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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onho Song Oct 20. 2017

Django Reinhardt (장고 라인하르트)

Early Jazz 2 - 집시기타의 창시자 

장고 라인하트(Jean "Django" Reinhardt 1910- 1953)




집시 기타의 창시자이자 당대 최고의 기타 연주자였던 장고 라인하트(Jean "Django" Reinhardt 1910- 1953)는 20세기 기타 역사를 논할 때 Classical guitarist Julian Bream과 Country Guitarist Chet Atkins와 함께 가장 영향력 있는 연주자이자 뮤지션으로 손꼽힌다. 다른 영향력 있는 연주자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독창적인 자신만의 사운드와 테크닉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로 인해 Gypsy Jazz라는 새로운 장르를 창조해 냈으며 장고의 이름을 딴 수많은 페스티벌과 컴페티션, 영화가 만들어지는 등 그의 음악과 일생을 통해 문화, 예술에 걸쳐 유럽 사회 전체에 그가 끼친 영향은 우리가 그를 최고의 기타리스트라고 찬양하여도 아깝지 않을 단어라 생각한다. 



재즈는 미국 음악이라는 인식이 강했던 그 시대에 유럽인으로써 그만의 독창적인 스타일을 연주하며 유럽 음악의 에너지와 열정을 마구 쏟았던 그의 음악은 바이올린리스트 Stéphane Grappelli와 Quintette du Hot Club의 팀을 이끌며 당시 유럽 음악의 트렌드를 주도하였으며 Coleman Hawkins, Benny Carter 그리고 Duke Ellington's orchestra 등 당대 최고의 재즈 뮤지션들과 함께 연주를 하며 미국 본토에도 많은 영향력을 끼쳤다. 또, 그의 인생 스토리, 어릴 적 사고로 왼손 두 개를 쓸 수 없음에도 그 장애를 극복해 그만의 독창적인 스타일로 발전시키는 등 그의 음악적 열정에 대한 스토리는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었고 수많은 영감과 동기를 제공하였으며 음악적으로는 리듬기타에만 머물러 있던 기타를 솔로 악기로 끌어올리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유럽 재즈 뮤지션으로서 가장 위대한 음악가라고 꼽히는 그는 어린 시절 가난한 집시촌에서 태어나며 집시 유목문화 속에서 자라야 했다. 인생의 한 장르에 머무는 것을 거절하며 그의 본능을 따라 자유롭게 살아간 그는 성공한 후에도 그의 뿌리를 잊지 않고 평생 집시 문화 속에서 살아가는데 돈이나 명성을 추구하며 속박받는 삶보단 자유로운 떠돌이 삶을 더 사랑하였다. 그는 근대적인 방식으로 생활하기보다 가족과 함께 집시 캐러반에서 생활하는 것을 더 좋아하였고 번 돈을 도박으로 다 쓰는 등 내일을 사는 삶보다 오늘의 삶을 더 추구했는데 그런 자유로운 삶의 패턴으로 인해 때론 만석이였던 공연에 나타나지 않고 돈에 관련된 문제를 많이 일으켰으며, 제멋대로 행동하며 밴드와의 마찰을 격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그의 영혼의 뿌리를 안다면 그가 살고자 했던 삶을 비난만 할 수 없을 듯하다. 




두 손가락으로 기타를 연주하고 있는 그의 모습




Romani- French 재즈 기타리스트이자 작곡가인 Jean "Django" Reinhardt는 1910년 1월 23일 루마니아의 집시 가족 후손으로 벨기에의 Pont-à-Celles 에 있는 Liberchies이란 작은 집시촌에서 태어났다. 바이올린 연주가였던 아버지와 집시 댄서였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어릴 적부터 집시음악과 집시 문화의 영향을 받으며 자라났다. 그가 태어나던 이 시기엔 전쟁이 한참이였고, 이에 그의 아버지는 병역을 피해 파리 근교의 집시촌으로 거주지를 옳기게 되는데 그로 인해 그의 가족은 이름을 변경하게 되고 이때 얻은 그의 이름이 Jean Reinhardt이다. 후에 Reinhardt는 Djang (루마니아 어로 "나는 깨어있다")라는 닉 이름을 얻게 되는데 이후로 부턴 Django Reinhardt라 불리게 된다. 



