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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성민 Jun 22. 2023

비싼 소파 사놓고 바닥에 앉기

다 때려치우고 산으로 들어가고 싶은 사람을 위하여.



욕망의 허상


  집에 있는 가구 중에 전 주인이 두고 간 안방의 고정식 옷장을 제외하면 가장 비싼 가구가 의자(소파)다. 심지어 결혼할 때 샀다가 첫째 아이가 물 쏟아서 고장 난 ‘소녀시대 TV(당시 제일 비쌌던 제품)’를 제외하면 지금까지 구매한 전자제품까지 포함하더라도 가장 비싸다.


  그런데 이 소파라는 존재가 참 이상하다. 꽤 큰 크기임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이 크니까 온 가족이 다 앉을 수가 없다. 꼭 한 사람은 눕는다. 눕지 않더라도 다리를 길게 뻗거나, 아이들의 경우 등받이에 다리 올리고 거꾸로 눕기도 한다. 각자가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자세를 취하게 된다. 또 팔걸이가 있거나 다리 받침이 있는 자리가 로열석이고 이를 차지하기 위한 다툼이 벌어지기도 한다.


  그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다. 설령 자리가 비어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왠지 소파보다 바닥에 앉는 것이 더 익숙하다. 푹신해서 안락감을 느끼기에 더 좋은 데도 굳이 딱딱하고 안락하지도 않은 바닥에 앉아서 비싼 소파를 등받이로 만든다. 게다가 기대앉을 때 각도가 애매하게 안 맞거나 쿠션감이 부족하거나 소파가 상할 것 같은 불안감이 들거나 엎드리고 싶어지는 등의 다양한 불편함이 생긴다. 그래서 아내는 소파에 기대앉을 때 쓰는 삼각형 쿠션을 새로 샀다. 나는 그 쿠션을 사겠다고 하는 아내에게 그걸 왜 사냐고 했지만 결국 가장 애용하는 사람이 됐다.





나의 욕망 = 누군가의 사하라 오지체험


  군 장교일 때 한미합동 훈련을 한 적이 있다. 파트너 중에 하와이에서 왔다는 미군 장교가 있었다. 같이 밤샘 훈련을 하다 보니 꽤 친해졌다. 중간에 쉬는 날짜가 있었는데 그때 한국식 밥을 먹고 싶다고 같이 가줄 수 있냐고 했다. 갈비탕, 비빔밥 뭐 이따위 책에서 볼 것 같은 것들 말고 정말 실질적으로 한국인들이 많이 먹는 걸 경험하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20대 후반 미혼이었던 내가 저녁이나 주말에 끼니 때우러 자주 갔던 김밥천국으로 데려갔다.


  그 매장은 처음 간 곳이었다. 보통 다른 프랜차이즈 매장에 가면 의자에 앉아서 식사하는 방식인데 거기는 대구 외곽 왜관이라는 시골이라 그런지 한쪽에 테이블이 세 개 있는 마루바닥이 있었다. 미국인에게는 최고의 경험할 것이 또 생긴 것이다. 의자 자리도 있었지만 마루바닥에 있는 테이블에 자리 잡았다. 메뉴도 식당 주인에게 떡볶이를 최대한 맵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 미군 장교는 식사하는 동안 땀을 뻘뻘 흘리면서 물을 2통이나 들이켰다. 다리도 계속 폈다 굽혔다 했다. 한국식 매운맛에 정신 하나도 없는 데다가 생전 처음 해보는 양반다리에 쥐가 날 뻔했단다. 식사를 마치고 부대로 돌아가면서 그는 너무나 고맙다고 했다. 사하라사막 오지 체험이라도 한 느낌일까.


