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의 오후 5시 풍경

미술관을 나와서...

by 다나 김선자



마침내 비 사이를 비켜나 아주 간헐적으로 개인 날, 내 치아 상담을 받으러 약속된 시간에 A와 함께 파리 16 구로 향했다. 지하철을 타고 무려 15 정거장을 거쳤다. 늦은 오후 예약된 상담을 끝내고, 우리는 예정대로 걸어서 파리 시립 현대 미술관에서 열리는 Hans Hartung(한스 아르통) 전을 보러 갔다.


넓은 미술관 안에는 작품 관람에는 큰 방해가 되지 않을 정도의 사람들이 그림들 사이에서 유유히 움직이고 있었다. 현대 미술이라 관람객이 많지 않을 것임은 예상을 했었다.

미술관을 찾을 때는 날짜를 신중하게 잡아야 한다. 파리의 가을은 풍성한 좋은 전시가 곳곳에서 열린다. 그럼에도 전시장마다 밀려드는 관람객들로 그림 감상은커녕 불쾌하게도 사람 구경이 될 수도 있다.


Hans Hartung(한스 아르통 또는 앙스 아르통), 나는 그의 몇몇 작품을 미술관 소장전에서 가끔 접하기는 했어도 자세히 알지는 못했는데, 이번 계기로 그의 작품 세계를 좀 더 구체적으로 알게 되었다.

그는 독일 태생으로 파리에서 활동하였고 말년에는 남불의 지중해 연안도시 앙티브에서 작업과 생을 마감하였다.

이번 회고전은 1904년에 태어나 1989년 죽음을 맞이하기 전까지의 50년이란 긴 시간 동안 끊임없이 철저히 실험적인 작품들을 회상하여 연대적으로 펼쳐져 있었다.


처음에는 그의 작품이 왜 이곳에 전시되어야 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거칠고 신경질적으로 자유분방한 선들은 성급한 소년이 아무렇게나 그어놓은 낙서 같은, 얄팍함 마저 드는 것은 나뿐이었을까? 전시된 작품수는 또 얼마나 많은지, 기획 의도까지 궁금증이 생겼다?

그렇게 한 걸음씩 나아가 작가의 중, 장년기 작품에 이르러서야 나는 그의 작품을 차츰 이해하게 되었고, 말년 작품에서는 드디어 분방함과 대담함에 자유로움으로 그의 예술세계에 절정을 이루었다는 걸 볼 수 있었다. 특히 마지막 전시실에는 3 x 5 미터의 대형 작품들이 전시되었는데, 그중 내가 A와 같은 마음으로 가장 좋아하는 작품은 검은색과 유사한 짙은 남청색 물감을 하얀 캔버스 위에 반구형태로 가볍게 스프레이를 뿌려놓은 작품이다. 거기에는 그냥 작은 점들만 있다. 그런데 거기에는 우주가 있고, 세상의 끝이라고 일컫는, 남태평양 폴리네시아 작은 섬 푸투나에서 본, 그 밤하늘이 있었다.

침묵!

명상!

자유!

에너지!

그리고 아름다움!


그의 작업세계는 60년대 유럽에서 유행하던 타이즘(tachisme)* 경향의 추상작품이고, 종이 위에 드로잉, 수채화, 파스텔화, 캔버스 위에 유화, 사진, 조각 등의 전 장르를 망라하였으며, 여러 도구와 재료를 사용하여 솔질, 긁기, 뿌리기 등의 다양한 기법으로 다작을 했었다.

* 타이즘(tachisme)이란, 흔적, 얼룩이라는 뜻을 가진 프랑스어 타쉬(tache)에서 유래되었음.