 그는 어릴 적의 대부분을 파리 근교에 집시촌에서 생활을 하며 자랐으며 음악가인 부모님의 영향 탓에 이른 나이에 음악에 매료되어 어릴 적부터 바이올린, 밴조 그리고 기타를 연주하기 시작하였다. 어릴 적부터 7형제로 이루어진 가족 밴드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했던 그는 12살 때 벤조를 선물로 받으면서 벤조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특별한 교육이 없었던 시기에 그는 당시 기타 연주자였던 Jean "Poulette" Castro와 Auguste "Gusti" Malha, 또 바이올린, 벤조 기타 연주자였던 그의 삼촌의 연주를 보며 흉내 내며 연주하길 잘하였으며 그로 인해 15살까지 음악을 연주하며 비교적 안정되게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성인이 되어서 약간의 교육과 글 쓰는 법을 배우기도 하지만 그마저도 거부하고 본능을 따라 살아가며 연주했으며 후에 그는 기타의 키도 제대로 모를 만큼 음악에 대해서는 문외 하다고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늘 독창적이고 열정적이었던 그의 연주는 늘 매력적이었다.



17살이 되던 해 그는 집시 문화에 따라 같은 집시촌에 살던 Florine "Bella" Mayer와 결혼을 하게 되고(프랑스 법 아래 공식적인 결혼은 아니었다.) 그해 1928년 그는 벤조 플레이어로 아코디언 연주가 Maurice Alexander, Jean Vaissade, Victor Marceau, 그리고 싱어인 Maurice Chaumel와 함께 첫 리코딩을 녹음하게 되는데 이는 많은 연주가들이나 음악 애호가들에게 국제적인 주목을 받게 되고 그때 마침 우연히 프랑스에 방문하게 된 영국의 밴드 리더 Jack Hylton가 그의 음악을 듣고 반하게 되어 그에게 음악인으로서의 직업을 주게 되고 그는 받아들이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행운도 잠시, 그는 밴드를 시작하기도 전에 불행을 겪게 되는데, 그는 그 당시 집시들의 생활터전이었던 이동용 캐러반에서 생활을 하였고 그의 아내는 조화를 만들어 팔았는데 어느 날 그의 아내가 늦은 밤까지 일을 하다가 실수로 그의 침대 위로 촛불을 떨어뜨렸고 이에 불이 나게 되면서 불은 순식간에 그들의 화물 기차를 덮치며 그들은 큰 불속에 갇히게 된다. 그와 그의 아내는 어렵게 안전하게 탈출하게 되지만 그는 왼손과 다른 곳에 심각한 화상을 입게 된다. 이에 극심한 고통에 휩싸이게 되고 이에 그의 몸의 반은 1~2도 화상을 입었고 오른쪽 다리는 마비가 되었으며 그의 왼손의 4번째와 5번째 손가락은 타버리게 된다. 그에 의사는 다시는 기타를 칠수 없을 것이라 했고 그의 다리 또한 절단해야 한다고 했지만 Reinhardt는 수술을 거부하고 짧은 기간 후에 병원을 떠났다. 그 후 그는 스스로 재활훈련을 통해 오른쪽 다리는 지팡이를 의지해서 겨우 걷을 수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왼손은 이미 두 손가락은 잘리고 두 손가락은 마비된 상태였다. 그러나 그의 형이었던 기타리스트 Joseph Reinhardt는 그를 안타깝게 여겨 기타를 선물하게 되고 그에게 다시 일어설 것을 권유하는데 이에 그는 그의 장애에 굴복하지 않고 남은 세 손가락으로 연주를 하기로 결심하고 스스로 재활훈련에 들어가게 된다. 그는 남겨진 손가락을 통해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연습을 해야 했으며 그 결과 솔로 위주의 연주를 채택하게 되고 주로 가운데 손가락을 사용하며 코드를 잡을 때면 나머지 두 손가락을 사용하는 자신만의 독창적인 주법으로 연주하게 된다. 1929년 그는 그의 아내로부터 Henri "Lousson" Reinhardt이름의 아들을 얻었지만 이 둘 부부는 사고의 후유증과 트라우마로 결국 이별하고 만다. 




