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를 보들레르의 <파리의 우울>
나는 문학을 사랑하고 좋아합니다. 시를 읽을 때 시인의 재능과 그가 사용한 언어의 아름다움에 찬탄과 함께 부러움을 마음에 품은 적도 있습니다. 위대한 시인이어서 훌륭한 시인들이 경의를 표하는 프랑스의 시인, 보들레르, 그의 시집 <악의 꽃(Les Fleurs de mal)>은 출간된 지 2백 년이 지났습니다. 세상 낯선 이름이지만 문학과 친숙한 이들에게는 시와 산문을 쓰고 번역을 한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파리에서 태어나 파리에서 삶을 마감한 ‘파리의 시인’으로 불립니다. 그리고 그의 격정은 파리 곳곳에 스며든 듯합니다.
그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충격, 예술에 대한 존중 등에 대해 쓴 바 있습니다. 아마 그도 인공지능의 시대를 맞이한 우리 만큼이나 격변의 와중에 놓인 듯합니다. 그는 변화의 충격을 아름다운 문장으로 담아냅니다. 그는 건강이 악화되기 직전 ‘파리의 우울’이라는 산문시를 발표합니다. 지금 우리에게 전하는 책 <파리의 우울>이 출발하는 지점이죠. 격변의 도시 파리 한복판에서 고독한 산책자로 파리의 변화를 지켜본 파리의 시인 보들레르는 도시의 화려함으로 가려진 이면을 독특하고 유려한 문체로 그려냈습니다.
그는 시집 <악의 꽃>으로 논란의 한가운데에 있었습니다. 후대의 높은 평가와 달리 시집 출간 당시 그가 속한 사회는 그의 작품들을 환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미 자신의 시집을 가리켜 ‘차갑고 불길한 아름다움을 입고 있다’고 하였다고 합니다. ‘차가움‘과 ’불길함‘, ’ 아름다움‘이라는 이질적 단어의 결합이 말하듯, 그는 기존의 관습에 대한 거부, 도처에 널린 수많은 욕망들에 대한 질타, 사라질 운명에 처한 예술의 광휘(아우라) 등을 아름답고 현란한 독설로 채웁니다. 그의 사회는 그의 언어를 불온시했고, 시인은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했습니다. 가혹한 검열과 기소, 시의 삭제로 시인은 휘청거렸고 결국은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아주 긴 시간이 지나서야 복권이 되었죠.
<파리의 우울>은 19세기 파리의 풍경을 그립니다. 시인은 자신이 살아온 도시의 급속한 변화를 고통스럽게 바라보았습니다. 지금은 여행자들이 가장 가고 싶어 하는 도시인 파리가 막 생겨나는 풍경을 시인은 바라보고 있습니다.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파리 한복판에 서서 시인은 몹시 당황해합니다. 시인은 불안한 시선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립니다. 얼마 전만 해도 시인은 마음 놓고 거리를 걸으면서 도시의 풍경을 만끽하고 때로는 중간에 멈춰 서서 하늘도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도로를 질주하는 마차 때문에 그런 산책이 불가능해졌습니다. 달려오는 마차를 급히 피하다가 넘어질 뻔한 시인에게 흙탕물이 튑니다. 놀란 시인은 건물 벽에 기대어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습니다. 익숙한 것들의 소멸로 인한 상실감, 그리고 거기에 넘실대는 수많은 욕망들을 바라보아야 하는 지겨움 등이 <파리의 우울> 곳곳에 보입니다.
길모퉁이의 카페, 보도를 향해 늘어선 좁고 작은 의자들, 에스프레소 잔을 기울이는 이들, 낮은 스카이라인, 파스텔톤의 건물들, 곳곳의 박물관과 미술관, 쇄석도로 등의 모습을 갖춘 지금의 현대도시 파리와는 얼마나 다른지 알 수는 없지만, 시인이 변화의 격랑 한가운데 있었던 것만은 분명한 사실로 보입니다. ‘이방인’이라는 시에서 무엇을 사랑하느냐는 마지막 질문에 ‘저기…..저기…… 저 찬란한 구름을’이라는 답을 합니다. 낭만은 사라지고 모든 것이 탐욕과 연결됩니다. 시인은 막 단장을 끝내고 손님을 받기 시작한 화려한 카페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가스등으로 더욱 밝아진 백색톤의 길모퉁이 카페를 바라보는 시야에 카페 주변을 서성이는 남루한 차림의 한 가족들이 들어옵니다. 시인은 카페를 가리켜 ‘모든 역사와 신화가 식탐을 위해 활용되는 공간‘이라고 냉소합니다. 그래서 <파리의 우울>은 위대한 시인이 근대화의 충격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를 생생하게 전해주는 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시대의 시인들은 지금의 격변을 어떻게 표현해 낼지 궁금합니다.
