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흐릿하지만 5살 때까지 할머니랑 같이 산 기억이 있다.
그중 가장 뚜렷하게 기억나는 건 마당에서 테니스 공으로 축구를 하던 기억이다. 혼자 열심히 종이에 전술을 그리며 혼자 패스하고 움직이며 골 넣고 좋아하던 어린 날의 기억.
그 열정이 지금의 나를 만든 게 아닐까 싶다.
그 후 나는 다시 아빠, 엄마, 형과 함께 살게 됐다.
그래도 방학 때면 1~2주씩 형과 함께 할머니 집에 가서 할머니와 같이 시간을 보내곤 했다.
그리고 다시 내가 살던 집으로 돌아오는 날엔 한 번도 빠짐없이 눈물을 흘렸다.
혼자 남게 되는 할머니가 마음에 걸려서 그랬을까? 아님 연세가 있으시니 다시는 못 보게 될까 두려워서였을까?
그 이유는 아직까지도 정확히 모르겠지만 할머니와 헤어지던 광주 터미널에서도, 명절을 보내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기 위해 탔던 아빠 차에서도 나는 항상 눈물을 흘렸다.
한 번은 형이 할머니를 만나러 가는 고속버스 안에서 나를 울리려고 했던 장난이 기억난다.
“할머니, 돌아가시면 어떡해?”라는 말에 난 또 한바탕 눈물을 흘렸다. 그런 소리 하지 말라면서 그럴 일은 없을 거라고 말하면서 눈에선 눈물이 자꾸 흘렀다.
내가 축구를 시작하니 할머니는 생전 보시지도 않던 축구를 보기 시작하셨다. 한 번은 손흥민 선수 이야기를 하시길래 깜짝 놀랐다.
고등학교 졸업 후에 일본으로 가게 돼서 할머니를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많이 줄었다.
일본에서 생활하며 할머니가 보고 싶었던 적이 많았다. 그럴 때마다 밤하늘의 별을 봤다. 일본 생활이 많이 힘들었지만 열심히 해서 K리그로 이적해서 경기를 뛰면 할머니도 나를 자주 볼 수 있고, 나도 할머니를 자주 볼 수 있다는 생각에 이 악물고 버텨냈다.
그렇게 6년 만에 내가 꿈에 그리던 K리그로 이적이 확정됐다.
당시에 코로나로 인해 귀국을 해서 격리를 하고 바로 합류를 해야 되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동계훈련이 끝나고 휴가가 있으면 할머니 뵈러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남해에서 동계훈련을 했다. 일본에 있을 땐 걱정하실까 봐 부모님께 자주 연락을 드렸었는데 훈련도 힘들고 적응도 힘들어서 연락을 거의 안 했다.
그러다 2021년 1월 31일 저녁. 갑자기 엄마에게 전화가 하고 싶었다. 아니해야 될 것 같은 느낌에 이끌려 전화를 걸었다.
오랜만에 전화를 해서 그런지 엄마의 목소리는 어두웠다. ‘전화를 너무 안 해서 삐지셨나’라고 넘겨짚고 얼른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일찍 전화가 다시 걸려왔다.
혼내려고 전화를 했을까 봐 처음엔 받지 않았었다. 그 뒤에 형에게 전화가 왔다. 갑자기 불길한 느낌이 들어 전화를 받아 보니 형이 엄마를 바꿔줬다.
“할머니 돌아가셨다.”
잠이 확 깼다.
아니. 사실 그때의 기억이 거의 없다.
택시를 타고 순천으로 갔다가 버스를 타고 광주로 갔다.
장례식장에 도착하니 눈물부터 났다.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저 가족을 안고 눈물만 흘렸다.
정장으로 갈아입고 할머니 곁을 지키다가 입관식 시간이 되어 내려갔다.
마지막으로 보는 할머니.
‘마지막으로 할머니를 본다면 무슨 말을 할까.’라는 생각을 해본 적은 있다. 하지만 그런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아 금방 잊곤 했다.
그랬던 일이 이젠 정말 나에게 다가왔다.
정말 마지막으로 할머니의 얼굴을 보게 됐다.
할머니의 평온할 얼굴.
할머니의 얼굴을 만지며 한마디도 꺼내지 못했다. 눈물만 흘렀다.
정말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하든 그게 마지막 말이 된다는 게 너무 조심스러워 아무 말도 못 하고 조용히 눈물만 흘렸다.
지금 생각하면 후회가 된다.
마지막으로 할머니 얼굴을 보며 말할 수 있는 기회였는데 “할머니”라고 불러보지도 못한 게 후회가 된다.
하지만 다시 그때로 돌아가면 아무 말도 못 할 것 같다. 무슨 말이든 마지막이 된다고 생각하면 정말 아무 말도 안 하고 부정하고 싶다.
그럼에도 만약 정말 할머니에게 마지막으로 이야기할 시간이 있다면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
‘할머니 너무 고마워요.’
‘할머니 손자로 태어나서 너무 행복했어요.’
“어딜 가든 인사 잘해야 된다.”
“휴지 한 조각이라도 아껴 써야 된다.”
“착하게 살아야 된다.”
할머니가 형과 나에게 항상 하시던 말씀이다.
‘아직까지 잘 지키며 살고 있어요 할머니’
‘할머니, 다음에 또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