사고 후 그의 손가락과 기타




1925에서 1933년 사이는 그의 인생에서 개인적으로나 음악적으로 가장 중요한 시기였다. 아내와 이별을 후 그는 그의 음악가였던 가까운 사촌인 Sophie Ziegler와 가깝게 지내게 되는데 이때 둘은 드물게 프랑스 전국을 다니며 작은 클럽에서 연주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때만 해도 뚜렷한 음악적 목적이 없었던 그는 집시 출신답게 돈이나 저축에 대한 관념 없이 하루에 번 돈을 도박으로 탕진하는 등 하루살이 인생을 살게 된다. 이 시기는 그가 어릴 적부터 연주해오던 벤조를 버리고 본격적으로 기타를 잡게 된 기기였으며 또한 Émile Savitry와의 만남으로 인생의 전환점을 맡기 시작 한때이다. 평소 미국 재즈 음악의 팬이었던 Émile Savitry는 Reinhardt에게 Louis Armstrong 나 Duke Ellington의 음악을 소개하여주게 되고 이 완전히 새로운 사운드였던 재즈는 그에게는 신선한 충격이었고 그 후 그는 본격적으로 프로페셔널한 재즈 연주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새로운 목표를 향해 걷기 시작한다. 



그 후 그의 인생에게 가장 중요한 인물인 젊은 바이올린리스트 Stéphane Grappelli를 만나게 되는데 유독 같았던 음악적 취향 때문에 급격히 가까워지고 이에 두 사람이 같이 연주하면서 그들의 긴 인연은 시작된다. 이에 그들의 연주는 Gypsy 재즈의 시작을 알리게 되고 그와 함께한 많은 공연은 Reinhardt로 하여금 풍부한 경험과 음악적 성숙도를 높이는데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1934년에서 세계 2차 대전이 발생하기 1939까지 Reinhardt와 Grappelli는 함께 연주를 하며 유럽에서 가장 중요한 솔로리스트로 명성을 얻게 되고 이는 유럽 재즈 역사상 가장 혁신적이었던 밴드 Quintette du Hot Club de France를 결성하는 틀을 마련하는 계기가 된다. Quintette du Hot Club de France는 기타 연주에 그와 함께 Reinhardt의 형 brother Joseph와 Roger Chaput, 베이스 연주에 Louis Vola, 바이올린에 Stéphane Grappelli로 이루어진 최초의 현악기로만 이루어진 유럽피언 재즈 밴드였다. 이들의 조합은 신선했고 연주는 늘 화려했으며 그들의 수준 높은 연주가 담겼던 그들의 음반은 높은 판매고를 기록하게 되고 라디오를 통해 유럽은 물론 재즈의 고향이었던 미국까지도 알려지게 되면서 세계적인 유명 새를 얻기 시작한다. 



이를 계기로 Reinhardt는 미국으로 초대되고 Adelaide Hall, Coleman Hawkins, Benny Carter, and Rex Stewart 등 당대 최고의 미국 재즈 뮤지션들과 연주 및 리코딩을 하게 된다. 또 그는 평소에 음악적으로 동경하던  Louis Armstrong와 잼 세션과 라디오 연주를 같이 하게 되고 이를 인연으로 후에 Dizzy Gillespie와도 연주를 하게 된다. 또한 그는 그의 단짝인 Grappelli와의 연주도 정기적으로 가졌었는데 이는 그들의 유니크한 음악적 조합으로 그들만의 음악 스타일을 더욱 발전시키는 데 많은 영향을 끼친다.



