아는 척하면 안 되고, 심지어 분석 결과를 가져다 써도 안 된다. 분석 결과가 활용되었다고 그쪽 팀장이 칭찬 들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우리 팀장의 승진에 방해된다.
어쨌든 이 궁상도 인형 시장 안에서 얘기다. 더 넓은 관점에서 보면, 인형 시장의 경쟁 시장은 어디인가? 예를 들면, ‘레고’는 게임, 스트리밍 서비스, 유소년 스포츠 등 아이들이 놀고 시간을 보내는 모든 시장을 경쟁 시장으로 여긴다. 이 정도 시각은 곰인형의 경쟁 제품을 바비 인형으로 보는 시각도 우스워 보이게 만든다. 하물며 눈알 각도로 싸우는 부착1팀과 2팀의 경쟁은 얼마나 하찮은가.
이런 좁은 관점이 기업을 망하게 한다. 코닥(Kodak)과 후지필름(Fujifilm)의 사례는 정말 많이 인용되는 사례이다. 코닥은 20세기 대부분 카메라 필름 시장을 지배했다. 한때 미국 시장의 80% 이상을 장악하기도 했다. 하지만 디지털 전환 앞에서 무너졌다. 사실 코닥은 1970년대에 이미 세계 최초의 디지털 카메라를 발명했지만, 기존 필름 사업을 해칠까 봐 상용화하지 않았다. 그 후로도 필름/인화지 판매에만 집착하다가 결국 파산하고 말았다. 하지만 후지필름은 디지털 전환에 빠르게 적응했다. 디지털 인화 서비스에 적극적으로 투자하고 LCD 패널용 필름, 의료 영상 장비까지 사업을 다각화했다. 코닥이 파산할 때, 후지필름은 오히려 신사업 매출 비중을 높이며 성장을 계속하고 있었다.
만약 코닥의 팀원들이 ‘카메라 필름 판매’가 아닌 더 넓은 미션을 가졌다면 어떠했을까? 예를 들면 ‘형상의 시각화’, 혹은 ‘기억의 보존’과 같은 미션을 가졌다면 어땠을까? 아마 사람들의 기억과 순간을 시각적으로 남기고, 공유하고, 보존하는 다양한 디지털 방식의 개발도 코닥 팀원들의 역할이 되었을 것이다.
많은 부장들이 오해하고 있는 개념 중 하나가 역할 명확화(Role Clarity)이다. 부장들은 역할을 명확하게 하기 위해서 ‘더 잘게 쪼개어야 한다’고 착각한다. 그런데 역할(Role)을 잘게 쪼개다 보면 ‘왼쪽 눈알만 붙여라’는 ‘과업(Task)’에 도달한다.
하지만 역할은 과업과 다른 것이다. 역할은 지속적이며, 정체성과 연결된다. 반면 과업은 단기적이고 구체적이다. 역할은 사람과 집단의 지위, 책임, 기대되는 행동 범위이다. 반면 과업은 특정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그 목표가 역할로 정의된 ‘기대 행동 범위의 충족’일 수도 있다), 수행해야 할 구체적인 활동이나 일거리를 뜻한다. 예를 들면, ‘회의 일정 조율’, ‘데이터 분석 보고서 작성’ 같은 것이다.
역할과 과업의 차이는 전략과 전술의 차이와 같다. 그런데 우리 부장들은 팀의 역할을 부여할 때, 과업을 혼재해서 쓰는 실수를 한다. 더 큰 문제는 아예 과업 중심으로만 역할을 정의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기획팀의 역할을 ‘프로젝트 진도 관리’, ‘신규 프로젝트 기획’, ‘임원 보고 지원’ 이렇게 정의하는 식이다. 여기 어디에도 ‘역할’은 없다. 그렇다 보니 예를 들어 ‘외부 기관의 협력 요청’이 오면, 기획팀원들은 ‘우리 일이 아니다’고 생각한다. 이런 일은 ‘갑자기 떨어진 새로운 일’이 된다.
역할 명확화는 ‘역할을 잘게 쪼개라’는 의미가 아니다. 본래 의미는 ‘팀이나 구성원이 맡은 역할과 책임을 명확히 정의 하고, 기대되는 업무의 범위를 분명히 하는 것’이다. 역할을 넓게 줄 수도 있고, 좁게 줄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의미를 오해해서 ‘역할을 더 좁게 줘야 더 명확해진다’고 착각한다.
주부장이 오대리에게 ‘큰 틀에서 보면 다 너의 일이다’라고 말한 이유는 기대하는 역할 범위가 넓기 때문이다. 반면, 오대리는 ‘갑자기 떨어진 새로운 일’이라고 인식한다. 애초에 부여받은 역할 범위가 좁은 것이다. 이런 상황은 거의 대부분 부장이 ‘과업을 마치 역할인 것처럼’ 잘못 부여한 결과이다.
그래서 이 갈등이 오대리의 잘못이 아니라고 말한 것이다. 애초에 역할을 명확하게 정의하지 않은 주부장의 잘못이다. 하지만 많은 부장이, 정작 본인이 역할 정의를 명확하게 하지 않았으면서 MZ 직원을 탓한다. MZ가 자기 일이면서도 ‘새로운 일’이라는 핑계로 일을 거부한다고 오해한다.