시인은 파리의 변화를 모욕적으로 받아들였을 듯합니다. 그는 파리의 변모와 함께 스러져간 것은 아닌가 짐작하고 있습니다. 위대한 예술가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은 단지 권력자의 칼만이 아니었을 겁니다. 위대한 예술에 대한 모욕이 예술가의 생명을 한순간에 앗아갈 수 있었음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글이 <파리의 우울>의 한 편, ‘어떤 장렬한 죽음'일 것입니다.
질투심 많고 지칠 줄 모르는 쾌락에 사로잡힌 국왕이 있습니다. 그는 폭군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술에 대한 탐욕적 감식안을 가진 국왕은 '팡시울'이라는 광대(무언극 배우)의 재능에 흠뻑 빠졌습니다. 그를 통해 국왕은 자신의 병든 쾌락을 채워갔습니다. 팡시울은 무언극이나 대사가 별로 없는 배역에서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는 희극배우로 국왕의 총애를 받았습니다. 폭군에 대한 저항은 예고된 바, 일부 신하들은 국왕을 축출하려는 역모를 꾸몄고 팡시울은 거기에 가담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모의는 이내 발각되었고, 모두 처형을 기다리게 됐습니다. 팡시울에 대한 국왕의 분노가 어느 정도였을지 짐작이 가능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소문이 돕니다. 사면이 내려질지도 모른다는 소문 말입니다. 소문의 진원은 국왕의 주도로 장대한 규모의 연극 공연이 열리고 주인공이 팡시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사형 선고를 받은 이들도 관람에 참석한다는 것입니다. 팡시울의 공연이 성공을 하면 국왕의 분노가 누그러져 역모자들이 죽음의 길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실낱같은 희망을 생각했을 겁니다. 팡시울은 무대에 섭니다. 시인은 아래와 같이 공연에 대해 묘사를 합니다.
그날 밤 팡시울은 진정 완벽한 이상의 화신이어서, 이상화된 인물이 거의 살아 움직이고 있다는 것, 그것이 실제로 가능하다는 것, 현실적인 것이 되었다는 사실을 상상하지 않는다는 게 불가능할 정도였다. 이 어릿광대는 머리 주위에 불멸의 후광을 발하며 - 그것에 ‘예술’의 광휘와 ‘순교자’의 영광이 섞인 야릇한 혼합이 있었다 - 무대 위에서 왔다 갔다,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고, 경련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팡시울은 진정 무어라 말할 수 없는 특별한 은총을 받아 이 기상천외의 익살에까지 숭고한 것과 초자연적인 것을 끌어 넣었다. 내가 여러분에게 잊을 수 없는 그날 저녁을 묘사하려고 노력하는 동안에도 펜은 떨리고, 나의 눈에는 아직까지도 여전히 살아 있는 감동으로 눈물이 솟는다.
죽음을 앞둔 팡시울의 심정을 짐작하기는 어렵습니다. 불온한 쾌락에 지배된 국왕이 만든 무대이지만 팡시울은 자신이 지닌 능력치를 최대한 끌어냈을 겁니다. 국왕 역시 극한의 경계에 선 위대한 배우가 어떤 연기를 할 것인지 궁금했을 겁니다. 팡시울의 연기는 현실을 뛰어넘어 천상에 오릅니다. 타락한 국왕은 자신의 지위를 위협한 자들에게 어떤 자비도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극이 최정점에 이르고 있을 때 국왕은 어린 시종에게 지시를 합니다. 시종은 무대를 향해 날카로운 휘파람을 붑니다. 아! 절정의 연기를 펼치던 팡시울은 순간 얼어붙습니다. 시종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죽이며 복도 쪽으로 급히 뛰어’ 갑니다. 팡시울은 숨이 막혀왔고 비틀거리다 그 자리에 그대로 쓰러져 숨을 거둡니다.
이 허구의 사건은 위대한 예술에 대한 모욕이 얼마나 치명적인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상징일 뿐이죠. 시종의 날카로운 휘파람은 조화에 균열을 내는 폭력이었고, 시인은 파리의 변화가 조화를 깨트리는 모욕이라고 여긴 듯합니다. 이제 더 이상 거리를 천천히 산책하며 사유하는 일이 불가능해졌고 그토록 경멸하는 탐욕이 거리에 넘쳐나는 것을 목격해야 했을 때, 자신을 안온하게 감싸안던 조화로움과 평화는 사라지고 만 것입니다. 그의 일상은 하나의 조화였고, 그 조화가 폭력에 의해 파괴된 참혹한 현실을 모욕적으로 받아들인 것은 아닌가 생각합니다. 시대의 변화를 고통으로 받아들였지만 도시는 변했고, 시인은 죽어갔습니다. 그를 죽음으로 몰아간 것은 무례와 모욕이라고 생각합니다.
호아킨 피닉스가 연기한 <조커>의 대사가 기억납니다. ’인간이 인간에게 어찌 그렇게 무례할 수 있을까!‘ 문학은 모든 모욕과 무례에 맞선다는 사실을 새롭게 생각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