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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수산책 Jul 06. 2023

메타포의 간극 속 모호함으로 휩싸인 방황

영화의 숲에서 영화 읽기-<버닝>

이창동 감독의 <버닝>은 영화 좀 본 사람들도 '도대체 영화가 왜 이래?' 할 만했습니다. 우리가 보는 영화들의 미장센이나 배우의 연기에 감탄하며 스토리를 따라가면 됐습니다.  <버닝>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영화가 진행될수록 관객들은 불편하기만 합니다. '이창동 영화니까!' 그래서 참을성을 발휘하려는 관객들은 있기 마련입니다. 그들은 디테일을 놓치지 않으려 애를 씁니다. 그런데도 이내 불명확한 스토리 전개로 길을 잃게 됩니다. 이제부터 관객들은 객석에 있는 동안 영화에 부대껴야 하는 상황이 되고 맙니다. 자본주의 시스템에 따라 작동되는 영화가 이럴 필요까지 있는가 점점 이해가 되지 않게 됩니다. 극히 제한된 관객을 전제로 한 영화가 대중을 상


무채색의 모호함

<버닝>의 화면은 무채색이 많습니다. 명도의 차이로 존재하는 무채색은 색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할 것입니다. 주로 일몰이 지나고 사물이 어둠에 잠기기 직전까지의 시간대입니다. 그리고 사물을 비추는 아주 잠깐인 빛이 있습니다.  남산타워의 유리창에 반사된 빛은 ‘주의 깊게 살피지 않으면 놓치는 빛’입니다. 그 빛은 <밀양>의 남루한 수채에 비치는 햇빛처럼 은밀하고 초라합니다. 주인공 해미와 종수가 바라보는 남산타워의 유리창에 비친 잠깐의 빛은 은유입니다. 두 젊은이의 삶에 드리운 어두움이 걷힐 미약한 가능성과도 같습니다. 화면 가득한 진회색, 영화는 화면처럼 내내 불투명하고 모호기만 합니다. ‘없다는 것을 잊는 것’이라는 해미의 말은 모호함의 시작입니다. 종수가 찾아다니는 ‘비닐하우스’와 해미의 ’우물’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합니다. 점점 모호함으로 뒤덮이고 만다. 종국에는 모두가 사라지고 맙니다.

 

희미한 빛과 구원

영화에 등장하는 종수, 해미, 벤은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인물들이다. 종수는 폭력으로 구속된 아버지, 가출한 어머니와의 만남을 불편하게 여기며 현실의 무게에 짓눌린 채 살아갑니다. 그는 이름 대신 ‘3번’이라는 익명을 사용하는 관리자에게 맞서지만 단지 소극적으로 저항할 뿐입니다. 자신의 낡은 트럭으로 벤의 포르셰를 추적하고, 소설을 쓴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그러나 그저 주눅이 든 채 살아가는 젊은이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 종수와 해미와의 만남에서 구원의 가능성에 대한 의문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행사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활하는 해미를 우연히 만나 그녀의 방에서 남산타워에서 반사된 잠깐의 빛을 봅니다. 그러나 빛은 너무 짧고 희미합니다. 가난한 젊은 영혼들의 미래를 비추는 빛처럼 희미하고 짧기만 합니다.

해미가 '그레이트 헝거'를 찾아 아프리카로 여행을 떠나고 그들의 관계는 비틀어집니다. 종수는 파주에 있는 아버지의 헛간 캐비닛에서 아버지가 잘 관리한 칼들을 발견합니다. 종수의 아버지에게 그 칼들은 유일한 위안처럼 보입니다. 아버지에게는 ‘분노조절장애’가 있었고, 그것은 종수에게 이미 그대로 옮겨와 있었습니다. 폭발은 조금씩 준비되고 있었습니다. 여행에서 돌아온 해미가 옷을 벗은 채 ‘그레이트 헝거’의 춤을 추고 정신을 잃은 해미에게 종수는 차갑게 ‘창녀 같다’며 분노를 터트립니다. 그들에게 구원은 없이 각자의 욕망에 이끌려 어디론가로 가고 있었습니다.

 

‘비닐하우스’와 종수의 방황     

종수는 벤이 태우고 있다는 '비닐하우스'의 존재 확인을 위해 나섭니다. 그런데 '비닐하우스'가 존재하는지는 끝까지 확인되지 않고 있습니다. 종수는 벤의 말과 현실 사이에서 방황을 합니다. 벤은 비닐하우스 방화가 정기적으로 이루어졌고, 가장 최근의 방화가 아프리카 여행 전이었다는 점, 세상에는 쓸모없는 비닐하우스가 많다는 점, 절대로 들키지 않는다는 점 등을 종수에게 알립니다. 종수는 비닐하우스에서 사라진 해미의 흔적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집 주변의 비닐하우스를 필사적으로 찾지만 실패합니다. 비닐하우스를 태웠냐는 종수의 질문에 벤은 아주 가까운 것을 태워서 종수가 알 수 없었다고 합니다. 종수의 표류는 계속됩니다.

