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시칠리아 여행 5

아그리젠토

by 다나 김선자



시라쿠사에서 아그리젠토 가는 버스가 없어 카타니아 공항으로 가야 했다. 직행은 더구나 아니다. 기차가 있긴 하나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 버스를 탔다.

버스는 섬 내륙을 가로질러 남서쪽을 향해 달렸다. 하나 둘 경유하는 곳마다 손님들은 내렸고, 버스 안의 탁한 공기도 조금씩 맑아졌다. 숨 쉬기도 한결 편하다. 창밖으로 드문드문 얕은 경사지의 포도밭이 나타난다. 분명 환경적 요인으로 보아서는 포도주가 생산될 법도 한데 포도밭이 보이지 않아 궁금하던 참이었다. 해가 중천을 지나 그 기운도 한풀 꺾었을 때 인구 약 6만 명의 소도시 아그리젠토에 도착했다.

앞서 묶었던 두 도시의 구도심 건물과는 달리 현대식 고층 아파트다. 엘리베이터는 물론 맨 꼭대기층에 거실과 방 2개 그리고 테라스까지 있다. 가격도 매우 좋다. 높은 층고의 복도 창가에 초록으로 작은 밀림을 이룬 화분들이 주인의 섬세하고 깔끔한 성격을 한눈에 드러낸다. 식탁 위에 수북이 담아 둔 사탕, 빵, 잼, 꿀, 비스킷 등은 끼니때를 넘겨버린 지친 여행객의 기분까지 보듬어 준다. 인심이 참 좋다.

아그리젠토는 높고 비탈진 언덕 위에 계단식으로 층층이, 빼곡히 건축된 옛 도시와 가운데 철길을 두고 그 아래로 현대식 고층 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두 세계가 분리된 모습이다.

구도심은 중앙 도로를 벗어나면 쥐 죽은 듯 조용하다. 짐작대로 사람이 살지 않아 허물어져가는 집들도 여럿 보인다. 다른 도시와 마찬가지 길목마다 바로크 양식의 건축물 교회들이 서 있지만 미적으로 아주 대단하지는 않다. 사실은 경사가 하도 심해 조금 올라가다 포기하고 도로 내려왔다. 굳이 힘들게 올라갈 이유를 느끼지 못했다. 문득 자동차가 없던 시절에 이 길을 오려 내리던 옛사람들의 강인함에 특별한 존경심이 우려 난다.

숙소가 있는 철길 아래의 신도시는 언제 지어졌는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추측건대 70년대 전, 후반) 도시 계획이 매우 엉망으로 보인다. 난립공사인지 소홀함인지 허술하기 짝이 없다. 도로변의 인도는 있다 없다 사라지기를 반복하여 똑바로 걸어갈 수가 없다. 인도인지 차도인지 주차구역인지... 아주 비인간적인 형상이다. 길가에는 쓰레기가 나뒹굴고 개똥과 함께 잡초가 자라서 길을 막는다. 도대체 공공기관이 존재하는지? 유럽의 도시가 맞는지? 의문스럽게 한다. 북부 이탈리아와는 많이 다른 모습이다. 아마 오랜 시간 마피아의 횡포로 굳어져버린 문화가 아닐까 하는 강한 의심마저 든다. 그러나 개인적인 공간만은 청결과 세련된 장식으로 이탈리아임을 실감케도 한다.


다음날 기원전 5세기의 고대 그리스 유적이 있는 일명 <신전 계곡의 고고학 공원>을 방문했다. 종일토록 화창한 날씨가 이어졌고, 하얗게 눈부신 햇살이 붉은 땅과 피부를 발갛게 달구며 조용히 파고든다. 티끌 한점 없이 높디높은 하늘이 시리도록 파랗다. 바늘로 찌르면 금방이라도 푸른 물이 주르륵 쏟아질 것만 같다. 입장료를 내고 공원 안으로 들어갔다.

잘 정리된, 그러나 야생처럼 자연스럽게, 나무와 식물, 특히 올리브와 아몬드나무, 선인장, 그리고 이름 모를 들꽃들 가운데 우뚝 우뚝 서 있는 고대 그리스 신전들의 흔적. 이 신성한, 성역의 땅. 감개무량하다. 이 아름답고 훌륭한 신전은 고대 그리스인들이 남긴 영화로운 산물이며 위대한 업적이다.