  외국인들이 바닥에 앉고 양반다리를 하는 것을 힘들어한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실제로 보니 참 신기했다. 생각해보면 나는 식탁에서 밥 먹을 때도 한쪽 다리를 반대쪽 오금과 의자 사이에 올리고 앉는다. 그나마도 혼자서 밥을 차려 먹을 때는 굳이 밥과 반찬거리를 가지고 거실로 와서 작은 책상에 올려두고 바닥에 앉아서 먹는다. 책상에서 작업을 하려고 의자에 앉을 때도 바닥에 앉듯이 한쪽 다리를 접거나 양반다리를 하는 경우가 있다. 불편하지만 왠지 그게 더 익숙하다.





욕망의 조건


  어쩌면 의자에 앉는다는 행위 자체가 익숙하지 않은 것인지도 모른다. 인류가 언제부터 바닥이 아닌 의자에 앉아서 생활했는지 살펴보니 정확한 유래가 밝혀지지 않았지만 수천 년 전이라고 한다. 하지만 대체로 의자는 권위의 상징이었다. TV의 사극 드라마만 봐도 의자에 앉는 사람은 주로 왕이나 권력자들이다.


  같은 앉는 행위만 놓고 봐도 바닥에 앉는 것과 의자에 앉는 것은 차이가 크다. 첫째 의자에 앉으려면 일단 의자가 있어야 한다. 직접 만들거나 누군가를 시켜서 만들거나 돈을 주고 사거나 선물을 받거나 뭐가 됐던 의자 자체가 없으면 불가능하다. 두 번째 의자를 둘 공간이 있어야 한다. 평면적으로나 수직적으로나 의자를 두고 앉아서 뭔가를 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 책상이나 탁자 같은 의자가 있어서 필요한 부수물들도 둘 공간이 확보돼야 한다. 세 번째 의자에 앉을 시간이 있어야 가능하다. 하루종일 손님이 끊이지 않는 햄버거 가게 직원은 움직여야 하는 동선이 빽빽하게 정해져 있다. 의자가 있어도 걸리적거리기만 하고 앉을 수가 없다. 앉아도 금방 일어나서 정해진 동선으로 움직여야 한다. 인류가 살아 온 과거의 역사 속에서 의자가 상당한 시간 동안 권위를 상징했던 것도 이런 이유일 것이다. 돈이나 권력, 시간, 공간 등 권위를 가진 사람이 통제할 수 있는 조건과 같다.     





복잡하고 다양해진 욕망


  좋은 의자가 어떤 의자일지 상상해보면 대체로 편안하고 푹신하거나 화려하고 멋있는 것이다. 기능적으로 훌륭한 의자를 떠올리는 경우는 드물다. 최신 기능이 다 들어가 있는 안마의자를 제일 좋은 의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아무나 막 앉을 수 있고 관리도 필요 없는 공원의 나무나 철제로 된 공용의자, 버스 정류장에 있는 작고 딱딱한 플라스틱 의자 같은 것을 상상하는 사람도 드물 것이다. 대체로 중역 의자 같은 검은색 가죽으로 된 묵직하고 편안한 의자를 떠올리거나 화려한 색감이나 재질의 아름다운 여왕이 앉을 것 같은 원목 의자를, 혹은 생전 가보지도 않은 북유럽에서 유행한다는 실용성 있어 보이지만 그다지 편해 보이지는 않는 예쁜 색감의 의자를 떠올린다.


  문명이 발달하면서 편안하고 멋있어진 좋은 의자가 많이 생겼다. 그런데 한발짝 더 들어가 보면 사실 의자가 많아졌다기보다 의자에 앉는 우리의 모습이 많아진 것이다. 수험생이 수능이나 고시 공부하느라 의자에 앉고, 교인이 교회나 성당에서 종교행사를 위해 자리에 앉는다. 공원에서 산책하던 할아버지는 쉬려고 의자를 찾고, 회사에서 직원은 대표의 지시를 받기 위해 회의실에서 자기 자리를 찾는다. 과거에는 의자와 앉은 사람들의 모습에 권위만 있었는데, 지금은 발달한 사회 문화만큼 의자도 복잡하고 다양해졌다.      





