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일은 저보다 박사원이 더 잘할 것 같아요."
정사원에게 보고서 작성을 맡길 일이 있어 자리로 불렀다.
“정사원, 이번 상무님 보고서 말이야, 지난번에 니가 정리한 그 포맷으로 가자. 그거 상무님이 좋아하셨잖아.”
“… 부장님, 상무님이 그 포맷을 좋아하셨던 건 맞는데요.”
“응, 그래, 좋아하셨잖아, 이거 시간이 없는데, 니가 거기에 제일 익숙하잖아.”
“근데요, 솔직히 말씀드리면요, 이 일은 저보다 박사원이 더 잘할 것 같아요.”
“야, 박사원이 갑자기 왜 나와? 니가 했던 거잖아.”
“제가 했던 건 맞는데, 그때도 사실 구조 잡는 걸 박사원이 많이 도와줬고요.”
“야, 자꾸 그렇게 말 돌리지 말고, 그래서, 하기 싫다고 (싫다는 거니?).”
“아니, … 싫다는게 아니구요, 저는 계속 이런 일만 맡게 되는 건가요? 제가 이 일을 맡는 기준이 뭔지 모르겠어요.”
“야, 일이 있으면 제일 잘하는 사람이 하는 거지, 뭐 여~가(여기가) 학교가(학교야?).”
“… 알겠습니다, 제가 할게요.”
일단 일을 맡기긴 했는데, 찜찜~하다. 술이 땡긴다. 시계를 보니 퇴근 시간이다. 어제도 회를 먹고, 그저께도 회를 먹었으니 오늘은 중화요리를 먹어볼까 싶다.
남대문 시장 쪽에서 북창동 먹자골목으로 들어서는 초입에 규모는 작지만 2층짜리 중화요리 집이 있다. 좁고 가파른 계단을 올라 2층의 좁은 테이블에 앉았다. 이 집은 무조건 고기튀김이다.
중국산 맥주도 같이 주문했다. 중국산 맥주는 몇 년 전 외주 업체 노동자가 맥아 적재함에서 소변을 보는 영상이 확산되어, 국내 수입량이 반토막 난 적이 있다. 좀 찝찝한 기분이 들기는 하지만, 중화요리에 중국산 맥주를 마시면 왠지 합이 맞는 기분이다. 더 중요한 점은 국산 맥주병이 500ml인데 반해, 중국산 맥주는 640ml이다. 중국산 맥주를 네 병 마시면 국산 맥주 다섯 병을 마신 효과가 있다. 반면 집에 들어갔을 때, ‘네 병밖에 안 마셨다’며 절제력을 자랑 할 수 있다.
고기튀김을 기다리며 중국산 맥주 한 잔을 쭉~ 들이킨다.
‘내가 명색이 인사조직 박사 딴 사람인데….’
정사원에게 말은 세게 해버렸지만, 주부장도 사실 정사원 잘못이 아니라 본인의 잘못이란 걸 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대부분의 부장들은 ‘MZ의 문제’로 착각한다. 부장들은 ‘MZ 직원이 일을 거부하네’ 혹은 ‘요즘 애들은 책임감이 없다’고 오해한다. 하지만 문제의 원인은 다른 데 있다. 이 상황 하나에 여러 문제가 혼재되어 있는데, 첫째는 ‘누가, 왜 이 일을 해야 하는지 기준이 없는’ 직무의 문제다. 둘째는 ‘잘하는 사람이 계속 일을 떠맡는’ 구조의 문제다. 셋째는 ‘업무를 배분하는 방식이 잘못된’ 리더십의 문제다.
따라서 이 상황에서 정사원의 반응은 ‘거부가 아니라 문제 제기’일 가능성이 크다. 부장들은 그 문제 제기를 수용하고 직무를 재설계(Job Redesign) 해야 한다. 직무 ‘재’설계라니.부장들에겐 정말 어려운 일이다. 직무를 설계하지도 않았는데 ‘재’설계 해주라니. 이걸 어떻게 하란 말인가. 사실 우리 나이때 부장들은 ‘직무 미정의 시대’에 회사를 다녔다. 하지만 지금 MZ들은 ‘명확한 직무 설계’를 원한다. 우리의 생존을 위해서라도 이제 직무 ‘재’설계 방법을 연습해야 한다. 비록 애초에 설계도 해본 적 없지만 말이다.