그러나 불행히도 세계 2차 대전이 발발하게 되고 영국 투어 중이었던 그는 파리로 다시 돌아오게 되지만, Grappelli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영국에 머물게 된다. 1940년 파리로 다시 돌아온 그는 Grappelli 대신에 클라리넷 연주자인 Hubert Rostaing을 영입하고 새로운 쿼텟을 이끌며 프랑스 각지에서 콘서트 활동을 벌이면서 대성공을 거두기도 한다. 1943년 그는 Sophie "Naguine" Ziegler와 재혼을 하게 되고 그에 그의 아들 Babik Reinhardt을 얻게 된다. 



Reinhardt가 두손가락으로 코드를 잡고 있는 모습




운이 좋게도 그는 다른 집시들이 학살당하던 그 시기에 그의 음악적 재능 때문에 그로부터 살아남을 수 있었는데 유럽 역사적으로 집시는, 시끄럽고 지저분하고 도덕을 모르고 거짓말 잘하는 ‘비사회적 존재’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에 나치 정부는 집시를 이 비사회적 존재로 여기로 유대인들과 함께 유럽에 머무는 집시들을 학살하기 시작하는데 이때 학살당한 집시는 50만 명 이상으로 추산된다. 게다가 나치는 1차 대전 이후로부터 재즈 음악에 대한 적대감을 드러내는데 재즈 음악은 독일의 위대함을 약하시킨다는 음모론을 제기하면서 재즈 연주를 일절 금지하기 이른다. (이에 독일은 전쟁이 끝난 1950년대까지도 재즈음악의 연주와 청취는 금지되었다.) 1933년 시작과 동시에 집시들은 수용소에 갇히게 되고 또 그들만의 제한된 지역에서만 모여 살아야 했으며 1942년 까지 집시와 유대인은 조직적으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끌려감으로써 수없는 탄압과 학살을 격어야 했다. 



슬프게도 Reinhardt와 그의 가족은 집시였고 또한 그는 유명 재즈 뮤지션이었다. 이에 그는 두려움을 느끼고 그의 가족과 함께 프랑스를 탈출하려는 시도를 하는데 그만 첫 탈출 시도부터 그는 독일군 장교 Dietrich Schulz-Köhn에게 발각되고 만다. 그러나 이 장교는 비밀리에 재즈음악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는데 그가 유명 재즈 연주자임을 알아보고 죽이지 않고 다시 프랑스로 돌려보내게 된다. 그러나 여전히 프랑스는 집시들에게 고통의 장소였고 사람들이 죽어간다는 것을 알고 프랑스를 떠나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데  며칠 뒤 그는 스위스 국경을 통해 다시 탈출을 시도하게 되지만 이번에도 스위스 국경대에게 발각되어 파리로 돌려보내지게 된다. 



늘 전쟁의 공포 속에서 살아야 했던 그는 프랑스에 머무는 동안 그는 은밀히 재즈 연주를 통해 두려움을 극복하곤 했으며 이 시기에 그는 집시들의 위한 곡들과 오케스트라 곡들을 작곡하는데 이는 억압받는 그들의 마음과 자유에 대한 희망적인 곡을 작곡함으로 써 핍박받는 집시들을 위한 위로가 되길 원했다. 그 결과로 이때 작곡되었던 곡인 "Nuages"는 프랑스에서 비공식적으로 자유를 열망하는 희망을 뜻하는 성가가 되었으며 Salle Pleyel에서 열렸던 그의 콘서트는 수많은 군중들의 박수를 받으며 다시 한번 최고의 음악가로 써의 능력을 입증하였다.