이 유적지의 신전들은 그 어느 그리스 신전과도 견줄 수 없을 만큼 아름답다. 하물며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에 버금갈, 아니 우위를 따질 수 없는 또 다른 아름다움이다. 그것은 웅장함과 우아함은 물론이고, 동시에 붉은 석회암이 주는 풍부함과 온화함이 아늑하게 서리어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다 잘 어우러진 녹색조경, 시원하게 펼쳐진 경관과 광활한 대지, 지형의 풍부함, 이 모든 주변 환경과의 조화다. 또 그것은 바탕색을 이룬 푸른 하늘과 해맑은 날씨가 숭고한 미를 완성케 했다. 그리고 방문객이 적다는 것도 한몫을 톡톡히 했다.

이처럼 더없이 좋은 분위기에서, 여유로운 공간에서, 천천히 걸으며, 사색을 즐기며, 좋은 구도를 찾아 사진도 찍고, 크로키 북을 꺼내 긁적 대어 보기도, 지치면 바위 위에 잠시 앉아서 쉬다가, 풀밭에 누워 신선한 공기도 마셨다. 눈을 감고 초록의 냄새를 맡고, 자연의 속삭임도 듣는다. 그렇게 한 낮을 고스란히 쾌적한 분위기에 젖어 지냈다. 신선놀음을 했다. 충만하게, 벅차게, 즐겁고 행복하게.


이 유적지는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거주해 왔었고, 고대에는 그리스인들이 정착하여 도시를 세웠으며, 이후에 로마의 영토가 되었다.

아그리젠토의 고대 이름은 근처를 흐르는 아크라가스 강에서 따왔으며, 기원전 582년 이웃 도시 젤라(로도스와 크레타인이 세운 시칠리아의 그리스 식민 도시를 말함)에서 온 그리스인들이 건설한 도시다.

이 유적지는 동, 서쪽의 계곡과 더불어 북쪽은 아크로폴리스와 아테네 바위가 있고, 남쪽으로 바다가 있다. 지형적인 조건 덕분에 적으로부터 자연적으로 자신을 쉽게 방어할 수 있었다.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곳에다 성소를 두고 성벽과 성문으로 요새화되었다. 이 도시는 기원전 5세기 중반에 풍부한 농업 자원으로 지중해 중심의 대규모 무역을 통해 번영한 식민지로 자리매김하였고, 특히 올리브기름과 포도주 생산은 도시의 부와 함께 주민들에게 사치스러운 생활과 쾌락을 주었다. 그들은 금은보석이 가득했으며, 금으로 장식된, 세련된 옷과 아이들은 청결함 속에서 자라났다. 그 풍요로움의 결과물로 당시에는 아테네 아크로폴리스보다 더 많은 사원이 있었다고 한다.

신전 계곡은 길이가 12km의 성벽으로 둘러싸여 현재 공원에는 헤라, 콩코르드, 헤라클레스, 디오스쿠로이 신전들의 흔적이 남아 보존되고 있다.

입구를 통과하면 가장 먼저 헤라 신전 앞에 닿는다. 고대 그리스의 여신 헤라는 판테온의 주요 신들 중 하나로, 제우스의 누이이자 아내이며, 신들의 여왕이자 결혼의 여신이다. 기원전 5세기 초에 세워진 이 신전은 현재 기본 단과 기둥만이 남아 원래의 규모나 형태를 짐작, 가늠케 한다.

헤라 신전을 처음 보는 순간, 기본 뼈대만 남아 있는 신전에서, 그 아름다움과 웅장함은 물론, 여성적인 우아함과 부드러움까지 동시에 느껴졌다. 그 인상은 아무런 정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살아서 전해진 것이다. 참 기이하지 않은가? 훌륭한 건축물은 이처럼 내재적 힘도 굉장함을 입증시킨다.

다음은 현재 보존 상태가 가장 양호한 콩코르드 신전이다. 기원전 440~430년 사이에 건축된 도리아 양식임을 잘 드러낸다. 그리고는 내가 가장 오래 머물러 있었던 헤라클레스 신전 앞에 닿았다.