40년 50년대의 서예적인 요인과 그래픽적 요소의 조형작업, 긴장감에 속도감 있는 제스처와 60년, 70년대에 이르러 각종 도구로 긁기, 솔질, 뿌리기 등의 기술적인 방법을 도입한 흔적 내기, 그리고 80년대 와서 생의 말년에는 대형 캔버스에 마치 스펙터클하고 리듬적이며 다이내믹한 선과 점으로 구성된 그의 강렬한 예술적 열정이 자유롭게 표현되었다.

좋은 전시를 본다는 것은 비타민제를 복용하고 영양을 공급하듯 정신적인 자극제가 되어 작업을 하는데 에너지를 제공한다. 좋은 작품에서 품어내는 강렬한 힘이 나에게 온전히 전달되어, 내면에 가라앉는 불씨에 새로운 기름을 부어주는 필요한 에너지원 역할일 것이다.

나는 작업실로 돌아가 얼른 작업에 임하고 싶다는 충동이 꿈틀거린다.


미술관 서점을 거쳐 밖으로 나왔다. 해가 기울어 땅거미가 내려앉는다. 짙은 남색 어스름이 고풍스러운 건물을 감싼 거리는 고적하다. 차가운 공기에 부르르 몸이 움츠려 목도리를 단단히 잡아맨다. 맑고 가벼운 정신에 마음속은 무언가로 가득 찬 깊숙한 내면에서 끓어오르는 열정을 느낀다. 상쾌하고 기분 좋은 저녁녘이다.


A와 팔짱을 끼고 온기를 나누며 우리는 차가운 거리를 걸었다. 알마 다리(pont de l'Alma)에 다다르자 분주한 차량과 인파들로 도시가 생동감을 자아낸다.

저물어 가는 가을의 저녁 5시 파리 풍경은 황홀하게도 아름답고 매력적이다. 어둠이 온전히 내려오기 전, 구름 사이에서 파란 하늘이 드문드문 내려 비추는 투명하고 연한 빛으로 슬며시 사물들을 드리울 때, 도시는 풍부한 대비를 이루고 더욱 활기찬 풍경이 되어 그 모습을 또렷하게 드러낸다.

"난, 이 시간 즈음이 참 좋아, 도시가 정말 아름답거든!"라고 곁에 있는 A가 말한다.

어둠이 깊어가는 다리 아래로 강물은 묵묵히 흐르고, 가로등 불은 온화하게 도시를 밝힌다. 센 강 너머에 오렌지빛으로 불 켜진 에펠탑은 마치 줌 렌즈로 잡아당긴 듯이 알마 다리 앞에 우뚝 섰다.

언제나 많은 관광객들이 붐비는 곳, 다리 위에서 불이 들어온 에펠탑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사람들, 그들의 즐거운 미소 가운데서 친근하게 느껴지는 한국어가 들린다. 나도 한마디 거들어 아는 체를 하고 싶지만 그럴 순 없겠지?

다리 건너 맞은편에는 고결하고 우아한 황금 은빛에 양파 모양의 돔 러시아 동방정교회(cathédrale de la Sainte-Trinité) 지붕이 참으로 황홀스럽게도 어둠에 잠기어 간다.


우리는 샹젤리제 거리(av. des Champs-Élysées)에서 지하철을 타기 위해 럭셔리한 매장들이 밀집한 몽떼니으 가(avenue Montaigne)를 가로지른다. 인도의 양 가쪽에서 느껴지는 이 화려함과 인적 없는 고요함이 마치 냉소적으로 다가온다. 나는 단단히 외투를 저민다.

샹젤리제 프헝클랑 드 후스벨뜨(Franklin D. Roosevelt) 정류장에서 1호선 지하철을 타고 레알(les Halles)에서 내렸다. 퇴근시간이라 무척이나 붐비는 레알 지하통로는 거리의 악사들이 들려주는 색소폰과 바이올린 연주에 따라 사람들은 흐르는 센 강물처럼 묵묵히 그러나 총알같이 빠르게 걸음을 재촉한다.

메아리로 들려오던 연주곡이 끊어질 때 우리는 이미 플랫폼에 닿아 있었다.