Reinhardt 와 Duke Ellington



1946년 전쟁이 끝난 후 Reinhardt와 Grappelli는 영국에서 다시 재결합하게 되고 한편으로 그는 그의 첫 미국 투어를 돌게 되는데 Duke Ellington and His Orchestra의 게스트 솔로리스트로서 Cleveland Music Hall에서 데뷔 무대를 가지게 된다. 이때 Maurt Duetsch 등 많은 유명 미국 뮤지션들과 같이 연주하게 되고 투어가 끝나갈 때쯤 무렵에는 뉴욕 카네기홀에서 이틀 동안 연주를 가지게 된다. 이에 미국 음악 평론가들에게 경이로운 집시라는 호평과 함께 그는 인생의 음악적 업적의 공로를 인정받아 기립박수를 받게 된다. 그러나 또 반대로 영어도 할 줄 모르고 기타의 기본 키조차 모른다는 비평을 동시에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미국 투어 중 그는 본능에 따른 자유로운 행동으로 뮤지션들이 적잖이 당황하는 일들이 많았는데. 몇 예로 당대 최고의 재즈 오케스트라와 였던 Duke Ellington과의 협주에도 불구하고 그는 밴드 연주에 완전히 녹아들지 못했는데, 그와 연주할 당시 연주자 목록에 그의 이름이 없는 것에 실망하여 공연에 늦게 나타나기도 하였으며, 악기를 가져오지 않고 그때그때 일렉기타를 빌려서 연주하는 등 관객들에게 불성의 하였으며 캘리포니아에서 연주 제안이 들어왔지만 큰 진척이 없자 프랑스로 돌아가기도 하였다. 이 시기 그는 비판과 찬사를 동시에 받으며 본능에 따라 살아가며 미국에서도 많은 인기를 누렸지만 당시 미국 재즈는 스윙 시대에서 비밥으로 넘어가던 시대였고 음악적으로 타협할 의지가 없었던 그는 그의 인기에도 불구하고 미국에서의 삶에 크게 만족하지 못하고 1947년 프랑스로 돌아가게 된다. 



프랑스로 돌아온 그는 전쟁 후의 일반적인 삶에 적응하기 어렵고 또 그 스스로가 집시 삶의 살았음을 다시 상기시키게 되고 그는 지난날의 명성과 그의 음악적 정체성을 회복하고자 Stéphane Grappelli와 함께 팀을 결성하여 연주를 하게 되고 이는 이탈리아, 독일 그리고 영국까지 활동 범위를 넓히며 다시 한번 큰 성공을 하게 된다.  그러나 이 시기에 그는 변해버린 세상의 모습에 적응하지 못하고 더욱 기이하게 행동하게 되는데, 때때로 그는 공연장에 악기나 앰프 없이 등장 등장하기도 하였고 공원이나 바닷가에서 자기도 하였으며 만석이였던 공연에 나타나지 않는 등 자기 멋대로 행동하기도 하였다. 1950년는 미국의 유명 스윙 뮤지션인 Benny Goodman에게서 다시 미국으로 오라는 권유와 초대장을 받게 되지만 상업주의 음악계와 도시생활에 많이 지쳐버린 그는 거절하게 되고 그 후 1951년 그는 음악적 활동에 환멸을 느끼게 되고 더 이상 음악을 할 열정이 그에게 남아있지 않다는 것을 깨닫은 후 그는 화려했던 음악적 삶을 역사의 한 페이지로 남겨둔 채 은퇴하게 된다. 




은퇴후 그가 일렉 기타를 잡고 있는 모습




1951년 은퇴 후 그는 프랑스의 Fontainebleau 근방의 작은 도시 Samois-sur-Seine에서 머물며 간혹 파리의 재즈 클럽에서 연주 활동을 하기도 한다. 이때 그는 그의 밴드 Nouvelle Quintette와 함께 새 앨범을 녹음하게 되고(이는 그의 마지막 앨범이 되었다). 이에 새롭게 음악적 방향을 바꾸려는 시도를 하게 되는데 그에 일렉 기타로 악기를 바꾸고 비밥적 사운드를 시도하기도 하였으며 그가 가진 그만의 멜로딕 라인을 비밥적으로 해석하기도 하였다. 은퇴 후 이따금 두통과 화상의 통증으로 고생하기도 하였는데 병원에 가기를 꺼려했던 그였기에 이를 치료하지 않고 방치하게 되는데 이것이 원인이 되어 그의 컨디션은 극도로 나빠지기 시작하고, 평범한 어느 토요일 저녁 파리에서의 연주 후 Avon railway station를 따라 귀가하던 중 심장마비로 쓰러지게 되다. 이에 근방의 병원으로 실려가게 되지만 이때 이미 그는 사망한 상태였고 이때 그의 나이 43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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