드디어 고기튀김이 나왔다. 튀김 하나를 집어 소금에 찍어 먹는다. 짭짤바삭한 맛이다. 중국산 맥주를 쭉~ 들이킨다.
중국집에 가보면, 고기튀김을 파는 집이 있다. 탕수육도 있는데 고기튀김을 따로 파는 이유는 뭘까? 이런 집은 특징이 있다. 고기튀김은 튀김 자체가 평가 대상이다. 반죽, 온도, 튀기는 횟수가 맛으로 바로 드러난다. 소스로 가릴 수 없다. 결국, 자신 없으면 메뉴에 못 올리는 요리다.
고기튀김을 파는 집은 대부분 술집 성격이 강하다. 맥주, 고량주와 궁합이 맞다. 그래서 배달이 아닌 홀 장사를 하고, 단골 중심의 중국집일 가능성이 높다. 이런 집은 보통 다른 요리도 다 맛있다.
주부장의 국민학교(초등학교) 시절, 집에 무슨 좋은 일이 있으면 꼭 자장면에 탕수육을 시켜 먹었다. 이때부터 화교식 중식이 차이나타운으로 밀려나고 골목마다 한국식 중국집이 들어섰다. 그리고 탕수육이 주인공으로 부상했다. 달콤한 소스로 아이와 가족을 공략했다. 철가방 배달도 성행했다.
주부장이 탕수육을 저평가하는 건 아니다. 탕수육 만으로도 엄청난 기술을 선보이는 중식당도 많이 있다. 그럼에도 뭔가 탕수육은 배달음식의 이미지가 있다. 반면 고기튀김은 확실히 술 안주다. 그래서 애주가 주부장은 고기튀김을 더 사랑한다.
이 집은 난자완스도 판다. 주부장의 최애 중화요리다. 서울 시내의 중국집들을 쭉 보면, 사대문 안에 오래전부터 화교가 장사를 한 집에는 난자완스를 판다. 그런데 배달을 병행하고 최근에 생긴 중국집은 대부분 난자완스를 팔지 않는다. 왜 그럴까? 첫째는 대중성이 없어서다. 이름부터 낯설고, 모양도 밋밋하다. (아… 사람들이 그 육즙 가득한 풍미팡팡한 맛을 못 느껴봐서 그렇다.) 둘째는 조리 난이도 대비 수익이 낮다. 완자를 만드는 고기 배합에 실패하면 퍽퍽해지고, 튀김온도에 실패하면 기름을 너무 먹어 버리고, 반죽 질감을 실패하면 나중에 먹을 때 풀어진다. 실패 확률은 높은 반면, 소스 맛은 탕수육 소스만큼 강하지 않고 또 묽어서 소스로 실패를 덮을 수 없다. 결국, ‘요리사의 자존심’이 없으면 못 내는 메뉴다.
고기튀김과 난자완스를 동시에 파는 집은 어떤 집인가? 보통 1세대 주방장이었던 화교 주인장은 홀 카운터 옆을 지키고 있고, 주방에는 2세대 아들이 (무교동 지하상가에는 2세대 딸이 주방에서 웍을 잡는 집도 있다.) 주방장을 맡고 있다. 그리고 단골들이 홀에 술 마시러 오는 집이다. 단골은 각자 취향이 확실해서 메뉴판도 안 보고 원하는 메뉴를 주문한다. 혹은 주방장한테 메뉴 선택을 맡긴다. 난자완스도 그런 메뉴로, 풍미팡팡한 맛을 천천히 씹으며 느끼는 음식이다.
이건 좀 비약이 심하고, 중식 하시는 분들에게 동의를 구한 게 전혀 아니라 조심스럽지만, 나름 신촌에서 돈가스를 튀겨 보고 술집으로 전업했을 때에는 튀김 메뉴도 팔던 주부장의 생각은 이렇다. 아차, 주부장이 명색이 인사조직 박사라는게 더 중요하다.
