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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준 Feb 05. 2020

치앙마이, 랑머

젊은 그대!

치앙마이 올드시티에서 치앙마이의 각 지역으로 진행하는 주요 간선도로 중에 서쪽으로 나아가는 수텝로드라는 길이 있다. 올드시티의 서쪽 출입구인 쑤언독게이트에서 시작하는 이 길은 그러나 다른 길들과는 달리 그리 오래 나아가지 못하고 곧 끝나고 만다. 치앙마이를 대표하는 산인 도이수텝이 이 길을 가로막기 때문이다.


도이수텝은 치앙마이의 서쪽에서 남북으로 길게 뻗어 있는 산으로, 정상에 있는 왓프라탓 도이수텝 사원과 이곳에서 볼 수 있는 야경 때문에 관광객에는 반드시 가보아야 할 곳으로 잘 알려져 있는 산이다. 이 도이수텝의 기슭에 태국 북부에 최초로 세워진 대학교인 치앙마이대학교가 넓게 자리를 잡고 있다. 그리고 이 치앙마이대학교의 후문을 나서면 바로 수텝로드의 끝자락과 만나게 되는데, 사람들은 이 지역을 랑머라고 부른다.


랑머의 아침은 갖가지 새들의 소리로 시작된다. 도이수텝의 끝자락을 비집고 이리저리 휘어져 들어가 있는 골목길과 그 골목을 기대 자그마하게 세워진 숙소에 맑고 청량한 새들의 노래가 울려 퍼진다. 그리고 이들의 노래가 잦아들 무렵 사람들의 시간이 찾아온다. 수텝로드를 마주하고 치앙마이대학교를 바라보는 랑머는 학생들에게 학교 밖의 생활 그 모든 것을 의미한다. 잠자고 먹고 쉬는 모든 것이 이 곳에서 해결되니 이들의 요구와 욕구가 투영된 곳이 랑머인 셈이다.


 랑머의 학생들은 교복을 입는다. 흰색 상의와 검은색 하의가 만드는 극단의 대비는 한치의 흐트러짐도 허용치 않겠다는 당국의 단호한 의지를 느낄 수 있지만, 그 의지는 곧 아무것도 모르는 듯한 순진한 얼굴과 젊음 자체가 분출하는 이해할 수 없는 열정으로 인해 곧 무력화되어 버려서, 흑백의 교복은 그저 이들의 맑은 얼굴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배경막으로 끝나 버리고 만다.


무엇을 입어도 아름다울 수밖에 없는 청춘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스쿠터를 타고 커다란 물줄기를 이루며 교문 안으로 쏟아져 들어간다. 그리고 저 멀리서 아득히 잊고 있던 나의 젊은 날의 희망과 이야기가 실려 있는 또 하나의 스쿠터가 이들의 뒤를 쫓아 힘겹게 따라 들어간다. 랑머의 아침은 그들의 시간에 나의 시간을, 그들의 웃음소리에 나의 웃음소리를 섞고 싶다는 헛된 희망을 갖게 하는 시간이다.


교문 앞이 제법 한산해지면 개들만이 배회하던 거리에 상인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이제 그들의 시간이 시작된다. 세븐일레븐의 진열대에 상품을 보충할 트럭이 도착하고 온갖 싸구려 플라스틱 제품을 파는 잡화점에서는 주인아주머니가 비를 들어 가게 앞을 청소한다. 그 옆의 맛집으로 소문난 오리고깃집 아저씨는 앞치마를 두르고 가게 안과 밖으로 물을 부으면서 청소를 하고 있다. 아침을 거르고 학교로 온 학생들이 급하게 요기를 하던 포장마차들은 이제 슬슬 가게를 거두고 저녁 장사를 준비하러 집으러 돌아가려 한다. 빵집에서 버터향이 새어 나오고 열대의 태양도 잠에서 깨어 기지개를 켜기 시작하면 내 얼굴도 서서히 달아오른다.


학교 앞을 떠나 랑머의 골목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수많은 크고 작은 숙소들과 함께 개성 있는 카페들과 작은 수공예품 상점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허름한 가정집이나 마당 한 편의 헛간, 작은 건물의 한 귀퉁이가 열대의 식물과 소소한 소품들로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파라다이스로 변해 있다. 커피는 깊고 중후하며 밀크티는 부드러우면서 기품 있는 단맛을 낸다. 작은 머그잔에 먹으로 그려 낸 엄마와 아기코끼리는 깊은 밀림의 편안함과 보호해야 할 그들의 보금자리를 일깨워 주고, 색색의 구슬을 꿰고 실을 꼬아 만든 작은 팔찌는 그들의 평화를 나의 평화로 이어준다. 일상에서 비범함을 만들어 내고 흔한 것을 독특한 것으로 만들어 내는 랑머의 풍경이다.


랑머의 뜨거운 한낮을 책임지던 카페는 저녁이 되면 수텝로드의 학교 담을 따라 끝없이 늘어서는 야시장에 그 자리를 넘겨준다. 어두운 거리는 포장마차들의 불빛으로 불야성이 되고, 교복을 입은 청춘들이 생각할 수 있는 세상의 모든 먹거리들이 한데 모여 하루의 수고를 위로해 준다. 어두운 좌판에 앉아 먹는 몇 가닥의 국수와 꼬치구이 몇 개가 하루의 피로와 바꿔지는 그 기묘한 상관관계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도로를 따라 늘어서 있는 수백 년은 족히 넘었을 늙은 나무들은 이제 자기의 몸을 새들과 열대의 식물들에 기꺼이 자리를 내주고 또 하루를 살아내고 있다. 밤은 깊어 가며 별은 빛나고, 오래된 나무들 밑에서 소곤대는 오래된 이야기들이 랑머의 밤하늘에 점점이 흩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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