헤라클레스에게 헌정된 이 신전은 기원전 5세기 초에 세워진 근방의 모든 신전 중 가장 오래되었으며, 현재 8개의 기둥만 남아있다. 이 기둥이 풍기는 엄청난 힘은 그 어떤 신전에서 보다 더 짜릿한 흥분을 주었다. 이것이야말로 헤라클레스 신이 가진 힘이고 역량이며, 그것은 오직 8개의 기둥에, 온전히, 그대로, 담겨 있었다. 그의 막강한 힘과 용기, 재치, 그리고 냉정함과 활달함, 그리고서는 매우 모험적이며 강인함까지 헤라클레스의 그 모든 특징을 잘 표현하고 있다. 불과 이 8개의 기둥에서!

그리스 신화 속의 헤라클레스는 몽둥이를 들고 사자 가죽을 쓴 모습으로 묘사된다. 그는 제우스와 알크메네의 아들이며, 당시 도리아인들에게 알려진 세계를 여행하고 지중해 전역을 여행하는 모험가로, 고대 그리스에서 가장 존경받는 영웅이다.

어느 각도에서 보아도 정확한 구도, 배열, 공간감과 내적 힘이 갖는 아름다움. 이 역시 참으로 신기하고도 놀랍다. 더 이상 무엇을 필요치 않게 한다. 오직 장식이 있다면 그것은 자연과 함께 신전의 잔해가 된 돌더미 일 것이다. 이 석괴를 포함한 8개의 기둥에서 원래의 신전 형태와 범위를 다양하게 상상할 수 있게 한다. 그러므로 이 잔재조차 그 유적의 일부인 증명서다. 이 돌무더기 덕분에 한층, 더욱, 재미와 다양성을 주면서, 오히려 상상력을 자극하고, 강렬함이 더 강조된, 아주 멋진 훌륭한 유적이다.

굳이 그림에 비유해 본다면 단순, 간결하면서도 강렬한 추상적 회화작품을 보는 것 같다. 흡사 실수로, 잘못된, 군더더기 같으나 그럼에도 없어서는 안 될, 필요불가결한, 좋은 분위기를 주는 자국들처럼. 파괴의 잔해, 거대한 돌덩이들처럼.

그리고는 바닥에 누워있는 거대한 석조 조각상이 보인다. 기원전 480년에서 470년 사이에 만들어진 올림페이온 신전의 일부였던 텔라몬(또는 아크라가스)의 모습이다. 높이가 7.65m의 석회암으로 만들어진 이 조각상은 시칠리아에서 발견된 조각상 중 가장 크다고 한다.

올림페이온 신전은 테론이 기원전 480년 히메라 전투에서 승리한 후, 카르타고를 물리친 그리스인의 영광을 위하여 기념비로 세운 엄청나게 큰 신전으로, 결국 완공에 이르지 못했고, 현재 그 자리에는 잔해더미로 남아 있다. 그 옆에 재생산된 거인 텔라몬도 함께 누워 있다.


돌아오는 길 박물관에 들어갔다. 우리뿐인 방문객. 서먹함이 괜스럽다.

유물들은 비교적 시라쿠사 고고학 박물관보다 상태는 약소해 보이나, 그 수효만큼은 버금갈 정도다. 어지럽다. 오리지널 조각상 텔라몬이 벽에 기대어 두 팔을 위로 추겨 올려서 하늘을, 건물천정을, 들어 올리고 있다. 박물관 뜰에서 당시와 같은 종의 염소가 기나긴 역사에 밑줄을 그으며 노닌다.

이미 밖에는 해가 서쪽으로 기울어 희미한 그림자마저 지우고 있다.

갑자기 목도 마르고 배도 고프다.


그리고,


이틀 후 시칠리아 섬 연안을 지나 알프스 상공을 지난다.



구도시 전경
구도시에서 내려다본 아그리젠토
헤라 신전
헤라 신전
헤라 신전
헤라 신전
콩코르드 신전
콩코르드 신전
콩코르드 신전
콩코르드 신전
헤라클레스 신전
헤라클레스 신전
헤라클레스 신전
헤라클레스 신전
헤라클레스 신전
유적지 안에 있는 레스토랑
텔라몬 조각상
헤라클레스 신전과 바닥에 누워있는 텔라몬 조각상
텔라몬 조각상의 복제품(작가는 확인 못했음)
고고학 박물관
박물관의 유물들
박물관에 전시된 오리지널 텔라몬 조각상
고대에 살았던 염소와 같은 종의 염소
박물관 정원
눈으로 덮인 알프스 산맥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