욕망과 굴레


  그래도 변치 않는 것이 하나 있긴 하다. 의자가 ‘있는 곳’에 앉는다. 잔디밭이나 계단 같은 의자가 없는 곳에 앉기도 하지만 대체로 의자가 있어야 앉는다. 이것을 달리 표현하면 ‘의자’가 ‘앉을 자리’를 고정해 주는 것이다. 우리의 생각과 행동에 제약을 주는 중요한 요인이 됐다. 교회에 갔는데 교인들이 의자를 두고 바닥에 앉아서 예배에 참석할까. 만약 자리가 부족하다면 의자를 달라고 하거나 다른 시간대에 올 것이다.


  의자가 없는 곳에 당연하고 편안하게 앉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이게 누가 시켜서 그런 것이 아니고 우리 스스로 한 것이다. 스스로 집이나 회사, 공원 여기저기에 의자를 만들어 두고 “여기서만 앉으세요. 다른 데는 지저분하고 불편해요”라고 말하면서 무의식중에 철저하게 지킨다. 어기면 큰일 나는 것으로 안다. 디오게네스의 자유로움만큼은 아니더라도 의자 하나만 있어도 그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좀 답답하다.


  제일 비싸고 거실의 상당한 공간을 차지하는 소파를 사놓고도 우리는 바닥에 앉는다. 그럼으로써 생기는 또 다른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해 ‘소파에 기대앉을 용도’의 쿠션까지 산다. 어쩌면 소파는 꼭 필요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다 있으니까 우리 집에도 있어야 할 것 같아서 사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TV가 TV 받침용 가구 위에 올려져 있거나 벽에 걸려있어서 시선 높이를 맞추려고 사는 것일 수도 있다. 바닥에 앉아도 되는데 굳이 소파를 사서 만들어진 불편함으로 또 다른 조치들이 필요해졌다.


  보통 삶을 살아가면서 목표로 삼는 돈, 권력, 건강도 마찬가지다. 심지어 행복, 불행, 기쁨, 슬픔, 안정, 불안 등 우리가 느끼는 감정이나 기분도 그렇다. 인간이라면 동양인이라면 남자라면 여자라면 부모라면 가장이라면 당연히 이렇게 살아야 해. 이렇게 느껴야 해. 꼭 이 의자에만 앉아. 다른 데 앉으면 지저분해지고 불편해져. 다쳐. 죽을 수도 있어. 이런 것을 나도 모르는 사이에 계속 주입 시키고 스스로 옭아맨다.      





벗어날 수 없는 욕망의 굴레


  그렇다고 의자를 다 없애버리자는 말은 하고 싶지 않다. 같이 식사했던 그 미군 장교는 숙소로 돌아와서 물었다.

  “만약에 너한테 미국 영주권을 주고 미군이 될 수 있게 해준다면, 받을래? 거부할래?”

  “거부할 거야”

  난 교과서 같은 답을 당연하게 했다.

  “정말? 내가 그동안 많은 나라에서 똑같이 물어봤는데 다 명쾌하게 답을 못했어.”

  나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의자가 아무리 우리의 삶을 구속하고 옭아맨다고 하더라도 그걸 치워버리기에는 너무 멀리 왔다. AI와 과학기술이 인류에게 피해를 줄 것 같아 걱정된다고 해도 원시시대 수렵채집인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만약 모든 것을 감수하고 다 치워버리더라도 반드시 다른 의자를 찾아 헤맬 것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의자를 만들고 불편해하고 그리워하고 다른 걸 또 만들고 불편해하고 그리워하는, 그래서 다시 나를 옭아매고 복잡한 삶을 정리해 줄 좋은 의자를 갖고 싶어 하는, 그런 존재다.





선택할 자유


  근데 아직 중요한 것이 남아있다. 어떤 의자에 앉을지는 나의 몫이고, 선택할 수 있는 의자들은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다.  

        





- 2023. 06. 22. 작은 책상 위에 노트북을 올려두고 거실 바닥에 앉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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