바의 문이 획 열리며 찬바람이 훅 들어오고, 종로 거리의 색소폰 악사님이 들어온다. 눈을 마주쳐선 안 되었는데, 순간 찬바람이 드는 곳을 쳐다보다가 악사님과 눈이 맞았다. 이런, 먹잇감을 발견한 악사님은 눈매에 미소를 머금고 몇 걸음 되지 않는 바의 복도에서 천천히 스텝을 밟으며 색소폰으로 ‘What a wonderful world’를 연주한다. 주부장에게 다가온다.
‘아니, 오지 마, 제발, 나는 최백호 노래 들으러 왔는데.’
하지만 이미 늦었다.
악사님은 한 곡을 다 연주하고, 테이블 옆에 서서 ‘씁~’ 목마른 티를 낸다.
‘악사님한테 술 권하면 안되는데.’
하지만 옆 테이블에 앉은 연세 지긋한 형님들이 술 한잔을 권한다. 악사님이 잔을 받으며 그 테이블에 앉는다. 서로 몇 학년 몇 반인지 인구통계 조사가 시작된다. 이러면 길어진다.
‘아니, 나는 최백호 노래 마저 들어야 하는데.’
하지만 한두 잔 술잔이 오가고, 어느 순간, 주부장도, 그 형님들도, 악사님도 모두 하나 되어 이 술, 저 술, 다 나눠 마시고 있다. 안절부절못하는 건 오직 바 사장님이다.
“사장님(악사님도 자영업 사장님이다), 최백호의 ‘부산에 가면’ 연주해 주이소” 주부장이 청한다.
“이~? 최백호가 부산에 갔다고? 언제 또 거길 갔디야~”
“최백호 하면 ‘낭만에 대하여’지!” 옆 테이블 형님 말이다.같은 테이블 형님이 좋다고 손뼉을 친다. 누군가는 지갑을 열고, 배춧잎이 보이고, ‘낭만에 대하여’ 연주가 시작된다.
뭐, ‘낭만에 대하여’를 들으면 어떻고, 또 ‘부산에 가면’을 들으면 어떤가. 주부장의 미션이 ‘부산에 가면’을 듣는거라면, 꼭 그 노래를 들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 미션이 ‘음악에 취해, 술에 취해 시름을 잊는 거’라면 뭔 노래를 듣던 무슨 상관인가. 오히려 스피커에서 나오는 음악이 아닌 ‘생음악’을 듣는 것이니, 더 음악에 취하기 좋은 것이다.
역할 명확화의 핵심은, 역할을 ‘미션’ 중심으로 다시 정의 하는 것이다. 팀의 역할 정의가 ‘미션’이 아닌 ‘과업’으로 정의되어 있으면, 과업 목록에 없는 일이 들어오면, 새로운 일, 혹은 남의 일로 인식하게 된다. 하지만 과업보다 더 넓은 미션을 장착하고 있으면, 새로운 일이 들어와도 과업의 우선순위만 변경하면 된다. 예측 가능성과 통제력이 확 높아진다.
결국, 갑작스러운 업무가 문제라기보다 역할을 과업으로만 정의해 온 리더십이 문제일 수 있다. MZ에게 필요한 것은 ‘네 역할의 본질은 이것’이라는 명확한 역할 정의이다.
그런데 이 과정은 쉽게 되는 게 아니다. 지금껏 좁게 역할 정의를 해왔는데, 갑자기 역할을 확 넓히면 오히려 반발을 살 수 있다. 그래서 5단계의 설득 전략이 필요하다.
첫 번째 단계는 ‘MZ가 느끼는 불합리함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 단계를 건너뛰면, 이후의 설득이 먹히지 않는다. 이 단계에서 부장이 해선 안 될 말은 ‘회사 일이 원래 그렇잖아’, ‘다들 그렇게 일하잖아’ 이런 표현이다. 대신 ‘네 입장에서는 갑자기 역할이 늘어난 것처럼 느껴질 수 있어’, ‘계획을 세운 게 있는데, 중간에 끼어들면 당황할 수 있지’ 이런 표현이 필요하다. 부장더러 MZ의 생각에 동의하라는 게 아니다. MZ의 당황스러움을 이해하고 있음을 표시하라는 의미이다. 그래야 MZ는 ‘부장이 내 상황을 제대로 인식하고 있다’고 안심하게 되고, 이제야 다음 단계로 넘어갈 준비가 된다.
두 번째 단계는 역할을 ‘과업’이 아니라 ‘미션 문장’으로 다시 정의해 준다. 이때 피해야 할 표현은 ‘이건 마케팅팀 일이잖아’와 같은 모호한 표현이다. 아마도 지금까지 팀원의 역할 정의는 ‘캠페인 운영 담당자’와 같이 과업 중심으로 되어 있었을 것이다. 이것을 ‘너는 우리 팀의 캠페인이 왜 성공했는지 설명할 수 있게 만드는 사람’과 같은 미션 문장으로 바꿔서 설명해줘야 한다. 직무명, 담당업무가 아니라 미션, 즉 ‘책임의 결과’로 역할을 정리해 준다.
