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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준 Feb 04. 2020

치앙마이, 러스틱마켓

내 마음의 시장

매일이 휴일일 것 같은 여행자에게도 일요일은 진정한 휴일이다. 우리들은 온갖 묘책을 짜내고 신기를 부려서 살아 있는 자들의 운명인 일상의 지루함으로부터 도망친다. 그러나 이국에서 맞는 첫날 아침, 문득 젖힌 커튼 사이로 또 다른 지루한 일상을 시작하는 사람들이 보이면, 그 분주한 발걸음에 함께 하지 못한다는 기묘한 불안감이 애써 얻은 우리의 해방감을 밀고 들어오기 시작한다. 이 불편함은 맛있는 한 끼를 찾아 삼삼오오 몰려가는 점심시간의 사람들을 볼 때도, 고단한 하루를 끝내고 집으로 향하는 사람들의 물결을 볼 때도 계속된다. 그러나 일요일은 이들과 함께 우리의 불편함도 쉬는 날이다.


모처럼 당당한 게으름을 피울 수 있는 여행자가 일요일 아침 부지런히 자리를 털고 일어날 수밖에 없는 것은, 일주일에 단 한 번 일요일에만 문을 여는 러스틱마켓 때문이다. 치앙마이에서 이른 아침에 러스틱마켓이 열리는 올드시티의 북쪽 아차다톤 로드까지 가기 위해서는 그랩을 이용하는 게 가장 쉬운 일이다.


그랩앱을 켜고 호출을 하니 숙소 근처에서 대기를 하고 있었는지 바로 응답이 온다. 나는 곧 은회색의 토요타 야리스에 오른다. 1,500cc의 이 작은 소형자동차의 계략에 빠진 듯 그랩은 언제나 갖가지 색상의 야리스로 응답해 왔다. 그래도 목적지를 입력할 때마다 청구되는 숫자를 보면 차를 타고 가는 내내 미안한 마음이 가시지 않는다. 더구나 프로모션 코드를 입력해서 할인까지 받았을 때는 기름값을 빼면 도대체 이 사람한테 돌아가는 것이 있을지를 걱정하게 되고, 이런 시스템으로 운용되는 거대 회사의 숨겨진 음모에까지 생각이 이어진다.


좁은 승용차 안에서 바라보는 일요일 아침의 텅 빈 도로는 늦은 밤 혼자 남아 일을 하고 있는 사무실 풍경처럼 스산하고 쓸쓸하다. 야리스는 아무 거리낌 없이 휑한 거리를 부지런히 달려가고, 나의 예감은 손님이라곤 아무도 없는 을씨년스러운 광장에서 몇 명의 상인들이 아무 데서나 볼 수 있는 뻔한 물건들을 펼쳐 놓고 소리나 질러대고 있을 불안한 풍경을 그리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기우다. 야리스가 마침내 아차다톤 로드에 들어서자 곧 차들이 밀리기 시작한다. 이어서 교통경찰의 호루라기 소리가 들리고 이미 일찌감치 쇼핑을 마친 사람들이 손에 봉투를 들고 거리로 나선 모습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복합상가인 찡짜이마켓이 쉬는 일요일, 그 빈 공간에서 일요일마다 열리는 러스틱마켓은 소박한 시골 시장의 맛을 내는 어감을 주려고 지은 이름이겠지만, 이름과는 다르게 도시의 상인들 중에서도 세련되고 개성 있는 상품을 만드는 사람들이 모여서 만드는 작은 동호회와 같은 느낌이다. 시장이 열리는 공간은 그리 크지 않지만, 감탄을 자아내며 시선을 잡아두는 물건들이 옹골차게 들어서 있어 작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시장을 들어서자 퀼트 원단으로 만든 동전지갑과 손가방을 비롯한 여러 가지 작은 가방들이 진열되어 있는 매대가 보인다. 인디고 원단에 굵고 가는 무명실로 스티치 되어 있는 고양이는 깜찍한 애교덩어리가 되어 있다. 그 옆에서는 대나무로 만든 도시락통에 아크릴 물감으로 그려 넣은 시베리안 허스키가 천방지축 귀염둥이로 변신을 하고, 나무로 깎아 만든 작은 코끼리들은 원색의 물감들로 옷을 입을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값싸고 디자인이 독특한 원피스를 파는 곳은 벌써부터 사람들이 몰려 있다. 사람들은 저마다 옷을 들고 이리저리 몸에 대어 보며 들떠 있고 같이 온 친구는 큰 웃음으로 화답한다. 잘 팔리는 물건과 안 팔리는 물건의 운명은 시장에 오면 금방 판명 난다. 시장의 사람들과 함께 하는 사람은 잘 팔리는 물건을 만들고 혼자만의 세계에 있는 사람은 자기만의 물건을 만든다.


좁은 통로는 밀려드는 사람들로 점점 복잡해지고 몇 줄 안 되는 간이 의자에 앉아 있는 사람들 앞에서 어쿠스틱 기타를 든 밴드가 노래를 시작한다. 남자들이 연주를 하며 간간이 화음을 넣고 여자가 멜로디 라인을 따라가며 노래를 부른다. 노래를 부르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 맑은 목소리가 경쾌한 기타 소리에 맞춰 울려 퍼지고 내용을 알 수 없는 태국 노래를 간이 의자에 앉은 사람들과 함께 나도 흥얼거리기 시작한다. 일요일의 시장은 점점 더 가벼워진다.


먹거리가 없는 시장은 시장이 아니다. 바닥에 앉은 주인장이 주위에 둘러앉은 손님들에게 손으로 내린 커피를 한 잔씩 건네주는 모습은 이미 이 시장의 명물이 되어 있다. 아침을 거르고 달려온 여행자에게는 부드럽고 따뜻한 죽이 건네진다. 길거리의 단골 메뉴인 팟타이와 로티 역시 빠질 수 없다. 예쁜 색깔의 토핑을 얹은 작은 풀빵은 보기만 해도 맛이 느껴진다. 속이 채워진 작은 게딱지들이 불 위에서 익어 가고 꼬치구이인 무삥과 까이삥의 냄새가 구수하게 퍼져 나갈 때, 다른 한쪽에서는 태국의 식재료에 대한 모든 상상력이 발휘된 소소한 음식들이 길게 펼쳐진 좌대에서 불티나게 팔려 나간다.


여행자의 마음을 뺏는 것은 값비싼 보석이 아니다. 갖가지 색의 면사는 가방과 머리띠로, 코코넛 껍질은 목걸이로, 망고나무는 예쁜 그릇으로 변해 있다. 투박한 마끈은 아프리카 평원의 동물의 왕국을 만들고 몽족의 여인들이 색실을 꼬아 만든 레이스는 한 남자가 무두질한 가죽과 조화를 이뤄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세련된 디자인의 카메라 줄이 되어 내 시선을 뺏는다.


부드러웠던 햇살은 이제 뜨겁다. 나는 파빌리온 밑의 그늘 속에 앉아 햇빛이 내리쬐는 한낮의 치앙마이를 바라본다. 뒤늦게 찾아온 사람들이 흘러내리는 땀을 닦으며 색색의 차양이 펼쳐진 시장 속을 부지런히 돌아본다. 그들의 감탄과 흥분이 내게 전해오고 나도 그들과 함께 미소를 짓는다. 나는 이제 시장을 나선다. 양 손에 들려 있는 종이가방 속에서 아내와 아이들의 환호소리가 들려온다. 차량을 안내하는 주차안내원의 이마에 맺힌 땀방울에 차도 없는 내가 그냥 미안하다. 길은 이미 한산해지고 일요일 오후의 나른함이 밀려들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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