탕수육은 대중 메뉴다. 고기튀김부터는 난이도가 좀 오른다. 튀김 실력이 중요하다. 난자완스는 고기 이해도와 튀김감각이 다 필요하다. 이제 나름 박사의 손길을 입혀보면 (튀김옷을 입히는 게 아니라) 탕수육은 표준화가 가능한 ‘초급 단계의 직무’다. 고기튀김은 ‘중간 단계의 직무’다. 난자완스보다 표준화가 쉬운 반면, 탕수육보다 요리사 역량이 더 드러난다. 난자완스는 ‘고급 단계의 직무’다. 숙련자를 위한 직무라고 해도 좋겠다.
아… 난자완스 얘기를 했더니, 그 풍미가 그리워 그냥 갈 수가 없다. 혼자 먹기엔 양이 많겠지만, 와이셔츠의 단추와 표면장력 전쟁을 벌이는 뱃살이 그냥 다져진 게 아니다. 다 먹을 수 있다. ‘내가 인사조직 박사를 그냥 땄는 줄 아나.’ 신촌 술집 거리에서 얼큰하게 취하신 교수님들의 택시를 다 잡아드리고, (그때는 카카오택시도 없을 때다.) 택시 문을 닫아 드리면서 ‘졸업학기 주OO 입니다!’ 90도 인사를 했다. 술집 일과 학업을 병행하며 박사를 쉽게 딴 게 아니다.
어쨌든 다 옛날 얘기다. 난자완스를 주문하며, 중국산 맥주 빈 병도 들어 보인다.
직무 재설계의 목적은 직원을 설득하는 게 아니다. 직원이 납득 가능한 구조를 만드는 것이다.
‘박사원이 저보다 잘할 것 같아요’ 같은 말이 나오는 팀의 구조는 항상 이렇다. 첫째, 누가 일을 맡아야 하는지 기준이 없다. 둘째, 실패 리스크가 개인에게 전가된다. 셋째, 잘하는 사람에게 일이 몰린다.
따라서 임원으로부터 새로운 업무를 받으면, 부장은 업무의 유형부터 파악해야 한다. 이를 위한 세 가지 질문이 있다.
첫째, 표준화 가능한 업무인가? 절차와 산출물이 명확하고, 누가 해도 비슷한 결과가 나온다면 표준화 가능한 업무다. 탕수육형 업무이다. 반면 개별적인 판단이나 맥락에 의존해야 하고, 사람에 따라 편차가 크다면 표준화할 수 없는 업무다.
둘째, 숙련자에게 맡겨야 하는 업무인가? 실패 비용이 크고 개별적인 판단의 책임이 크다면 숙련자에게 맡길 업무이다. 난자완스형 업무다. 반면 실패해도 학습으로 여길 수 있고, 개인의 판단 범위가 제한된 업무라면 숙련자가 필요 없는 업무다.
셋째, 경험용 과제로 적절한 업무인가? 직원이 업무 수행을 위해 특정 역량을 배워야 하는 반면, 직원이 스스로 했을 때 크게 실패하지 않을 보호장치가 마련되어 있는 업무는 경험 과제로 적절하다. 고기튀김형 업무다. 만약 업무가 단순 반복되고 직원을 스스로 하게 방치해뒀을 때 위험도가 높은 업무라면 경험용 과제가 아니다.
만약 표준화가 가능한 탕수육형 업무를 직원에게 맡긴다면, 부장은 다음과 같은 직무 재설계 언어를 써야 한다. ‘이건 표준 업무라서 네 직무에도 포함되어 있어’, 혹은 ‘박사원이 잘할 수도 있지만, 이 일은 누가 해도 비슷한 결과가 나오는 업무야’ 이런 표현이다. 이때 염두에 둬야 할 점은 ‘개인 간 비교를 제거’해야 한다는 것이다. ‘박사원보다 정사원이 더 잘해서’ 업무를 맡기는 게 아니다.
숙련자의 전담 업무인 난자완스형 업무를 맡긴다면, 부장은 ‘이건 판단 리스크가 커서 박사원에게 맡길게’ 이런 표현이 좋겠다. ‘왜 네가 아닌지’를 명확히 설명해 주는 게 핵심이다. 이미 부장이 먼저 말했기 때문에, 직원이 ‘박사원이 더 잘할 것 같아요’라고 어려운 얘기를 할 필요가 없다.
