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라쿠사
첫날밤 내렸던 팔레르모의 같은 터미널에서 시라쿠사행 고속버스를 탔다. 버스는 팔레르모 공항과 반대 방향인 동쪽을 향해 달렸다. 맨 앞자리를 차지해 탁 트인 풍경을 시원하게 즐겼다. 고속도로라지만 일반국도와 다를 바 없었고, 특이하게도 지면 보다 교각 위 도로를 더 많이 달린 듯싶다. 교량의 도로바닥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이음새가 나있어 버스가 그 부분을 지날 때마다 살짝 덜커덩거리는 것이 여간 거슬리지 않았다. 계곡이나 강이야 당연하다지만 농경지 위에 세워진 교량들을 보면서 왜? 홍수가 잦은 곳인가? 그 이유를 곰곰이 되짚어도 보았다. 빈틈없이 경작된 땅, 감탄할 색다른 풍경은 없었다.
시라쿠사에 가까워졌다는 인상과 동시에 특별한 공원묘지가 나타난다. 전쟁묘지다. 시라쿠사는 세계 제2차 대전 당시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도시였다. 1943년 7월 연합군 상륙작전 허스키 작전에 영국군이 도착하여 함락된 도시를 빠르게 되찾아 종식되었다. 그때 희생되었던 천명의 군인이 이곳에 묻힌 것이다.
버스는 시라쿠사 터미널에 도착했고, 화창한 날씨 덕분인지 이 낯선 도시가 우리를 반갑게 맞이하는 것 같다. 시라쿠사는 시칠리아 섬 동남쪽 끝자락 시라쿠사 만 연안에 위치해 도시이름도 여기서 유래되었다. 구도시, 오르티지아 섬으로 가는 시내버스를 탔다. 멀리서 또는 지상에서 보면 바다가 기다란 허리를 감싸 안은 듯한 형상의 이 섬은 기원전 8세기 고대 그리스인에 의해 도시가 건국되어 지중해의 주요 강국으로 부상했었고, 기원전 5세기부터 그 규모와 화려한 면에서 아테네에 필적할 만하다 했다. 키케로는 당시 이곳을 "그리스 도시 중 가장 크고 아름다운 도시"라 묘사하기도 했다. 그리고 로마 공화국을 거쳐 비잔틴 제국의 콘스탄트 2세 황제(663-669) 통치 기간에는 수도이기도 했다.
현재 시라쿠사의 모습은 남부 이탈리아 건축 표현의 가장 전형적인 18세기 초 시칠리아 바로크 양식이다. 1542년과 1693년 지진의 강타로 파괴된 도시를 지역 귀족 가문이 재건을 맡아 이전의 화려함으로 복원시켰다. 따라서 시라쿠사는 그리스, 로마, 바로크 등 다양한 문화적 영향을 아우르는 뛰어난 건축 양식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훌륭한 본보기다. 200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인기 있는 관광지가 되었다.
그러나 우리에게 큰 매력으로 다가오지는 않았다. 유럽의 유명 관광지에서 흔히 보이는 잘 정비된 모습이 약간 식상한 느낌을 주었다. 팔레르모에서 느꼈던 자유로움은 없었고, 섬 전체가 마치 모형처럼 미니어처 도시 같았다. 인위적인 느낌이었다.
건물의 규모에 있어서 웅장함보다 아기자기 예쁘고, 오밀조밀 소담하며, 미로처럼 밀집된 좁은 골목에서는 답답함도 느꼈다. 그러나 골목골목을 걷는 재미가 전혀 없지는 않았고, 한여름 불볕더위에는 오히려 피난처가 될 법도 했다. 반면 이 좁은 골목길에 수많은 관광객이 모여든다 생각하자 재미도 뭐도 홀연 사라진다. 다행히 도시를 감싸고 드넓게 펼쳐진 푸른 바다 덕분에 고대로부터 화려한 번성은 물론 지금도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톡톡히 받는 모습이다. 바닷가 전망 좋은 카페에 자리 잡은 여행객들, 얼굴의 절반은 선글라스에 가린 채 턱을 높이 치켜들고 사지를 쩍 벌려 앉은 모습이 여유작작하나 속물 같아 보기가 썩 좋지는 않았다.
오르티지아 섬의 동, 서 양쪽 수로에 다리를 놓아 신도시와 이어지고, 여기에 천 년의 역사를 가진 지중해에서 아주 오래된 포르토 그란데와 포르토 피콜로 두 항구가 있다. 포르토 그란데 항구 쪽은 긴 해안을 따라 공간이 넓게 형성되어 주말이면 가족, 친지 등 나들이객들의 시끌벅적한 모습에서 이탈리아 남부 사람들의 전형적 성향을 충분히 드러내고, 요트를 위한 작은 항구 포르토 피콜로는 터미널과 고고학 박물관 가는 노선이다.
시라쿠사에서 대표적으로 가장 멋진 명소는 뭐니 뭐니 해도 중앙에 있는 두오모 광장(La piazza del Duomo)이다. 이 광장은 협소한 도시 구조와는 다르게 긴 타원형의 아주 넓고 시원하게 펼쳐진 아름다운 공간으로 오르티지아 섬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다. 이곳에는 아름답고도 훌륭한 건축물들이 멋진 조화를 이루어 변천된 역사를 증언하며 서 있다. 광장 중앙에 시라쿠사 대성당을 비롯하여 그 옆으로 상원 궁전, 맞은편 델 보스코 궁전, 그리고 광장 끝에 산타루치아 알라 바디아 교회와 산타 루치아 알 세폴크로 교회가 있다.