종수를 혼돈에 빠지게 한 벤은 종수와 다른 세계에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한국의 갯츠비’라는 종수의 표현처럼 이질적 세계에 존재하는 벤은 종수에게 의미심장한 말을 던지고는 메타포라고 하지만 거의 조롱에 가깝습니다. 그는 ‘그냥 노는’ 게 직업이고 포르셰를 타고 두 달에 한 번씩 비닐하우스를 태우는 게 취미라고 하지만 여전히 종수에 대한 경멸을 담습니다. 벤이 저수지에서 포르셰를 뒤에 두고 하염없이 물을 바라볼 때 종수는 바로 차 뒤에서 벤을 지켜봅니다. 벤은 뒤에 있는 종수의 존재를 알지 못하는데, 이는 롱테이크로 잡히는데, 종수는 벤이 유발한 메타포를 자신의 방식으로 해석하게 됩니다.

종수는 벤의 집 화장실에서 을 두 번 간다. 처음에는 수납공간에서 화장품 박스와 장신구가 들어있는 서랍을 열고는 몹시 놀란다. 다른 여자의 존재를 감지하면서다. 하지만 두 번째로 화장실을 들어갔을 때에는 조심스럽게 서랍을 열어 여성의 장신구들 틈에서 자신이 해미에게 줬던 시계를 발견한다. 그 시계는 벤이 던진 메타포들 속에서 방황을 끝낼 수 있는 단서가 된다.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우물’


이 영화에서 여성들은 대체로 모호하게 처리된다. 가장 대표적 인물은 해미이다. ‘없는 것을 잊어야 한다’는 해미는 ‘우물’을 거론한다. 그것은 종수를 혼란에 빠트리는 결정적 요인이 된다. 과연 우물은 존재하는 것인가? 그녀의 언니에게 우물은 부정당하고, 16년 만에 만나 빚쟁이 이야기를 하며 카톡을 만지작거리는, 믿을 수 없는 어머니는 우물의 존재를 인정한다. 우물의 존재 여부 사이에서 종수는 다시 방황을 한다. 고양이도 마찬가지이다. 분명히 고양이는 있었다고 하지만 주인 여자에 의해 부정되다가 벤의 주차장에서 ‘보일아’라고 부를 때 다가온 고양이로 인해 종수의 방황은 끝이 난다. 벤의 화장실에서 본 해미의 시계가 그러했듯이.  

  

‘그레이트 헝거’와 ‘리틀 헝거’     


해미는 자신이 모은 돈을 모두 쏟아 ‘그레이트 헝거’를 만나러 아프리카로 간다. 그리고 죽음에 대한 공포 대신 '조용한 소멸'을 간절히 소망한다. 그런데 해미는 카드빚에 허덕이는 ‘리틀 헝거’의 삶의 영역에 있었고 그것을 종수는 확인한다. 해미는 ‘리틀 헝거’와 ‘그레이트 헝거’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었고, 결국은 해석불가한 핸드폰의 잡음을 남긴 채 어디론가 사라지고 만다. 메타포의 간극에서 방황하던 종수는 자신의 방식대로 해석을 마치고, 그의 욕망은 좌절되고, 깊은 절망에 빠지고 만다. 그 모든 책임을 가진 자, 벤에게 돌리며 자기 내면에 자리한 무서운 분노의 표출이 시작된다.

어린아이가 땀을 뻘뻘 흘리며 불타는 비닐하우스를 바라보는 장면은 다름 아닌 종수의 내면 깊숙이 자리한 분노일 것이다. 아버지에게서 대물림된 칼과 자신이 키워온 버닝, 그것이 뒤섞이면서 극한의 폭력으로 치닫는다. 벤은 종수에게 가슴속에 딱딱한 것이 들어있다고 한다. 그것은 종수의 분노였고 그 분노는 스멀거리며 삐져나온다. 종수는 무엇도 남아 있어서는 안 된다는 듯이 불타는 벤의 포르셰 안에 자신의 모든 것을 던져 넣는다. 버닝을 뒤로한 채 알몸으로 공포에 휩싸여 어디론가 떠나는 것이다.     


**영화 <버닝>(2018)은 내가 좋아한 영화이다. 배우도 좋아했다. 그런데 배우의 스캔들로 영화의 존재가 위협받을지도 모를 일이다. 영화가 위험에 처하고, 아울러 배우가 천품의 재능을 낭비해 버린 게 안타깝다. 텍스트로서의 영화와 배우의 사적 영역이 분리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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