경험용 과제인 고기튀김형 업무를 맡길 때는, ‘이 업무는 네가 경험해봐야 하는 과제야’와 같은 표현을 써보자. 이때 ‘진행 방향은 내가 옆에서 같이 봐줄게’처럼 안전망을 함께 제공하는 게 좋다. 일종의 보호된 실패를 허용하고 학습하는 목적을 강조하는 것이다.
부장이 유념해야 할 점은 ‘말이 나오기 전에, 부장이 먼저’ 움직여야 한다. 부장이 먼저 업무 유형을 정하고, 담당자를 선택한 이유를 설명하고, 기간과 범위도 먼저 얘기해야 한다. 예를 들면, ‘이건 경험용 과제로 이번 분기까지만 네가 맡는 거야’ 같은 설명이다. 그래야 MZ가 공정성을 따지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재설계된 업무를 ‘제도화’ 시켜야 한다. 직무 목록에 반영하고, 만약 반복적으로 발생할 업무라면 자동화, 외주 같은 효율화 계획도 같이 수립하고, 무엇보다 개별 평가 기준에 반영해야 한다.
고기튀김 한 점을 집어 소금에 찍어 먹는다. 맥주 한 잔을 쭉~ 마신다. 난자완스 한쪽도 덥석 베어 문다.
여전히 부장의 걱정 한 가지가 남아 있다.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MZ 직원이 ‘여전히 비교하며 업무를 회피’하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건 태도의 문제일 가능성이 있다.
직무 설계가 잘못된 경우와 직원이 진짜 일하기 싫어서 떠넘기는 경우를 구분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세 가지만 기억 하자. ‘이유’, ‘대안’, ‘일관성’이 있으면 회피가 아닌 합리적 문제 제기다. 가령 MZ 직원이 진행 중인 일도 미루는 성향이라면? 이유 없이 미루는 태도의 문제다. 혹은 대안 제시 없이 거부만 한다면? 그것도 태도의 문제다. 만약 모든 일에 반복적으로 같은 반응이라면? 당연히 태도의 문제다.
반면 MZ가 업무의 기준, 역할의 불명확성을 지적한다면? 그것은 직무 설계의 문제일 가능성이 크다. MZ가 박사원이 더 잘한다는 이유를 설명한다면? 직무 설계 문제일 수 있다. 더 나아가 직무 재조정을 제안한다면? 그것은 확실히 직무 설계의 문제다.
고기튀김과 난자완스의 바닥이 보인다. 맥주만 마셨더니 아직 까딱없다. 소금에 찍어먹고, 반으로 잘라먹고 속도를 더 내본다. 맥주도 술술 들어간다. 이제 클라이맥스, ‘숙련자 부장’의 표현법이다.
직무 재설계 상황에서도 숙련자 부장은 질문을 한다. 예를 들면 문제 인식을 확인하는 질문이다. ‘박사원이 더 적합 하다고 느낀 이유를 조금만 설명해 줄래?’ 부장도 이미 답을 알지만 MZ 입에서 답이 나오도록 유도한다.
숙련된 부장은 선택지를 제공한다. ‘이번엔 정사원이 주도하고 박사원이 지원하는 방식은 어때?’ 혹은 ‘이번 프로젝트까지만 네가 맡고, 후속 프로젝트도 네가 맡을지 직접 선택 하면 어때?’ 이런 식이다.
마지막으로 숙련된 부장은 성장과 연결시킨다. 예를 들면, ‘이 일을 해보면 네가 다음 단계로 성장하는 데 도움이 될 거야’ 이런 표현이다. 이를 직무 확장(Job Enrichment)이라 한다. 직무 확장은 ‘일의 의미를 더하는 것’이다. 업무량을 늘리는 게 아니라, 업무의 자율성, 책임, 기술 수준을 높여 더 보람 있고 성장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이는 단순한 직무 확대(Job Enlargement)와 구분된다. 직무 확대는 기존 일과 비슷한 난이도의 업무를 추가해서 양을 늘리는 것이다. 반면 직무 확장은 상위 수준의 업무를 추가해 업무의 질을 높이는 것이다.
직무 재설계는 ‘업무의 질’을 높이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 그래서 MZ 후배의 업무에 ‘의미’를 더해 줘야 한다. 하지만 이 일은 부장이 하루아침에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여러 차례 시행착오를 거치며 연습해야 한다. 탕수육 배달 음식점이 갑자기 고기튀김과 난자완스를 내놓을 수 없듯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