세 번째 단계는 ‘왜 하필 너인가’를 명확히 설명해야 한다. ‘네가 제일 잘하니까’와 같은 표현은 얼핏 칭찬 같아 보여도, 역할 정의가 명확하지 않은 상황에서는 ‘벌’처럼 들릴 수도 있다. 좀 더 설득력이 있는 설명은 ‘이 보고서는 캠페인의 맥락을 알아야 정확하게 쓸 수 있어. 운영과정과 결과 자료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너야. 이걸 네가 하면, 단순한 보고서가 아니라 시사점이 담긴 해설서가 나올거야’와 같은 표현이다. 담당자를 ‘대체 가능 인력’이 아닌, 미션 수행의 핵심 선수로 인식을 전환시켜 줘야 한다.
네 번째는 ‘추가’가 아니라 ‘교체’라는 걸 분명히 해야 한다. MZ가 가장 싫어하는 구조는 기존 일에 새로운 일이 덧붙는 것이다. 그래서 부장이 반드시 해줘야 하는 말은 ‘이건 일을 늘리는 게 아니라, 네 미션을 수행하는 방식을 변경하는 거야’와 같은 말이다. 혹은 ‘이게 들어오면, 네가 하던 운영 업무 중 하나는 우선순위에서 같이 제외해보자’ 같은 표현을 쓰자. 이 단계의 본질은 MZ 스스로 ‘내가 선택하고 조정할 수 있다’는 통제감과 예측가능성의 회복이다.
다섯 번째 단계는 ‘이 일이 지금 너에게 어떤 의미가 있나’ 설명해주는 것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경력과 연관된 설득이 필요하다. ‘회사에 도움이 돼’와 같은 추상적인 설득은 아무 쓸데없다. 개인화된 설득을 해야 한다. 예를 들면, ‘운영만 한 사람보다, 성과를 설명할 수 있는 경험을 해 본 사람이 더 가치가 올라가’ 혹은 ‘이건 네 포트폴리오에 남는 일이야’와 같은 표현이다. 이 단계의 역할은 당장 일을 떠안는 ‘단기적 수용’을 경력과 연관된 ‘중장기 몰입’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이 다섯 단계의 역할 명확화 과정을 한 문장으로 요약해 보면, ‘이건 네 일이야’가 아니라, ‘이게 네가 맡고 있는 미션이고, 그래서 지금 이 방식이 필요한 거야’라고 설명하는 것이다.
부장이 반드시 기억해야 할 핵심 원칙은 다음과 같다.
첫째, 역할 명확화는 쪼개기가 아니라 ‘확장’이다.
둘째, 역할 재정의는 명령이 아니라 ‘인식 전환’이다.
셋째, 과업 정의보다 먼저 ‘미션 문장’을 말해야 한다.
바 사장님이 칡즙이 담긴 유리잔을 테이블 위에 조용히 올려두고 가신다. 위스키 잔이나 칡즙 잔이나 유리잔 모양이 똑같다 보니 주부장은 칡즙을 위스키인 줄 알고 쭉~ 마신다.
술맛이 싹 달아난다.
“아이(아니) 사장님! 술 잘묵고(잘 마시고) 있는데, 이런 거 갑자기 주믄(주면) 어짭니까(어떡합니까?).”
바 사장님은 그저 웃는다.
술집 사장의 역할을 ‘술을 많이 팔아 남기는 것’으로 정의하면 손님이 고주망태가 되어 자빠져 자더라도 신경 쓸 필요 없다. 하지만 사장의 역할을 ‘손님이 즐겁게 술을 마시는 것’으로 정의하면 더 취하기 전에 칡즙을 먹여 집에 보내는 것도 술집 사장의 역할이다. 그래야 즐거운 술자리의 기억이 영원히 남는다. 술집 사장의 역할 정의에 따라 고객 경험이 달라진다.
오늘은 여기까지다. 무교동 거리로 나선다.
2호선 을지로입구역에 가려는 사람들이 부지런히 무교동 먹자골목을 관통한다. 시계를 보니, 지금 시간에 을지로입구역에 가면 죄다 외선 순환선만 타게 될 것 같다. 죽음의 외선 순환 루프. 잠깐 잠들면 한 바퀴를 돌아 탔던 곳으로 다시 돌아온다. 시간은 한 시간 반이 훅 가버린다. 그러고 집에 들어가면 마치 그 시간까지 술 마시고 들어온 걸로 오해받기 십상이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어디 가서 입가심 맥주를 한잔 하고 막차를 타야겠다. 그러면 잠들어도 신도림에서 내릴 수 있다. 아니 내려짐을 당할 수 있다.
주부장은 바바리 코트 깃을 세우고 사람들의 행렬과 반대로 걷기 시작했다. ‘갑자기 새로운 탐색’이다. 저 길 건너엔 또 무슨 미지의 맥줏집이 기다리고 있을까. 발걸음이 가볍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