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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hillip Apr 04. 2021

어제저녁

소고(小考) | 비도, 안개도 썩 좋아하진 않는다.

 해가 어스름 짙어오면 늘 찾아오는 개와 늑대의 시간. 길게 땅거미가 질 땐 아군과 적군을 쉽게 구분하기 어렵다. 한편으론 마음이 놓인다. 나와 너를 구분할 필요가 없다. 존재의 혼연으로 피아를 구분치 않을 자유를 얻는다. 한 치 앞을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비가 몰아치면 늘 비슷한 생각을 품곤 한다. 눈이 점차 안 좋아지는 만큼 우산을 울리는 빗소리에 귀 기울일 수 있어 좋다. 미안합니다. 우산 끝이 누군가를 스친 것도 같다. 뒤를 돌아보니 그 치는 이미 저만큼 멀어져 있다. 타인은 무관심하다. 애초에 나를 두고 너를 구분 짓는 일은 의미가 없는 일이었다.


 비가 몰아치던 어제저녁 그 짧은 길을 멀리도 돌고 돌아 목적지에 다다랐을 때 한편으로 마음이 놓이기도, 한편으론 또 다른 긴장감을 느끼기도 하였다. 지친 상태에서 입을 떼기 시작한 탓이었을까, 이내 에너지가 고갈됨을 느꼈다. 긴 호흡으로 더 말을 뱉어내고 싶었다. 실존하는 누군가를 앞에 두고 말을 건네기 시작하면 하염없이 과거의 나를 끄집어내곤 한다. 뭐가 그리도 하고픈 말이 많은 건지. 혹은 아직도 억눌렸던 과거의 자신을 비워내고 싶은 탓인지. 자꾸만 말이 늘어졌다. 그게 싫었다. 집에 오는 길, 발밑이 하염없이 질척였다.


 집에 도착해선 오랜만에 긴 통화를 하였다. 잠깐을 예상하였던 이야기는 새벽까지 이어졌다. 제3세계는 지옥의 현시가 펼쳐지고 있단다. 그럼에도 그곳에 머무는 친구들은 코로나 블루가 아닌, 코로나 드림을 이야기한다. 어떻게든 상황이 나아지고 속박을 벗어던지는 날엔 더 높이 날아오를 거라고. 너도 함께 날아오르자고. 매 순간 한결같은 그녀는 때론 몽상가와 같아 목표와 이상의 경계가 모호하다. 그러나 나는 그런 그녀 곁에서 무려 6년째 개구리 뜀뛰기를 계속하고 있다. 그래, 허루투 이뤄지는 일은 없는 거니까. 나에게 이 정도 시련은 적당하다. 방점을 찍을 날이 머지않았다 믿고 계속 뜨거운 채로 존재해야 한다.


 이른 아침잠에서 깨었다. 창을 열어보니 아직도 비가 추적 인다. 몸이 차다. 몇 마디 말로 달아올랐던 게 불과 몇 시간 전이었는데, 이렇게도 나의 현실은 차갑기만 하다. 그래서 계속 적어야 한다. 계속 사람들을 만나고 소통하고 기록을 남겨야 한다. 그래야 그나마 숨은 좀 쉴 것 같아서, 살아있다 느낄 것 같아서. 무거운 몸을 이끌고 오늘도 길을 나선다. 거리가 잘 내려다 보이는 평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단 몇 분이라도 하염없이 행복한 상상들로 머리를 가득 채워야겠다. 엔돌핀이 한가득 차올랐으면 좋겠다, 카페인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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