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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hillip Apr 02. 2021

투표소 가는 길

의식의 흐름대로 씌어진 글

 집에서 부전 1동 주민센터까지의 거리는 1.1킬로미터. 걸음이 빠른 내겐 왕복 20분 남짓의 거리이다. 일하는 와중 잠깐 짬을 내어 가는 길이었기에 오늘은 더 바삐 걸음을 옮겼다. 마음이 바빴던 탓일까 옮기는 걸음걸음 시야에 드는 풍경이 바뀔 때마다 의식의 흐름 또한 그 방향을 달리하였다.



 Phase 1. 문을 나서 샛길로 향하던 와중 한동안 테이프 둘러져 있던 철길 산책로가 열린 것을 확인하고 그리로 걸음을 돌렸다. 벤치의 장식이 바뀌었다. 전엔 보이지 않던 조형물들이 더해졌다. 기차가 지나면 묘한 리듬으로 땅이 울릴 테지. 저기 앉아 있으면 그 리듬에 맞춰 엉치뼈가 울릴 테고, 난 다섯 살 어린아이처럼 웃음 또한 지을 것도 같다.


 

 잠시 쉬었다 가요, 우리. 그래, 너로 정했다. 내가 좋아하는 빨파노 색색이 다 마음에 들기에 잠시 너에게 내 몸뚱이를 맡겨보마. 매일 나는 자유롭게 걷지만- 아참, 투표소로 향하는 길이었지. 쉬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 그러니 다음을 기약하고 안녕. 어쩌면 오늘 밤 우린 다시 볼 수 있을 거야. 나는 매일 밤 달리기를 하니까 네 곁으로 지나가도록 해볼게. 철길을 따라 난 하늘이 아름답다. 분명 밤에 바라본 하늘은 다른 색일 거야. 어둑해진 이곳에서 달리다 말고 게으름을 피우고 있는 나를 상상하며 다시 한번 걸음을 재촉한다.



 Phase 2. 부전 시장은 늘 어르신들로 북적인다. 철길 산책로를 빠져나와 횡단보도를 건너면 나오는 부전 새벽시장. 이른 아침엔 사람들 틈바귀를 빠져나오느라 바쁜 곳이라지만 점심 녘이면 이미 반절의 가게는 장사를 마친 탓에 한산하기 이를 데 없다. 역전으로 향하는 길에 꼭 잔술을 팔 것만 같은 허름한 대폿집이 남아있고, 그곳엔 늘 나이가 지긋하신 어르신들이 한 자리씩 꿰차고 계신다.


 

 이곳 역시 늘 색에 관한 이야기로 시끌벅적하다. 어떤 분이 파랑당 멍멍이를 외치면 파란당 빨갱이가 뒤를 잇고, 빨갱이와 빨간 당 표현에 유의하라는 어떤 어르신과, 하여튼 나는 대깨문이 싫어요로 이야기가 마무리될 무렵 파란당 빨갱이로 도돌이표를 찍어버리는 또 다른 어르신, 그 옆에 푸른 앞치마를 두르고 계신, 늘 조용히 미소 짓고 있는 주인아주머니 모습. 투표하러 가는 길이었기에 어르신들의 말씀이 귓바퀴를 더 크게 울렸던 건 아닐런지. 나의 아버지, 내 가족들을 이해하려는 마음으로 어르신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본다. 당신들이 헤쳐온 당신들의 영광의 시대, 그때의 하늘은 과연 어떤 색이었나요. 그때의 붉은색은 빨갱이의 빨간색이었나요, 아니면 당신과 당신의 이웃들이 흘린 핏빛 붉은색이었나요. 잠시 던지지도 못할 질문을 품었다 살포시 그 자리에 내려놓았다. 나는 그저 푸른 앞치마 두른 주인아주머니의 미소만 기억하고파.



 Phase 3. 재빨리 투표를 마치고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조금만 더 주변의 분위기에 휩쓸려 버리면 온 세상 일들이 다 정치로 보일 것만 같아 에어팟을 끼고 볼륨을 높였다. 연사가 없는 활동사진은 흡사 이런 느낌이 아니었을까. 왔던 길을 되돌아 가고파 철길 쪽으로 방향을 트는데 눈길을 잡아끄는 녀석이 있다. 순종은 아닌 듯한데 짧은 다리와 실한 엉덩이가 녀석이 웰시코기의 후손이라 외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잠시 일어서 포즈를 잡는 척하더니, 연신 셔터질을 해대는 내게 심드렁한 표정 한번 지어 보이곤 그대로 배를 깔고 누워버린다. 찍사가 마음에 안 들었나 보군. 혹은 이 정도는 일상다반사라 그리 흥미를 느끼지 못한 걸지도 모르겠다. 시크한 녀석. 다음을 기약하도록 하지. 난 너의 뒤태에 반해버렸어.



 새벽시장 왼편으로 보이는 민물 어시장이 여전히 활기차다. 장어를 손질하는 아저씨 등 뒤로 고소한 내음이 올라온다. 아직 시간이 이른데 소주 한 모금으로 입을 적시고픈 욕구가 치밀어 오른다. 이제사 블랙핑크의 제니 사진이 여기저기 붙어있음을 깨닫는다. 시각보다 미각과 후각이 먼저 작동하였다. 아아, 아저씨. 짧은 탄식을 마치기도 전에 장어의 내음도 소주의 달달함도 제니의 모습도 흐릿해진다.    



 할 일이 태산이다. 기탄없는 하루를 보내기 위하여 상상은 여기까지만. 이미 지나버린 오늘과 내일 4월 3일 토요일은 4.7 보궐선거의 사전투표일이다. 많은 분들이 휴일이 아닌 4월 7일보다 토요일인 내일 여유롭게 투표를 하실 수 있으면 어떨까 하는 마음으로 이 글을 적어보았다. 많은 깨시민들이 소중한 한 표를 행사하여 자신의 의사를 피력하는, 울림 있는 하루로 만드셨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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