시라쿠사 대성당은 이 도시에서 가장 중요한 교회로 200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포함되었다. 외부에서 보면 바로크와 로코코 양식이지만 내부는 아주 특이하게도 기원전 5세기 때 세워진 그리스 신전의 도리아식 기둥과 노르만족이 지은 중세 시대의 유적 일부가 남아 있다. 그 새로운 조화가 매우 독특한 양식으로 나타난다. 이곳은 아테나에게 바쳐졌던 그리스 사원의 자리에 이후 기독교 전파와 함께 7세기 교회로 개조되면서 신전의 기둥을 그대로 살려 재건되었던 것이다. 1693년 지진으로 노르만 양식의 외관은 파괴되었지만, 기둥은 보존되어 대성당 벽에 아직도 그대로 남아 있다. 이것은 유일하게 시칠리아에서만 볼 수 있는 것으로 시라쿠사가 주는 큰 매력이다. 이탈리아 남부 도시를 다니면서 많은 바로크 양식의 교회를 보았지만 이러한 것은 처음이다. 다시 한번 고대 그리스인들의 위대함을 되새기며 기둥을 그대로 살린 당시 사람들께도 심심한 경의를 표한다.
지금 보이는 바로크 양식 외관은 1713년 스페인 통치 시대가 끝나기 전 18세기 초에 재건된 것으로, 정면은 매우 복잡한 구성과 풍부한 장식으로 당시 노르만 시대의 양식에 따라 웅장하고 엄격한 모습을 갖추어 완성도가 매우 높은 표현이라고 한다.
교회 안으로 들어갔다.
으스름한 실내에서 가장 먼저 시선을 강하게 사로잡는 이 어마어마한 크기의 도리아식 기둥, 그 장엄하고 웅장함에 압도되어 입이 딱 벌어진다. 굉장하다. 훌륭하다. 멋지다. 참으로 신성하며 아름답다. 더 이상 떠오르는 말이 없다.
단순, 간결하면서 섬세함과 절제된 미적 장식에서 엄숙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가슴이 벌렁거린다. 숙연해진다. 조각상과 단철 창살의 부드럽고 유연한 곡선은 유영하는 듯, 여기 닿은 어느 장인의 손길이 느껴져 손발이 오그라들게 흥분되었다.
이 예술적 아름다움 앞에서 사진 몇 장과 보잘것없는 문장으로 대신하기에는 너무나 하찮고 미미하다는 생각에 이른다. 어리섞은 짓이 아닐까!
그리고 대각선 맞은편에 있는 팔라초 베네벤타노 델 보스코(이탈리아어: Palazzo Beneventano del Bosco) 궁전은 역시 대지진 이후 18세기 초 베네벤타노 남작을 위해 지어진 저택이다. 이 섬세하고 우아한 외관의 모습에서 비록 역사적 지식이 문외한일지라도 시선을 강탈당할 수밖에 없다. 나 역시 눈길 따라 발길이 사로잡혀 잠깐 넋을 놓고 말았던 것이다.
그 외 지진 이후 17세기 18세기에 재건 또는 복원된 다수의 교회들을 비롯하여 미술관으로 사용되는 벨로모 궁전, 13-14세기 외관의 팔라초 몬탈토, 호화로운 용암 상감 장식이 있는 팔라초 미글리아코, 도서관으로 사용하는 아르치베스코빌레 궁전, 현재 시청 소재지 베르멕시오 궁전, 기원전 5세기의 이오니아식 사원 유적, 이 섬의 주요 담수 공급원이었던 아레투사 분수, 그리고 13세기 지어진 요새로 카스텔로 마니아체, 청동기 시대부터 기원전 5세기까지의 유물을 소장하고 있는 고고학 박물관 등이 주요한 유적들이다.
그 가운데 세계 최고 중 하나로 꼽는다는 고고학박물관에 방문했던 날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자칫 감기 몸살로 여행을 망칠 뻔했고, 두 감정이 교차되었던 날이다.
비는 아침부터 내렸고, 고민 끝에 우산을 안 사기로 했다. 하루를 박물관에서 보낸다는 점과 들고 다니기 귀찮다는 이유다. 빗방울은 강해졌고, 이미 시내버스를 타러 가던 도중에 외투는 젖어버렸다.
박물관에 들어섰고, 알려진 바대로 유물들은 매우 훌륭하고 보존상태도 좋았다. 눈이 휘둥그레진다. 진열도 보기 편하게 시대별 정리정돈이 매우 잘 되었다. 특히 관람객이 적어 더할 나위 없다. 그러나 한기를 느끼게 하는 추위 때문에 점점 집중력이 떨어진다. 수량 또한 엄청나서 보는데 이미 반나절을 훌쩍 넘겼다. 이 냉기만 없다면 보고 더 보고 싶은데... 드디어 입에서 원망 섞인 불평이 터진다. 아무리 더운 지방이라지만 비로 인해 춥고 습한 날 온방기를 두고서 틀지 않는다는 게 말이 되는가? 이 비싼 입장료로 불충분한가? 혹시 저게 온방기가 아니라 냉방기? 아니면 고장이라도 났단 말인가?
몸이 아파오는 징조다. 눈앞이 어질어질하다. 춥다. 사실 배도 고프다. 일반적으로 박물관에 속한 카페도 없다. 참을 수 없어 나가기로 했다. 결국 나왔다. 세차게 계속되는 빗줄기...
맞은편에 시라쿠사를 대표하는 기이하게 생긴 현대적 건축물 교회가 보인다. 가까이 가서 자세히 보고 싶으나, 더 이상 비를 맞으며 길을 건널 용기가 없다. 멀리서 보는 것으로 대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